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 6시간 (23.8Km)
오늘은 동생들과 떨어져 오롯이 혼자이다. 매 끼니와 휴식, 잠드는 순간까지 내가 유일한 나의 벗이 된다. 여행 노선은 각자의 여행 계획과 피로 누적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함께 걷던 나의 동행들은 레온(Leon)으로 미리 건너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예정이다.
며칠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지던 오늘 아침, 곤히 자던 동생들이 인기척에 일어나 잘 걷고 있으라며, 곧 다시 만나자며 응원을 건넨다. 잠깐 헤어지는 것이지만 허전함은 숨길 수 없다. 여행에서의 만남은 그 깊이가 다르다.
함께 레온으로 가자는 동생들의 권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얼마나 잘 책임질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모든 상황에서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 이 길 위에서 시험해 보고 싶었다. 불쑥 솟은 오기가 혼자가 될지언정 떠나라고 부추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800Km 위에 내 발자국 도장을 새겨보련다.
혼자 걷다 보면 새로운 인연과 마주하게 된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만났던 한 순례자를 거의 3주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너무 반가웠다. 이분은 50대 후반의 여성 순례자로 인도에서 6개월, 모로코에서 6개월을 지내는 등 세계 각국을 trip이 아닌 journey로 다니는 분이셨다. 활동 범위와 경험의 넓이가 초보 순례자인 나와 비교되지 않았다.
사실 이 어머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에 1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나 있는 아들은 이미 다 자라 독립했고 남편과의 관계도 특별한 불편함 없는 안정된 관계에 있었는데, 불현듯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이 사는 중국에 갔던 게 계기가 되어 세계 각국을 돌고 돌아 이 먼 곳 산티아고에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떠나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일상을 벗어나야 만나게 되는 그런 사람이 있다.
밝고 유쾌한 어머님과 걸으며 그간의 안부와 함께 '감정'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이 감정은 물론 '사랑'에 관한 것이다. 구구절절한 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님께서는 누군가를 보며 설렐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라며 본인은 이제 그런 것이 없어 아쉽다고 하셨다. 어쩌면 까미노를 걸으며 썸을 탄다는 건 여기 온 대부분 젊은 순례자들의 작은 소원일 수 있다고 하셨다. 마음을 숨겨도 거절, 이야기를 해도 거절이라면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신다.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말이다.
그렇지, 마음에 핀 꽃향기를 숨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다. 롤랑 바르트의 책 <사랑의 단상>에서 '언어'는 감출 수 있어도 결국 '몸'은 말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 배우는 아니다. 내 몸은 고집 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 바른 어른이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p.74)
그래,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을, 용기를 내보자. 거절과 실패, 넘어짐을 반복하며 배우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맙습니다,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