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탄다. 이런 고통스런 위기를 당한 때에, 사회는 교회를 칭찬하는 분위기여야 맞다. 오래된 천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복지센터에 놓고 가신 그 팔순의 할머님처럼, 이 어려움을 당한 사회에 감동을 남기고 있어야 맞다. "교회여 감사합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맞다.
행정공무원들이 대교회들에 전화해서 어려운 교회들 월세 도와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이미 형제 된 교회들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생계가 곤란해진 주민들에게 예배 헌금, 특별기금이라도 모아 전달했어야 했다. 그 뿐인가, 스님들이 단체로 병원에 누워있는 확진자 환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는 뉴스 그 사진 속에 우리 목사들이 누워있어야 했다. 부끄럽고 괴롭다. 일부이지만, 수천의 교회가 행정지도를 받는다는 뉴스에 수 없이 달리는 조롱의 댓글들을 보면 가슴이 탄다.
예배가 왜 권리가 아니겠는가. 특정한 장소에 집단으로 모여 예배하는 것을 방역을 위해 금지한다는 데에도, 그것을 종교 탄압이라고 느낀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께 대한 그 충정, 교회에 대한 그 충정을 의심하겠는가.
하지만 설사 세상이 기독교를 탄압해도 교회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 수밖에 없다. 세상의 비방하는 말,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지한 말을 막는' 하나님의 방법은, 교회의 '선행' 밖에 없다(벧전 2:15).
교회는 세상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을 하는 이익 단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곧 선교이다. 우리가 항의하고 비방하는 그 대상이 우리의 전도 대상이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런 교회가 외딴 섬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있다.
이 사회에서 개신교 목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가 무려 70%에 육박한다는 통계를 어제 들었다. 2020년 통계조사이다. 사회의 70%가 이미 마음을 닫고 있다. 세상의 비방을 잠재우는 길이 무엇일까? 머리에 띠를 띄고 항의하며, 숫자로 위협할까? 옳고 그른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처절하게 예배하는 우리 주님은 정작 비방에 비방으로, 위협에 협박으로, 힘에 힘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벧전 2:23).
옳고 그르다고 믿는 것을 정당한 방식으로 항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늘, 복음은 옳고 그른 것을 떠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확신하며, 그런 은혜로운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예배하는 교회가 이런 때에,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자신을 비방하는 '죄인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신 주님을 따라, 억울해도 희생하는 감동을 보여주는 길이, 진짜 예배이지 않을까. 항의를 뛰어 넘는 감동이 필요하다. 가슴이 타서 기도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