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강도사 고시를 준비할 때, 논문의 주제가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논문의 주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전자 복제에 대한 주제였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래서 논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여러가지 책들을 읽어보면서 과학의 발달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우리 인간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능력은 인간을 점점 초라하게 만들고, 인공지능을 한 번 이겨보겠다고 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가능성을 더 넓게 입력을 시켜 놓으니 인공지능은, 과학은 인간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정의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복제도 이제는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유전자 조작이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남자와 한 여자에 의해서 태어나게 된다고 하는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탄생이 이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복제된 인간도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의 발달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우리가 SF영화와 같은 곳에서 과거에 놀랍게 보았던 그 현실이 오늘날에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연구한 것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일어나게 된다고 가정을 해 보면, 과학의 발달은 현재 우리가 정의하는 것들을 새롭게 정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과학의 발달이 인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요?
과학은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편리함과 윤택함을 제공해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과학의 발달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결코 인간이 현명하고, 똑똑해서 결과가 인간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준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매우 교만한 존재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것 같지만 우매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발전시키고,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음에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분명한 방향성도 모른 채로 속도만 내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서로 빨리 가려고 속도 페달만 더 강하게 밟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먼 곳까지 초대형 망원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주에 있는 행성에 사람을 보내기도, 우주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정비결을 보고, 운세에 집착을 하는 미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관계는 점점 깨어지게 되고, 우리의 관계는 스마트폰으로 집중을 하게 됩니다. 친구와 멀어지는 것보다, 내 손에 스마트폰이 없어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관계의 멀어짐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독의 그림자는 우리에게 점점 밀려옵니다. 하나님과 멀어짐보다, 스마트폰과 멀어짐이, 전화 한통 안 오는 불안함이, 카톡의 메시지가 오지 않으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만들고 있는 유토피아는 결국 인간을 유토피아라는 감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http://www.cbooknews.com) 편집자칼럼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