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서구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선미'(眞善美)로 이해되었다. 특히 이 세 가치는 종교의 근본이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신미의 근원으로 고백한 한국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1930)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진선미에 대한 강조는 종교와 철학의 핵심주제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신학자를 포함한 인문학자들은 진선미의 문제에 새롭게 다시 주목하고 있다. 특히 그들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논의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우리가 꿈꾸는 교회를 상상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첫째는 진-선-미의 순서가 절대적인가 하는 논의이다. 이것은 진-선-미의 균형성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것은 예술신학자들에 의해 주로 논의된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적 논의에서 '미'를 소외시키고 진과 선만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성서해석학과 선을 추구하기 위한 기독교윤리학은 강조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미학은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예술신학자는 바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이다. 그래서 그는 진-선-미의 순서를 역전시켜 '미-선-진'의 신학적 체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그것은 그가 15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저서를 집필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즉 그는 15권 중 1~7권까지는 신학적 미학을 다룬 부분으로 <하나님의 영광>(The Glory of the Lord)이란 제목으로 집필하였다.
그리고 8권부터 12권까지는 선의 문제를 다룬 <테오드라마>(Theo-Drama)이며, 13-15권까지는 진리의 문제를 다룬 <테오-로직>(Theo-Logic)이다. 이처럼 발타살은 진-선-미의 순서를 미-선-진의 순서로 역전시켜 미의 측면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분량에서도 미의 신학을 진의 신학보다 거의 두 배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발타살의 주장처럼, 우리의 교회도 진리의 공동체와 공의의 공동체에 비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 공동체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진선미가 조화롭게 추구되는 공동체요, 특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미의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공동체이다.
둘째는 진선미의 문제가 디지털-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논의이다. 이것은 과학기술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인간성의 가치란 무엇인지를 찾는 문제와 깊이 연결된다. AI(artificial intelligence)로 불리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human)이 과학기술과 결합된 새로운 인간 곧 '포스트-휴먼'(post-human) 혹은 '트랜스-휴먼'(trans-human)과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진선미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교육학계에서도 작금의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왜냐면 현재 각급 학교에서의 교육목적은 인간성 교육이 아니라 취업이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월성 교육으로 변질되면서 소위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독재의 출현'은 진선미에 대한 논의를 억압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왜냐면 진선미의 자유로운 토의는 민주주의를 전제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또 포스트모던 상황이 도래하면서 가치의 상대화라는 과거 독재의 시대에 버금가는 새로운 진선미의 혼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디지털-포스트모던적 상황에 직면하여 새로운 진선미를 추구하는 신앙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는 진-선-미가 독립적인가 아니면 상호의존적인가 하는 논의이다. 이것은 칸트 이래 현대철학자들의 주장에서 잘 발견된다. 주지하듯이 칸트 이전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진선미의 유기성을 강조하였다. 즉 진리는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는 상호연결된 유기성 말이다. 하지만 칸트는 진-선-미의 독립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진-선-미를 각각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이란 책을 각각 집필하면서 그 세 가치 사이의 독립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중지능이론을 통해 유명해진 가드너(Howard Gardner) 역시 그의 책 <진선미>(2011)에서 이 셋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그 관계성보다는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신학에서도 지금 진행되고 있다. 즉 과거의 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이란 이름으로 신학의 체계성 내지 통일성을 중시하면서 진선미의 상호관련성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진선미의 유기적 체계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그 설명이 곤란한 주제들은 신학적 논의에서 배제시켰던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나 여성성, 생태계, 그리고 이웃종교나 현대과학 등의 주제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이제 신학은 더 이상 그런 주제들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 소외되었던 주제들을 이제 과감히 신학적 주제로 소환하여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탐색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그 동안 진선미의 엄격한 체계를 통해 배제시켰던 신학적 주제들을 주저없이 신앙공동체의 삶의 주제로 초대하여 구성신학적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하는 명실상부한 진선미의 공동체이다.
※ 이 글은 손원영 목사(서울기독대 신학대학원 전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앞서 <주간기독교> 『2211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