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더럽고 치사해서!' 살아보겠다고 남들 앞에서 창피도 당하고 비굴해지기도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마음의 소리다. 사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충분히 이 더럽고 치사한 세상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꼭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 소개하는 작품을 한 번 보시길 바란다.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의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천년"(a thousand years, 1990)이다. 사실 허스트는 1991년에 사치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유명해진 작가이다. 죽음이라는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독특하고 직접적으로 표면화해서 관람자 앞에 내놓는다. 예를 들어, 동물의 사체를 사용하는 식이다. 젊어서 시체닦이 일을 하며 마주했던 경험이 이런 작품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그래도 그것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독특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앞에서 소개했던 "천년"으로 돌아와서, 설치미술인 이 작품은 먼저 구조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설명이 꺼려지는 것이 작품 자체가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우선 피가 흥건한 소의 잘린 머리가 강철로 프레임이 되어 있는 유리관의 한 쪽에 놓여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파리가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해 놓고 가운데는 구멍이 뚫린 유리를 세워놓았다. 아마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면 이 유리관 안은 파리와 구더기로 가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스트는 조명에 전기가 흐르는 그물망을 소의 머리 위에 매달아 놓아 파리가 접근하면 타 죽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관람자는 알에서 구더기가 되어 소의 사체를 먹고 파리가 되어 날아가다가 살충기에 타죽게 되는 일련의 삶의 패턴을 한 눈에 보게 된다. 소의 머리나 파리가 죽게 되는 살충기의 혐오스러움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의심하게 할 만큼 기괴하다. 그러나 허스트는 이것을 통해 우리네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길 원했다. 이것은 정말 더럽고 치사한 세상의 축소판인 것이다. "천년"이란 제목은 이런 세상(작품)을 가만 두면 그렇게 천년이 흐를 것이란 암시이기에 더 섬뜩하기만 하다.
여기서 질문 하나.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세상에 들어오신 것일까? 이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신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파리의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파리보다 우리가 한 차원 위의 존재인 듯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큰 착각이지만.) 그것은 파리 세상과 우리 사이가 유리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유리가 두 존재의 차원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라! 그곳엔 어떤 숭고함도, 신이 된 듯한 착각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든지 파리를 다 죽이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세상에 들어오신 것인가?
예수님의 성육신의 정도가 이 정도일지 상상이나 했을까? 파리보다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유리관 안에, 그것도 가장 구석진 곳에 나타나셔서 전기 살충기보다 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이신 것일까? 도망도 안 가고 끔찍한 우리들을 다 죽이지도 않고 유리관에 들어오셔서 손수 피 흘리며 유리를 깨신 그리스도. 단절된 차원을 잇기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구원은 그러기에 말로만 된 것이 아니다. 만져질 수 있는 사랑.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그 은혜가 참 크다. "천년"의 혐오스러움이 크면 클수록 은혜의 역량도 커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유리관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이 없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된 증거는 더럽고 치사한 세상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주님은 지금도 유리관 안에서 말씀하신다. 일곱을 일흔 일곱 번 더한 "천년"이라도 사랑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