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가에 여자들을 팔아 넘기던 인신매매단을 재판했던 한 판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 인신매매단은 무려 30명 이상의 여자들을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고 했다. 그들이 여자들을 팔아 넘긴 수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일단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서 범행장소를 물색한다. 대체로 큰 건물 앞이나 역 광장 같은 데를 자주 이용하는데, 그런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는 여자 중에서 한 여자를 지목하고, 일당 중 한 사람이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사정없이 구타를 가한다. 그러면서 이 xx년, 내 돈 떼어먹고 어디로 도망가려고. xx야, 어디서 서방질을 하고 다녀. 등의 시껍할 소리들을 고래고래 질러댄다. 이때 다른 일당들이 나타나 사실을 확증하듯 바람을 잡는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둘러싸고 구경하는 가운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속 얻어맞게 된 대부분의 여자들은 넋이 빠져버리기 마련인데, 이를 놓칠세라 여자를 끌어다가 팔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번화가에서 사람을 잡아가는데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범인들이 아무리 위장을 잘 한다해도 피해 여인의 태도와 표정으로 보아서 충분히 짐작이 갈텐데도 구경만 할 뿐 나서서 제지하는 사람도, 신고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 문제만 아니라면 아무 상관없다는 식의 현대인의 풍조를 보여주는 일단이다.
나는 목사로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이런 군중의 한 사람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하여 우리 신자들 모두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교회가 다방 하나 건너 있다는 이 땅에서, 그렇게도 많은 크리스천이 있다는 이 땅에서,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도대체 신앙인들의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신앙을 지식 정도로 알기 때문이다. 현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서 예수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부모의 품이자 우리 영혼의 고향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부모의 품을 떠나서 우리 방황하는 아이들처럼 되고 말았다. 부랑자와 같이 안식 없이 떠돌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이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머리로만 아는 크리스천들, 그들에 대한 비유를 들어보자.
여기에 술병이 있다. 사람들은 이 술병을 보고, 저 술은 병안에 들어 있다. 저 술을 마시면 취한다. 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라는 등의 상식을 갖고 있다. 술의 성분이 물과 알코올이 합쳐져서 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술의 정체, 술의 실체를 알 길이 없다. 술의 본질을 알려면 마셔 보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지식적인 신앙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예수님을 만나 불이 붙을 때에만 신바람 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에게 돌아서면 우리의 마음을 가리고 있던 덮개가 벗겨진다. 라고 했다. 우리를 어둡게 가리고 있던 덮개가 벗겨지면 우리의 영이 주님의 영과 만나게 되고 자유함이 주어진다. 우리의 어두운 형상이 주님의 형상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우리는 거듭났다고 말한다. 주님의 형상과 내형상이 맞부딪치는 순간 우리의 삶의 방향도 바뀌는 것이다. 이 거듭나는 체험은 자신을 주의 뜻에 전폭적으로 내맡길 때에 일어난다. 주님은 잠잠코 내 뜻대로 따라오십시오 가 아닌, 나는 연약하오나 주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자세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큰 힘을 발휘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주님이 쓰시는 대로 쓰임을 받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인생의 안목대로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우리는 처참하게 실패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십자가위의 예수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자이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기워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왕으로 맞이하려던 군중들의 함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예수는 그렇게 초라하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어가고 있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배냇소경이었던 바디메오를 고쳐 주었다던 그 예수가 이제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남김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밝히고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고 공공연히 말하여 전 이스라엘을 들끓게 했던 그 당당하던 카리스마는 어디로 가고 저리도 나약한 모습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맥없이 죽어가고 있단 말인가! 한낱 상처입은 들짐승처럼 처절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때 예수님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세워 주셨다.
내 위엄을 지키려 애쓸 때, 내 명성 붙잡으려고 발버둥칠 때, 내 성공에 집착할 때, 다른 사람들의 눈치에 매달려 살 때,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모른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부활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