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라는 용어는 늘 내 마음 한구석에 개켜 있다. 냉전 시대의 이념의 깊은 골로 인한 남북분단의 아픔을 기억나게 해주는 쓰라린 단어다. 나는 아직도 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쇠약해진 노구를 이끌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판문점을 넘어 북쪽 땅을 밟은 이인모(李仁模, 1917~2007)씨의 송환 장면 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종군기자였던 이인모는 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돼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당시 36세였다. 이후 34년간 복역하면서 전향을 거부하여 비전향장기수가 되었다. 그 후 석방된 후 76세의 나이로 1993년 3월 19일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비전향 장기수"(非轉向 長期囚)란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장기간 생활한 국내 게릴라, 조선인민군 포로와 남파 간첩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생각할수록 비전향장기수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의 신념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비전향(非轉向)이다. 말 그대로 전향(轉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 아침 교회에서 설교를 듣던 중 "회개"(悔改)에 대한 말이 나왔다(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라는 구절이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인데 전치사 "메타"(뒤에, 함께)와 동사 "노에오"(인식하다, 생각하다. 숙고하다)의 합성어다. 풀어 설명하자면 회개는 자기가 했던 어떤 행위나 일이나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이다. 그니까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뒤돌아 볼 줄도 과거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여기까지는 회개는 인식작용에 관해서다. 거기까지 만이다.
근데 신약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헬라어(메타노니아)에 대응하는 구약 히브리어 단어가 있다. 보통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는데, 하나는 "돌아가다" "돌아오다"라는 뜻을 가진 슈브(שוב)가 있고 다른 하나는 "미안하게 느끼다" "죄송하다" "잘못했다고 느끼다"는 뜻을 가진 "나캄"(נחם)이 있다. 히브리어 "나캄"은 헬라어의 "메타노이아"와 비슷하게 "느낌과 인식"에 방점을 찍는다면, 히브리어 "슈브"는 방향, 움직임, 동작, 행동을 중요시 여긴다. 즉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전향(轉向)이다! 마치 갓 태어난 예수를 경배하기 동방에서 왔던 점성가들이 예수를 만나 경배한 후로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간 것과 같다!(마 2:12)
이처럼 회개의 시작은 "다시 생각함"(메타노이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길, 다른 길, 지금까지 걷지 않은 길로 걸어가는 것(슈브)이다. 전향이다! 지속적 회개, 지속적 전향 말이다!
문제는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비전향 장기수" 달리말해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와서 살면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노래하면서도,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는 나의 왕"이라 찬양하면서도 실제의 일상 삶에서는 "비전향"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돌이켜 생각하는 주일 오후다.
"회개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일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다"(기독교강요, III.3.5,6).
※ 이 글은 류호준 백석대 은퇴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