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영어로 "Wherever you go, there you are." 이라는 말이 있다. "네가 어디에 가든지 거기에는 네가 있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 "Wherever Koreans are, there is Kimchi is."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과 김치는 뗄 레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다른 한편 한국의 김치와 비슷한 음식이 다른 나라에는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전 연세대 유동식 교수는 한국의 3대 음식으로 비빔밥, 곰탕, 김치를 꼽고 있고, 강국희 성균관대 낙농학과 교수는 비빔밥, 찌개, 김치를 들고 있다. 두 분에게 이 중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음식 하나만을 지적하라면 단연 김치라 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사실 비빔밥을 먹을 때도 곰탕이나 찌개를 먹을 때도 거기에는 반드시 김치가 있기 마련 아닌가. 결론적으로 한국음식문화를 생각할 때 김치를 빼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김치가 없는 한국인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이처럼 한국인과 뗄 레야 땔 수 없는 김치가 한국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 한국인의 정신문화 내지 종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을 잠시 살펴보려고 한다.
1. 김치의 역사
여기서 한국인들의 언제부터 김치를 먹기 시작했는지 김치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농경문화를 시작하면서 곡물을 주식으로 삼게 되었는데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에너지원인 곡물뿐만 아니라 무기질과 비타민의 주요 공급원인 채소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채소를 재배할 수 없기에 가을에 걷어 들인 채소를 겨울에 먹을 수 있도록 저장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저장법 중 하나가 김치라 볼 수 있다.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면 젖산이 나오고 이 젖산이 소금과 함께 채소가 짓무르는 것을 막는 일을 한다. 한국처럼 겨울이 긴 나라에서는 이와 같이 채소를 겨울에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보관법을 활용하는 것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문헌상으로는 3000년 전 시경(詩經)에 오이를 소금에 절인다는 뜻을 나타내는 저(菹)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김치를 먹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문헌상으로 보면 고려 중엽 이규보(1168-1241)의 글에서 염지(鹽漬)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어원적으로 "김치"라는 말은, 국어학자 박갑수 교수에 의하면, 침체(沈菜)에서 팀채-딤채-짐채-김채-김치로 변해 온 것이라 본다.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의 김치, 고춧가루가 들어있는 형태의 김치는 물론 임진왜란 때 고추가 들어온 후 1700년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고추를 첨가하므로 매운 맛이 생긴 것은 물론 김치의 부패를 방지하고 소금의 용량을 줄이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김치는 한국인들만의 음식이 아니다. 이웃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인이 가서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김치를 먹을 수 있고, 이들을 통해 외국인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광규 교수의 지적에 의하면, 현재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국 문화가 한창 인기를 누리는 이른바 한류(韓流) 현상에는 한국 대중 음악이나 영화 외에 김치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살던 캐나다 에드먼튼 불고기 하우스 식당 주인의 말에 의하면 오로지 김치를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 백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김치는 중독성이 있는 음식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중독성이 있다면 김치를 먹어본 사람들 사이에서 김치가 더욱 많이 퍼져나갈 조짐이 크다 하겠다.
최근에는 청주과학대학 김치식품과학과가 생겼다니 차제에 김치가 세계 음식이 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직도 이 학과가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다. 2020/11/13)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함버거나 피짜 때문에 한국 어린 아이들 사이에 김치 선호도가 줄어든다니, 새롭게 계발된 맛을 통해 이런 일도 예방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
2. 김치의 구성요소
김치의 종류는 그 재료나 제조과정에 따라 지극히 다양하다. 대략 김장김치, 열무김치, 보쌈김치, 총각김치, 나박김치, 백김치, 갓김치, 꼬들빼기김치, 파김치, 오이김치, 깍두기, 동치미, 짱아찌 등등이다. 재료로는 보통 무, 배추, 오이, 파, 부추, 생강, 고추, 가지, 미나리, 참깨, 당근, 양파, 갓 등의 채소와 배, 사과, 밤, 대추 등의 과일과 참조기, 새우젓, 멸치젓, 굴, 명태, 청각, 소금 등의 해산물과 그 외에 닭고기, 쇠고기, 버섯, 설탕 등이 포함된다. 그야말로 육해공군이 다 들어간 셈이다.
영양학적으로는 산성 식품과 알카리성 식품이 고르게 섞여있다. 이런 재료들을 사용하여 일정한 조건하에서 젓산으로 발효시킨 것이 김치다. 발효과정에서 해로운 세균은 죽고 유익한 균만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재료에 포함된 영양가 외에 젖산에 의해 새롭게 합성된 비타민, 다당류, 올리고당 등이 생겨난다. 이런 요소 때문에 김치는 창자에서 양양분의 흡수에 도움을 주고 변비를 예방하고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김치 외에도 물론 이질적이나 상반된 재료를 모아서 만드는 음식으로 물론 비빔밥이나 햄버거 같은 것이 있다. 비빔밥도 여러 재료를 섞는 과정에서 진물이 나와 독특한 맛을 내고, 햄버거도 캐찹, 겨자, 양파, 토마토 등이 들어가 제3의 맛을 낸다고 한다. 그러나 비빔밥이나 햄버거는 아직도 물리적 변화 쪽에 가깝다면, 김치가 다양한 요소가 서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발효라는 과정을 거치는 화학적 변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에 의하면 음식 조리법으로 세가지가 있는데, 날거나 생으로 먹는 것, 굽거나 끓이는 등 열처리를 해서 먹는 것, 마지막으로 삭혀서 먹는 것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발달된 요리 형식이 셋째 번의 것으로 서양에서는 치즈 류나 픽클 종류가 주종을 이루지만 한국에서는 김치 뿐 아니라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여러 가지 반찬이 여기에 속한다.
3. 김치의 정신적 의미
한국음식, 나아가 한국문화 일반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특히 김치의 경우, 그것은 우주적 원리요 종교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양(陰陽)사상, 상생(相生)사상,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 혹은 중용에서 말하는 화(和)라는 원칙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사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질적이며 상극적 요소를 하나로 어우르는 조화정신의 가장 구체적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한신대 김상일 교수의 용어를 빌리면 "한사상"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상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에서 최근에 등장한 '퍼지'이론의 구현체라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용어로 하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요 일중다 다중일(一中多 多中一)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이런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지닌 김치를 만들어 낸 민족의 마음에 김치가 상징하는 이런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실생활에서는 비록 그렇게 살지 못했어도 적어도 음양이나 상생을 삶의 이상으로 하는 민족이기에 이런 화(和)의 음식인 김치를 창안해 낸 것이라 보면 안 되겠는가 하는 점이다. 강신표 교수님의 용법대로 "대대적 인지구조"(對待的 認知構造),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대대적 인지구조의 초월(超越)이라는 우리의 문화 문법에서 유래된 것이라 볼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하지만 결론적으로 필자는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은 이런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김치를 이처럼 애호하는 민족이라면 김치에 담긴 이런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오늘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싶다. 이 둘째 문제를 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른바 "김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김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일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오늘 우리 사회에 팽배한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김치가 이질적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물질을 삭여 새로운 맛과 영양을 창출하듯 우리 중에 있는 다양한 사상과 상충되는 이념들이 서로 상극의 관계를 빚을 것이 아니라 상생의 관계,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루므로 함께 어울려 살고, 더불어 살고, 맞물려 사는 상호혜존(相互惠存)의 아름다운 관계로 승화된다는 것이다.
둘째 현재 우리 사회에 팽배한 종교적 배타주의를 해소하는 데도 "김치정신"을 발휘되어야 하리라 본다. 서로 다른 종교는 국민들의 정신적 건강과 안녕에 기여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치가 발효할 때 생기는 젖산의 효과로 해로운 세균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들이 서로 대화하고 화해하고 협력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건강에 봉사할 때 생기는 "시너지" 효과에 의해 그들에게 해로운 종교는 자연히 도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진위나 우열을 오로지 "내 것 네 것"으로만 판단하고 서로 싸우던 종래까지의 소박한 배타주의는 이런 김치를 만든 민족, 김치 애호가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셋째, 국제사회에서 "김치정신"을 적용하는 것이다. 양대 이념뿐만 아니라 양대 세력에서 한국인은 김치적 대응방법으로 양쪽을 조화롭게 하고 양쪽에 모두와 우호관계를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서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비김치적 패권주의, 패거리주의, 파당주의 등의 논리를 지양하고, 세계가 모두 어울려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김치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힘쓴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김치는 포스트모던적 사유의 상징이라할 수 있다. either/or의 이분법적 대결이나 흑백논리가 아니라 both/and 의 협력과 평화를 위한 대안 논리이다. 다양하고 다원적인 입장을 입지주의(perspectivalism)의 입장에서 바라봄으로 관용을 가지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다양성이나 다향성을 창조적 힘의 원천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뜻이 21세기를 살아가는 김치 애호가 한국인들에게 다시 새롭게 부각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김치 잡수실 때 마다 이런 생각하세요. 그러면 김치의 제사적 의미도 생기겠죠.)
덧붙이기. 이런 정신이 김치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의 의식구조에도 변화를 불러올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2020. 11. 13)
※ 이 글은 오강남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 명예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