보통 한국교회의 이단사이비 단체의 연구에 있어서 제일 먼저 시작되는 것이 집단의 창설 배경을 알 수 있는 교주의 신앙이력을 알 수 있는 신상파악이다. 그러나 동방번개 전능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는 활동상황과 교리에 대해서 소개된 적은 많지만 정작 이 집단의 실제적인 교주의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소개된 곳이 없다.
조유산의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해외 언론에 소개된 조유산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유산의 신상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유산의 친동생 조옥(赵玉. 男)이 말에 따르면 조유산의 본명은 조곤(赵坤)이고 1951년 12월 생으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아성 철도국 직원이었다. 일가 형제 10명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식구마저 많아 늘 식량이 부족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대인관계는 그저 남들과 잘 어울리는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소학교 입학 후 조유산은 '조곤'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부모 몰래 '조유산'으로 학교에 개명신청을 하였다. 소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반란단(造反团)을 조직하고 대자보(大字报)를 썼으며 비판대회를 열고 교장을 비판 투쟁했다. 그때 학급애들과의 관계도 보통이었고 별로 특수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하고 어느 목수 밑에서 목수 일을 배웠다. 아둔하지 않아 몇 개월 후 다른 사람 따라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손 재간이 괜찮다는 평판을 받았다.
1971년, 조유산은 부친을 따라 아성 철도공무단(铁路工务段)에 근무하게 되었다. 남들은 안정적인 직장이라 부러워 했지만 조유산은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1983년 장기적인 무단 결근으로 직장에서 해고된 조유산은 흑룡강성 신화 제2 공장에 출근했고 그 일자리도 달갑지 않아 1985년 다른 사람과 직장을 바꾸어 아성 녹말제당공장에 근무했으나 무단 결근이 많아 다시 해고됐다.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조유산에 대해 특별한 데 없이 평범했고 늘 이상하게 넌지시 뭘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결혼 후 종교를 접한 조유산
조유산과 전처 부운지(付云芝)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결혼 후 목수 기술로 제자와 함께 집 짓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제자와 제자의 아버지가 종교를 믿고 있음을 알게 됐고 그들의 영향을 입어 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부운지에 따르면 조유산이 종교를 믿은 후 입교하라고 극력 권하는 바람에 자신도 따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속은 딴 판이었다. 1989년 조유산이 '영원(永源)교회'를 설립하고 자주 비밀 집회를 가졌으며 '전권의 주'라고 자칭하며 못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에서 이를 발견하고 증거를 찾아 '영원교회'를 불법조직이라 규정했다. 소식을 미리 접한 조유산은 처자를 버리고 외지로 도주했고 부부 인연은 이렇게 끝났다.
정통 신앙에서 일탈
1983년 조유산이 기독교를 신앙하기 시작했다. 신앙초기 중국 아성 현지 기독교 교회에 가입했고 교회에서 자원봉사 일을 시작했는데 차츰 여러 가지 이상한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 아성 종교국 간부 조경방의 소개에 따르면 그때 아성 기독교교회의 장로들 거의 다 70에 접어든 나이고 젊은 사람들이 적은데다 글을 몰라 성경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나마 조유산이 중학교를 졸업했고 배운 게 있었으며 모임 장소에서의 발언도 논리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유산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그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아성 기독교 내에 '장로파'와 '소군파(小群派)' 가 있었는데 교의(敎義)를 둘러싸고 그들 사이에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 이런 분쟁이 조유산에게 이용되어 그가 일부 신도를 끌고 분파하여 나왔고 교회 관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공부를 했고 같은 년령 층의 신자들 중에서 출중한 조유산이 교회의 장로들을 얕잡아봐서 교회 조직과의 갈등이 날로 심각해져 결국 조유산이 자립해 새로이 일파를 만들고 비밀 집회를 가지며 사악한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종교에 심취하여 직장 일에 소홀했던 조유산과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조유산의 부친과의 다툼은 잦아졌다. 조유산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자기 주장이 더욱 강해져만 갔다.
1985년 어느 날 밤, 조유산의 부모와 자식이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가족들의 반대와 간섭이 없게 되자 그는 아예 집에서 '구들 집회(炕头聚会)'를 가졌고 사람들이 날로 모여들자 조유산은 '능력주(能力主)'를 설립한 후 자신이 신(神)으로 자처하고 비밀조직 활동을 개시했다. 성원들마다 유일한 약호가 있고 외부인은 알 수 없었다. 당시 '능력주' 내부에 '성령충만설방언(圣灵充满说方言)'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말을 '자기 사람'들 사이에 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간혹 신도가 그의 다리 밑에 기여 들어가 그를 업고 흔들었고 숱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를 업으려 했다. 조유산을 한번 업으면 구원되며 '능력주'를 업었으니 나중에 '하늘로 올라'가면 '대우'를 받는다고 전해졌다.
후에 조유산이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话在肉身里)"이란 책을 냈는데 '여 그리스도'가 두번째의 도성육신(道成肉身)이라고 말했다. 처음은 예수의 도성육신이고 그건 은전시대이며 '여 그리스도'가 신도들을 데리고 은전시대에서 내려왔는데 이것이 두번째의 도성육신이고 국도시대이며 신도들이 반드시 '여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책에서 독려했다. 지난 세기 90년대 하남성으로 도주한 조유산은 전능신교를 설립하고 대학입시에서 낙방되어 정신분열증에 걸린 현재 부인 양향빈(杨向彬)을 '여 그리스도'로 신화하고 자기가 '대제사(大祭司)'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중국의 종교 관련 부처는 1995년 전능신 하나님의 교회를 사교(邪敎)로, 조유산을 사교전능신의 창시자, 조직자, 관리자로 규정했다.
조유산과 양향빈은 2000년 미국으로 도피하였고 추종 신도들에게 전 세계로 나가 포교할 것을 명하였다.
조유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체는 오는 9월 11일 오후 2 시 롯테시티 호텔(구로점) 4층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동방번개 해부 세미나'에서 조 교주에 대해 그간 연구해온 해외 전문가들을 통해 밝힐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