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정치사상과 한반도 통일
-섭리교리를 중심으로-
글·심창섭 교수(총신대학신학대학원 역사신학교수)
발표·2009년 6월 26-27일 '제2회 기독교 대북 NGO 대회'에서
I. 서론
칼빈은 자신의 정치사상을 논한 논문이나 저서를 발표한 적이 없다. 칼빈의 정치사상은 기독교 강요에 주로 표현되어 있고 강요의 초판(1536)에 표현된 그의 정치사상은 5번에 걸친 강요의 증판에 따라 선명해 지고 있다.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은 칼빈이 강요를 저작할 때와는 판이하기 때문에 한반도 통일을 칼빈의 정치사상과 연계하여 연구하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칼빈의 정치사상의 연구를 통해 한반도 통일의 신학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칼빈 자신은 당시의 전제정치에 대해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정치체제와 통일문제를 칼빈의 견해에서 정당한 해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칼빈은 개혁신앙으로 개종되기 전 인문주의자로서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통해 중세의 교황권(the power of the keys)과 같은 절대왕권을 확립한 프랑소아 1세의 전제정치를 반대하면서 정의로운 통치자는 관용의 정신으로 다스려야 함은 천명한다. 그러나 개종 후 칼빈은 동일한 프랑스 왕 프랑소아 1세에게 전제 정치에 대한 반대는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핍박받고 있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배풀고 교회개혁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서신을 쓰게 된다.(1535년 8월) 맥닐은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 편지는 당시 박해를 받고 있던 소수파인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이단과 선동을 일삼는다는 비난에 대한 탄원이었다. 이 문서의 처음에 보면 왕들과 실제로 다스리는 일을 맡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에 대한 칼빈의 근본적인 사상이 나타나 있다. 어떤 왕이든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the minister of God)’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왕다운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정부의 목표가 아닌 곳에는 합법적인 주권이 없고 강탈이 있을 뿐이다.”
맥닐이 기술한 바와 같이 이 서신에서 칼빈은 통치자들의 올바른 소명에 대한 탄원을 했지만 그들의 통치 형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낙스가 그의 저서(1558) [여성의 괴물 정부에 대항하는 첫 번째 트럼펫의 울림; 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을 통해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3명의 악명 높은 여성 통치자들의 독재에 반대하면서 칼빈에게 동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칼빈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당시 독재권력의 세습이 고대사회의 관행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당대의 독재나 세습권력 자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의 세습통치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하지 않는다. 그는 영국의 크렘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영국 국왕의 세습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종교개혁의 요람지로 삼았던 제네바의 네포티즘(nepotism)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절대 권력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 칼빈의 태도로 인해 칼빈의 정치사상을 통한 북한체제의 시비를 따져 통일 문제를 다루기는 쉽지 않다. 고로 본고에서는 칼빈의 신학사상 중 하나님의 섭리사상을 중심으로 직접 북한체제와 한반도 통일 문제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II. 본론
II.1. 칼빈의 섭리사상
칼빈 학자들은 대부분 정치사상을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는 존 맥닐(John T. McNeill)이다. 그러나 에릭 푸체(Eric Puchs)는 칼빈의 섭리(providentia)사상을 정치윤리와 연결시킨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칼빈 신학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근원이 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이원론의 근간이 된 루터의 견해도 반대한다. 그리고 섭리의 교리는 추상적인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신학적 프락시스로서 칼빈신학의 목회적 접근으로 이해되어져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푸체는 칼빈의 섭리사상이 강요 마지막 판에 다룬 점을 지적하면서 칼빈은 생애의 마지막 까지 섭리의 교리의 발전에 많은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푸체가 기독강요 중심으로 섭리론의 정치사상을 언급하지만 칼빈은 1545년 범신론적인 사상을 가진 자유파들을 반박하는 논문에서 이미 결정론(determinism)이나 운명론(fatalism)을 반대하고 섭교 교리의 중요성과 프락스시적인 견해를 밝힌바 있다. 본고에서는 칼빈의 이 논문과 강요를 비교 연구하면서 칼빈의 정치사상의 발전과 그것의 현실적인 적용을 논하려 한다.
칼빈은 신령파(the Libertines Spirituals)의 범신론적 신앙에 대해 근원적으로 부인하면서 모든 창조세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힌다. 신령파에 의하면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특징이 없는 영적존재이다. 그는 창조주가 아니라 우주 만물 속에 존재하는 우주적인 영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어떤 피조물과 무관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뿐만 아니라 삼위의 인격적인 분이며 피조세계를 유지하고 계신 분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칼빈은 사도행전 17장 28절의 주석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한번 창조하신 후에는 돌보지 않는 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동시에 통치자이시다. 자신의 힘으로 만물을 유지하신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속성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은 통치하실 때 친절함, 선하심, 자비로움, 정의, 심판, 온유, 능력, 그리고 진리를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방철학자들의 우연이나 행운에 대한 사상을 논박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선하심의 돌봄은 그의 창조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령파의 범신론은 결정론(determinism)에 이르게 되며 이러한 우려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섭리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3가지 방법으로 역할 하신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섭리는 일반적, 보편적인 섭리이며 두 번째는 특별 섭리 즉 자신의 뜻에 따라 만물을 인도하시는 섭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신에게 충실한 자들을 돌보는 특별섭리라는 것이다. 물론 세 번째는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첫째, 칼빈은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를 설명하면서 이 섭리는 하나님의 뜻(Dei voluntas)에 기인함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전능하신 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활동적인 힘이 그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항상 참된 상태에서 만물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대로 만물을 나타내 보이도록 그의 손길을 그 속에 유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피조물과 모든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자신을 기쁘시게 하도록 사용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섭리교리에서 인간의 결정과 결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과학적인 자연 질서의 자율적인 작용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이 항상 피조세계를 관찰하시는 분으로 강변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섭리적인 돌봄"(providential care)로 인식하였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피조물을 돌보지 않는 나태한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자연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말하는 섭리는 이러한 자연 질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해 여전히 작용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주장을 바울의 성경적인 확언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우리들의 존재는 우리가 진실로 그 분 안에 내재하기 때문에 한순간도 그의 손에 의해 우리를 붙들지 않는다면 지속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봄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그러면 칼빈의 주장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손에 의해 만물이 섭리되도록 되어 있다면 칼빈 자신도 결정론에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칼빈의 섭리론은 결정론과는 차이가 있다. 결정론자의 견해는 하나님이 한번 창조한 후에는 피조세계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에너지의 법칙에 의해 신의 섭리가 없이도 작동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맞서 신앙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여전히 통치하시고 보전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천상의 것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의 일을 포함해서 지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돌봐진다는 것이다.
둘째, 칼빈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론을 주장한 후 특별 섭리론을 다루면서 신령파의 범신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이론을 반박한다. 칼빈의 특별 섭리론은 하나님의 뜻의 보다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 말한다. 그 구체적인 적용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따라 구체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세계에 작용하시는 두 번째 방법이나 길은 자신의 종을 도우고, 악한 자를 벌하며, 그의 충실한자들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혹은 자신의 부성적인 친절에서 그들을 혼내주기 위하여 자신의 현재의 뜻대로 그는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 그리고 심판에 섬기도록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막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정하심(ordinance)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선과 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울을 괴롭게 하고 아합을 속이고 욥을 시험한 악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되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견해는 결국 섭리의 존재론적인 관점(ontological aspect)에서 목적론적 관점(teleological aspect)으로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이 그것을 뜻한 바 아니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즐거움에 의해 이루어 진다”.
그러면 칼빈은 이러한 섭리론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허용 없이 모든 것이 그의 선한 즐거움에 따라 제정된 데로 움직인다면 또 다른 신령파의 결정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비록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창조되어 목적대로 움직인다 할지라도 독립적인 자율능력이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이라도 그를 돌이나 나무 조각 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를 그에게 주어진 본성의 자질에 의하여 생각하는 존재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 가운데 일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악한 자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분명히 피조물의 자율적인 작용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그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대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생각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칼빈의 이론은 서로 상치되는 논리적 사고(logical speculation)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논리적인 사고의 갈등을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그리고 성령의 사역 안에서 믿는 자들의 경험을 기초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칼빈의 섭리적인 돌봄의 교리는 결국 만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목적과 최종적인 계획과 그의 피조물 자신들의 판단과 의지를 동시에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려해야 할 문제는 남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과 악한 자들의 일 사이에 발생한 문제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면 악한자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결과론적으로 악한 행위도 하나님의 소행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어떤 사악함도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항상 선하다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구원과 선의 보존을 위한 정의를 행하는 것이고, 그의 충실한자들에게 선함과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고, 벌이 필요한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악한 자들과 불경한 자들의 악한 행위로부터 그의 정의와 선함과 심판을 분리하므로 말이다.”
칼빈은 우리가 우리들의 본성(nature)을 가까이 관찰하면 마음속에 차이점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이 구별하려는 것은 선과 악 사이의 분별이다. 칼빈은 불행과 재난의 근원이 악이고 하나님의 근원은 선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만 악한 본성은 하나님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정의와 평등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본성은 선할 뿐이고 어떤 악에 의해서도 부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관계를 유비(analogy)를 통해 쉽게 설명한다.
"태양이 부패한 고기에 비추어져서 썩게 하지만 그것에 의해 부패하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태양의 정결함이 부패한 고기의 악취와 감염의 원인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 해도 그의 거룩함은 그들을 정당화시키지 않고 그들의 감염은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전염시키지 못한다.“
칼빈의 악한 자의 행위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지만 실제적인 악함은 악한 자 속에서 연유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그의 의도는 항상 정의로움에 반하여 그의 피조물은 악한 동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악이 존재한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 칼빈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섭리교리의 세 번째 형태는 하나님은 특별히 믿는 자들을 돌보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향한 섭리적 돌보심은 사실 칼빈의 섭리교리의 주된 관점이었다. 특별히 칼빈은 인간은 원죄로 인해 부패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판단은 왜곡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며, 악을 향하는 경향에 젖을 정도로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믿는 자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은 교회를 지키시는 참된 부성적인(paternal) 보호를 의미한다. 이 교회에 하나님의 가장 실재적인 도움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섭리하시며 관심을 가지지만 그는 특별히 교회를 다스리는데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믿는 자들이 머무는 교회를 섭리의 "주된 극장"(chief theatre)으로 묘사한다. 1559년 기독교 강요에서도 동일한 아이디어를 표현한다.
“실로, 성경역사의 주된 목적은 주님이 대단히 부지런하게 성도들의 길들을 지켜보시기 때문에 그들은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칼빈은 신자들의 구원과 삶은 특별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보호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우리가 중생하며 또한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은 믿는 자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웬델(Francois Wendel)이 주장한 것처럼 자신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섭리교리의 전체적인 목적이 아니지만 여러 형태의 섭리 중에서 칼빈은 교회와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강조함은 사실이다. 칼빈 사상에 있어서 교회가 하나님의 유일한 섭리의 목적은 아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임하는 곳임은 부인할 수 없다.
신령파의 범신론적인 결정론을 반박하면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론을 주장한 칼빈의 사상은 그의 예정론 논문(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과 마지막 기독교교 강요에서 더 구체화 된다. 칼빈은 이 논문에서 믿는 자들과 연관하여 섭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과 목적에 이해되어져야 한다. 첫째 목적은 우리들에게서 무분별한 확신을 없애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여 그에게 기원하도록 세우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우리들이 조용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신뢰와 용기로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과 우리를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들을 경멸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교리를 통해 믿는 자들의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인 돌봄에 의존함을 확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인간의 선택과 자유 의지를 동시에 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선택과 자유의지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로 인해 둘 다 부패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주님은 그들이 악으로부터 벗어나 선으로 향하도록 개선시키며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분별하고, 원하고, 행하려는 무엇이라도 천성적인 재능(natural gifts)에 속한다.”
II. 2. 칼빈의 섭리교리와 정치윤리와의 관계
칼빈의 섭리론과 정치사상은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가? 칼빈의 섭리론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윤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행위로 인해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윤리적인 인식과 양심을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죄는 결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정의와 불의를 충분하게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의 판단력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의해 변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간의 능력 속에는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 사회를 보존하고 중하게 여기기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시민의 질서와 정직이 각인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인간사회가 법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어져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법들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주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가 개인과 국가 가운데 심겨져 있고 이것은 선생이나 입법자가 없이도 모든 이의 가슴속에 보편적인 법의 씨가 심겨져 있다...그래서 어떤 사람도 현재의 삶의 법령에 관하여 이성의 빛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민질서와 법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섭리가운에 이루어진 것임을 칼빈은 확인하고 있다. 섭리가 세상 질서와 하나님이 법과 정의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시민의 질서와 법이 하나님의 섭리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정치는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약속한다. 정치적인 질서와 법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약속으로 이해되어 지므로 이것은 인간의 귄리 즉 자유와 평등의 신학적인 기초로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 때문에 칼빈은 냉소적인 방법으로 정치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한다. 정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장된 약속이라는 개념이 칼빈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계획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적인 질서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확신이 칼빈으로 하여금 시민사회의 질서에 대한 긍정적인 정의를 내리도록 했던 것이다.
“시민정부는 우리가 인간 가운데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외적인 예배를 기리고 유지하도록 주어진 것이며, 교회의 건전한 교리와 조건을 수용하고, 우리들의 태도가 시민의 정의를 형성하도록 하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강화하며, 공통된 평화와 평정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
시민정부의 이러한 역할에 대한 섭리적인 이해를 갖고 있지만 칼빈은 정치적인 질서와 종교적인 질서를 혼돈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 통치자들의 무제한적인 정치권력의 행사에 대항하여 칼빈은 정치의 윤리적인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fear of God)이다. 선을 베풀어야 할 신적인 섭리 가운데 있는 통치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음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세운 질서나 통치자들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칼빈은 양극단적인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말하는 정치윤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계율에 따라 평등과 자애의 정치적인 적용에 있다. 그러므로 이런 윤리는 정치의 기능에 믿을만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고로
“각국은 유익이 된다고 판단되는 법을 제정할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이 법들은 자유의 규율에 의해 항상 검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변화를 할 때도 그들은 동일한 원리위에서 진행되어야 만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섭리의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인간의 존재와 창조세계로의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에 정치는 이웃과 하나님의 봉사 사이에서 진정한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믿는 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인 정황 속에서 산다는 소명을 가져야 하며 그러면서 세상 나라와 동일하지 않는 나라를 향하고 있음을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섭리교리는 정치적인 책임에 대해 비판적인 프락시스를 인식케 한다. 칼빈은 권력에 대해 고통당하는 비판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케 된다면 희망을 상실하지 않고 통치자들의 불의에 대해 인내해야 할 경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일인통치와 같은 정부도 하나님께로 나온 권세로 인정하는 바울처럼 “비 그리스도인의 정부와 통치자들 역시 하나님께 권위를 받았으므로 순종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무비판적인 복종과 비판적인 순종의 혼합은 모호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러한 생각은 강요 마지막 장 "Of Civil Government"에서 표현되어 진다. 칼빈은 프린스들이 무엇을 한다할 지라도 신하들의 복종을 정당하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섭리의 이름으로 이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이런 프린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는 가를 예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프린스에 대한 개인적인 저항은 고통에 대한 명백한 거절이기에 금지 된다. 그러나 칼빈은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조직된 저항은 고려될 수 있다고 부언하고 있다.
“평판이 좋은 행정관들이 왕들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임명되어 졌을 때 왕들의 부당한 방종을 점검하기 위해 하는 이것을 금하지 않았다. 만약에 왕들이 독재하고 백성들 중 겸허한자들을 모독할 때에 행정관들이 그들과 함께 잔치에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동화는 사악한 배신행위로 규정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악하게 백성들의 자유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백성들의 보호자로 임명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칼빈의 섭리교리에 있어서 개인의 저항권 불허와 제도적인 저항권의 인정은 상당히 모호한 역리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가져 다 준다. 이러한 모호성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 같이 통치자들이 악정을 행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인지 혹은 이것은 인간의 사악함에 돌려야 하는지 대한 모호성이 발생한다. 칼빈은 이러한 모호성을 해결하려는 이슈로 보지 않는다. 모호함 보다는 역동적인 정치윤리의 개념이 칼빈의 정치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극단적인 무모한 복수적인 저항은 거부하면서 정당한 저항 행위에 대한 정치윤리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양자를 인정하면서 어떤 극단적인 경우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의 정치적 윤리의 이러한 모호성은 섭리교리가 정치의 자율성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칼빈은 정의롭지 못한 프린스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무시했을 때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의 섭리교리의 정치적, 윤리적 해석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역시 이성적인 지식의 논리에서 보다 섭리교리는 신앙의 고백(confession of faith)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세계에 대한 약속이다. 섭리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불의한 자에 대한 통치를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고 도리어 독재자 프린스에 대한 고통스런 참여로 우리를 인도하며 동시에 불의를 거부하는 데로 인도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섭리 그 자체를 역사의 지식의 주인으로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위치를 불법으로 침해하는 정치조직에 대해 비판을 초래한다. 이와 같이 섭리를 믿는 신앙은 우리시대에 작은 일이 아닌 묵시적인 절망의 유혹은 물론 권력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유혹을 피한다.”
하나님의 섭리교리는 또한 비록 죄로 오염된 상태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속에 질서의 가능성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응답하도록 인도한다. 이것이 정치윤리의 범주에 적용될 섭리의 교리이다. 칼빈에게 이점은 명확한 것이었다.
“개인의 운명과 이 세상 역사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진대 믿는 자들은 두려움이나 핑계 없이 그 자신을 윤리적인 일에 자유롭게 헌신해야 한다. 물론 그 일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나타나기 위한 모든 것을 행하는 데 있다...”
그래서 칼빈은 행정관들(magistrates)의 정치적인 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행정관들은 모든 관심, 부지런함, 그리고 근면함으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와 지키심과 선하심과 그리고 관대하심과 정의로우심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도록 [백성들을]돌봐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의 명령을 고려한다면 모든 사람은 분명히 섭리의 선하심에 반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상에서 현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최종적인 것이다.
마지막 질문은 불합리한 현실 역사의 경우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는 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쟁과 살인 그리고 재난 등이다. 특히 유대인 600 만 명의 희생을 섭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문제 등이다. 물론 스토아파 같은 일반 세속 철학자들은 운명론으로 쉽게 돌릴 수 도 있다. 혹은 불교 신앙에서는 윤회적인 사건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섭리교리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섭리교리에서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성론자들 처럼 이신론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피조물 즉 가장 작은 새 한 마리의 생명도 유지하시고, 돌보시고, 그리고 지키시는 분임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연이나 행운에 의존케 하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우연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과 영예를 최소화 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우연한 것이 없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다.”
칼빈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은 제한적인 선택과 자유의지의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오염되었다 해도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인 돌봄의 은총으로 인해 인간은 선을 행하도록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한 일을 시작하시며 동시에 모든 공로는 그에게만 속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악한 행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악한 행위에 있어서는 부패한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칼빈이 말하는 섭리교리의 역리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의 동기는 언제나 선하지만 인간의 동기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한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저작이면서 악한 행위의 저작자는 아니라는 역리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결정론이 아니고 섭리(providentia)로 표현되는 것이다.
칼빈은 신의 섭리교리에 함의 된 정치윤리와 크리스챤의 책임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행위에 의해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윤리적인 지식과 양심을 지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죄악 자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불의와 의를 충분하게 분별하는 양심의 판단을 지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불안전한 질서지만 신의 섭리에 의해 보장된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악에도 불구하고 발달된 인간 속에 새겨진 최소한의 시민의 질서는 유지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선물로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섭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치적인 기술의 능력도 동일한 의미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III. 결론: 칼빈의 정치사상과 한반도 통일
한반도 통일의 문제와 칼빈의 섭리교리를 어떻게 이해할까?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의 독재나 세습권력 자체에 대한 정치적인 반대의 입장을 칼빈의 정치사상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섭리론이 함의하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에서 북한 체제의 당위성의 여부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원리를 조명해 볼 수 있다.
칼빈은 신령파의 결정론에 반하여 분명히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에 운행되고 있음을 강변한다. 이런 논지에서 본다면 기독교인들은 양분된 한반도의 현실을 운명론적이거나 결정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의 분단을 미소양국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형성된 산물로 이해하면서 분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분단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적인 선한 속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친절함, 선하심, 자비로움, 정의, 심판, 온유, 능력 그리고 진리에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섭리론을 통해 제시하는 정치적인 주요한 또 다른 함의는 세상 질서가 하나님의 법과 정의의 섭리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정치에 대해 방관하거나 냉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장된 약속이라는 개념이 칼빈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계획의 기초가 된 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정치적인 과제로만 해석하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한반도 통일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과 유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생명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정치체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래서 칼빈은 통치자의 직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통치권을 부인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이 비록 악한 통치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통치에 대한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강조한 것이며 칼빈의 진정한 의도는 선한 통치를 이루는 것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한반도 통일의 목적은 통일 자체에 있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선한 통치가 이루어져 한 민족의 번영과 평화 그리고 행복을 위한 통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은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선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런 통치자들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섭리론의 정치적인 함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한반도의 통일 맥락에서 적용한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신앙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신령파의 결정론을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3가지 종류의 특별섭리를 논하였다. 그 중 마지막 섭리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돌봄(pateram curam)이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길 원하시고 섭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 통일의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는 북한 동포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북한 땅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은 섭리론에서 또한 악한 통치자들의 현존을 인정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고통과 인내를 강조한다. 칼빈은 악한 통치자들이 자행하는 폭정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고백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불의한 것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고 거부할 것을 언급하면서 믿음 안에서 소화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악한 통치자들에 대해 방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리어 칼빈은 인내하므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국내외적인 절망스런 어떤 정치 환경이 조성된다해도 끝까지 인해하면서 통일에 대한 노력과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빈은 섭리론을 언급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간의 죄 된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그 본성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없이 선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 통일은 한민족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식하고 인간적인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