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어가 타락한 당시의 교회를 향해 던진 묵직한 담론은 반향을 얻지 못했다. 권력의 단맛에 취한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외침을 불온시했을 뿐이다. 1854년에 그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비틀어 '기러기'라는 우화를 썼다. 쇠렌이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이었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오리 틈에서 자라는 동안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백조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자기가 백조임을 깨닫는다는 이야기이다. 쇠렌은 그런 교훈적이고 따뜻한 결말을 받아들일 만큼 낙관적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야생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오자 농장에 살던 길들여진 기러기들은 날개를 치며 법석을 떨었다. 그들과 함께 머물던 기러기는 가을이 다가오자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들을 버려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저 푸른 하늘을 함께 날자고 권하면서, 조금씩 높이 나는 연습을 시켰다. 처음에는 흥미를 보였지만 기러기들은 곧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기러기들은 야생 기러기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타박했다. 그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담장 안을 뒤뚱거리며 걷는 다른 기러기들의 뒤를 좇으며 야생 기러기도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가야 할 곳을 잊고 말았다.
쇠렌은 이 이야기 끝에 탄식하듯 말한다. "이미 길들여진 기러기는 야생 기러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야생 기러기가 길든 기러기가 되기 쉽다. 그러니 경계하라!" 어쩌면 이것이 쇠렌 키에르케고어의 영적 유훈일 수도 있겠다. 하늘을 잃어버린 기러기, 가을이 되어도 떠날 줄 모르는 기러기의 존재는 슬프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기러기 우화는 본향을 잃어버린 채 땅의 현실에만 탐닉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상이 아닌가.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무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이 아닐까? 초월의 빛을 땅에 끌어들여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교회는 하늘의 부름에 따라 길을 떠나지 않는다.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에 머물며 세상의 달콤한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할 뿐이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핑계를 대며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루틴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들의 타성을 깨고 변화의 흐름 속에 동참하려는 이들이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들에 열을 올릴 때 교회는 역사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야생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이 아니던가. 길들여진 기러기는 더 이상 기러기가 아닌 것처럼 출애굽 정신, 십자가 정신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