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28)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제11장

에필로그: 결론적인 요약

7. 성경에서는 방언을 언급하면서 "방언을 말한다"고 했는가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했는가?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며 방언을 하도록 부추기는 오순절계통의 목회자들이나 성경교사들은 거의 모두 UT방언으로 "기도하도록"(pray) 가르칩니다. 그들은 방언의 은사를 방언기도의 은사로 설명합니다. 열정적으로 큰 소리를 내며 기도할 때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말이 언급될 때에는 거의 모든 경우에 방언으로 "말한다"(speak in tongues)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방언으로 말한다"는 표현은 스물세 번 사용되었지만(막 16:17, 행 2:4, 6, 8, 11, 행 10:46, 행 19:6, 고전 12:10, 28, 30, 고전 13:1, 고전 14:2, 4, 5, 6, 13, 18, 19, 21, 23, 27, 39 등),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은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고전 14:14). 그것도 사도 바울이 가정법을 사용하며 UT방언을 비꼬면서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지만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행하듯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가정한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UT방언-단수형 단어)으로 기도한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

성경에 의하면 방언은 말하는 것이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한다"(speak)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뜻과 의미가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 방언은 LT방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방언입니다. 특히 구원받아야 할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큰 일" 즉 복음의 메시지를 다른 언어나 외국어로 말하는 기적적인 은사가 바로 성경적인 방언, 즉 LT방언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뜻 없는 소리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을 영어로는 gibberish, babble, mutter, mumbo-jumbo 등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도 그러한 소리의 의미를 알아들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소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나 교제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UT방언 기도에는 의미 있는 대화의 메시지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지만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격적"(personal)이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딸들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과 인격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인간의 언어들(human languages)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기도하는 자녀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고 그 언어로 아버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UT방언 기도는 단지 소리(voice, sound)를 내는 것이지 결코 말(speech, wording)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적인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인격적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서적인 성령의 은사인 LT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불신자들에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 14:22).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UT방언과 LT방언 양자를 언급은 하고 있지만, 불신자들이 알아 듣고 회개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LT방언이 성경적인 참 방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LT방언이 제대로 통역이 된다면 믿는 자들을 세워주는 예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 14:3-5)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UT방언-필자 주)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LT방언-필자 주)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LT방언-필자 주)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사도 바울은 중얼중얼하는 UT방언과 통역되지 않은 LT방언을 차례를 지키지도 않고 절제하지도 않고 말함으로써 고린도교회가 혼란과 무질서에 빠졌고, 그래서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입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LT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oti mainesthe, ye are mad-KJV, you are out of your mind) 하지 아니하겠느냐?"

"미쳤다"(mainesthe)라는 말에서 영어 mania(광적인 사람, 어떤 일에 열광적으로 미쳐 있는 사람)라는 말이 연유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UT방언을 인정하거나 권장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UT방언으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이교적인 신앙행습을 근절시킬 목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을 쓴 것입니다. 동시에 LT방언도 제대로 통역되지 않은 채 행한다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비록 LT방언을 말하는 자라도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이라고 했지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말하는"(speak) 것이지 "기도하는"(pray)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누가처럼 사도 바울도 방언을 의사소통이 가능한 LT방언의 의미로 말했던 것이지, 뜻모를 UT방언 기도의 의미로 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8. 절친한 복음의 동역자였던 누가와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했는가?

누가는 사도행전 2장과 10장과 19장에서 방언에 대해 동일한 복수형 단어를 사용했고, 그 의미는 모두 언어 혹은 외국어를 뜻하는 LT방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에서 방언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12장에서 네 번, 13장에서 두 번, 모두 LT방언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14장에서 방언이라는 말을 모두 16번 사용했는데, 단지 여섯 번만 UT방언의 의미로, 아홉 번은 LT방언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발성기관인 "혀"(舌, tongue, 단수형 단어로 씀)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적 사건들과 기록의 배경, 그리고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한 요체(要諦)가 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강림했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LT방언을 말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인 기원후(AD) 30년경이었습니다(행 2:1-13).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LT방언을 말했던 것은, 사도 바울이 48년-49년경에 가졌던 제1차 선교여행(행 13:4-14:28)을 떠나기 이전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행 10:44-48).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했던 사건(30년경 AD) 이후 약 7-8년이 경과한 때, 즉 37-38년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침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이 LT방언을 말했던 것은, 사도 바울이 54-57년경에 가졌던 세 번째 선교여행의 초반부였습니다(행 19:1-7).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사도행전이라는 일종의 "초대교회 선교보고서"를 쓰면서 이상의 세 경우에(행 2장, 10장, 19장), 모두 제자들이 LT방언(glossai, speaking in tongues)을 말했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여 약 18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던 것(행 18:1-11)은, 그의 두 번째 선교여행 때(51년-53년경)였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것은 51년경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던 것은 54년경이었습니다. [Warren Dowd, "Timeline of Paul's Ministry," Christianity in Vew, <온라인자료> http://christianityinview.com/paulstimeline.html, 2019년 6월 20일 접속.]. 그의 세 번째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쓴 편지였는데, 침례 요한의 제자들 열두 명이 LT방언을 말하게 된 직후였습니다(행 19:8-10).

그런데 사도행전이 기록된 시기는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 감옥에 갇혔다가(행 28:16-31) 일시 출옥을 하여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후, 2차로 다시 로마 감옥에 투옥이 되었을 때나 혹은 순교를 당했던 이후였을 것입니다.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사도 바울의 순교의 연도에 관해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연대는 여유 있게 잡아서 67-70년경이었다고 보면 무난할 것입니다. [Ibid.]. 결국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지 약 13-16년 후에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사도 바울과 의원 누가는 매우 절친한 복음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이 54년경에 고린도전서를 썼을 때 에베소에서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제3차 선교여행 중). 그 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가이사랴에서 투옥되었을 때, 그리고 죄수로서 로마로 압송되는 항해 시에 누가는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투옥될 때까지 누가는 그와 동행했습니다. 선교여행의 동역자로서 그리고 바울의 건강을 끝까지 보살펴 준 사랑 많았던 의사로서 누가는 바울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했습니다. 복음의 동역자요 절친한 사이였던 그들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들, 특히 "알아들을 수 없는, 뜻 모를 UT방언"과 "통역이 되지 않은 채 행해진 LT방언"으로 인해 발생한 교회 내의 혼란과 무질서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문제해결을 위해 함께 고민하며 함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제2차 투옥 기간이나 그의 순교 이후에 로마에서 기록된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UT방언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오직 LT방언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요? 성경적인 방언,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으로서 주신 방언,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직 LT방언뿐임을 방증(傍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UT방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이방종교나 신전예배 시에 행했던 이교적인 옛 신앙행습이었거나, 그러한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렸던 신앙행습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UT방언 기도에 탐닉하는 것은 영적인 마약에 도취되어 황홀경(怳惚境)에 빠져서 거짓 행복감(fake euphoria)에 젖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환각(幻覺) 상태나 중독(中毒)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마약이 일시적으로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잊게 해 주기는 하지만, 마약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더 강하고 더 짜릿한 자극이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UT방언 기도생활에 중독된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더 자극적이고 보다 더 흥분되는 신비한 체험을 계속해서 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사람들은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을 제쳐두고 점차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영적 체험에 탐닉(耽溺)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지만 동시에 인격을 가지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맨 정신으로 자신들의 언어로 솔직하게 대화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기독교에 신비적인(mysterious)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신비종교(神祕宗敎, mystery religion) 혹은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는 결코 아닙니다. 필자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학대학교에서 장차 목회자와 복음전도자가 될 학생들을 가르치고, 천국을 앙망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필자로서는 신비스럽습니다. 필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생각하면 할수록 절로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영과 혼이 분리된 채, 제 정신을 놓아버리는 신비주의에 빠지고 싶지도 않고 신비종교의 신도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길 때까지, 그 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매일 매순간 그 분과 동행하며 살고 싶습니다. 필자는 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성령충만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건전한 기독교적인 신앙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신비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삶의 현장"(Sitz im Leben)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거나 병든 신앙입니다. 삶으로 연결되지 않은 신앙이나 교리는 "거짓 지성주의"(false intellectualism)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인격의 성숙으로 입증되지 않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유언은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su moi akolouthei, follow thou me-KJV, you must follow me-NIV)입니다.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유언을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그 결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면 자연히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맛있는 것으로 맺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순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은 신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고, 이미 성령뱁티즘을 받았고, 이미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이미 성령의 전이 되어 있습니다(고전 3:16-17, 6:19-20). 이제는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명령입니다.

9. 성령의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이 "자기의 덕"(개인의 유익)을 세우기 위한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참 성령의 은사들은 "이웃을 섬기고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0:23-24, 33, 12:7, 13:4-5, 14:12, 26) 성령께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물들입니다:

(고전 10:23-24, 3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교회공동체 전체를-필자 주)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4-5)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 14:12, 26)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LT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위의 성경구절들에 의하면 결코 은사들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혹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혹은 "자기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UT방언 주창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 있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a)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UT방언이 신자 개인의 경건과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우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4절 전체를 보지 못한 성경해석입니다. 4절의 후반부에는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b)라는 말씀이 뒤이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 전체의 의미는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의 덕을 세워준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만(de, but) 예언하는 자가 교회의 덕을 세운다"라는 의미입니다. de라는 접속사는 앞 문장의 내용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면서 뒷 문장의 내용을 강하게 옹호하거나 주장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환언하면 "방언 역시도 예언처럼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UT방언을 하는 자들은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의미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의 전반부는 일부 UT방언을 행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주장을 사도 바울이 인용하면서 책망하며 말한 것이고, 4절의 후반부는 바울 자신의 주장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UT방언 기도행습에 탐닉해 있는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성령께서 은사들을 베풀어주신 목적에서 이탈(離脫)하고 있음을 바울은 비꼬면서 비판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말씀에 대해서도 UT방언 주창자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고전 14:2a). 이 구절의 말씀도 방언은 원래 사람들, 특히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고린도교회에서 일부 UT방언을 하는 자들은 "어떤 신적인 존재"(a god, an idol)에게 한다고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theo)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사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고 단지 신적인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그들이 과거 이교도들의 신앙행습을 다시 답습하고 있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메시지가 있는 언어로서의 방언(LT방언)은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일부 UT방언 주창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하반부의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b)는 말씀도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들은 UT방언은 하나님께 비밀(secret)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비밀을 나누는 관계에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UT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은밀하게 비밀리에(in secret)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마귀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기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전지하신(omniscient) 하나님 앞에 하나님도 모르시는 비밀이 있을 수 있을까요? 희랍어 원어성경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영으로 신비를 말함이라"(pneumati de lalei musteria,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KJV, he utters mysteries with his spirit-NIV)고 썼습니다. 한글성경에서는 "비밀"(secret)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신비"(mustria)로 되어 있고 영어 성경들에서도 "mysteries"(신비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일부 UT방언 주창자들이) "영으로 신비를 말함이라"고 말했을 때에는, 그들이 과거에 신비종교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들은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신앙행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비꼬는 투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비밀"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서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비"(musteria, mysteries)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신비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몸과 혼과 영이 전체로서 하나되어 자신의 마음을 제 정신으로 자신의 언어로 인격적인 하나님 아버지께 토로(吐露)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마음(혼, 이해력, understanding)을 저버린 채 영(spirit)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신비주의적인 신앙행습이라고 사도 바울은 비꼬며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자신은 고린도전서 14장 15-17절에서 영과 마음이 합일된 상태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15-17)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나는(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는(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송하고 영으로 축복하고 영으로 감사하는 것은 UT방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뜻모를 UT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송하거나 축복하거나 감사하면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는 상대방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한다(but the other is not edified-KJV, but the other man is not edified-NIV)는 의미입니다. UT방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은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영으로만 기도하거나 영으로만 찬송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나는(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는(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고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을 피력(披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소리를 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자칫 자기 과시, 자기 자랑, 자기 영광을 드러낼 위험이 있는 은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덕을 세우는"(자기를 세워 준다고 주장하는) UT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들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크게 어긋나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은사들을 남용(濫用)하거나 오용(誤用)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비꼬면서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UT방언 기도를 인정하거나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과 정상적인 언어로 제 정신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자신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Quoram Deo) 진실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Unlearn the Lies). ["거짓 버리기(Unlearn the Lies)-방언에 대한 성경 속 진실," <Youtube 동영상> https:// www.youtube.com/watch?v=5hmTpcC2PjE, 2019년 6월 5일 접속.].

UT방언을 성령뱁티즘 받은 증거라고 믿으며 UT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스스로를 "일등급 크리스천들"(The First Class Christians)로 여긴다면 그것처럼 심각한 오해는 없습니다. UT방언을 하지 않는 자들이나 해보지 못한 자들을 측은히 여기며 "이등급 크리스천들"(The Second Class Christians)이나 성령충만하지 않은 미성숙한 크리스천들로 여기는 것 역시 무척 교만한 태도입니다. 방언의 유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UT방언 체험을 하도록 강하게 부추기는 것 자체가 영적인 엘리트주의(spiritual elitism)에 빠져 있는 교만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UT방언이 교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스러운 신앙행습으로서 경계(警戒)하고 경원시(敬遠視)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도원의 부흥회 집회나 은사집회나 교회예배에서 UT방언기도를 하도록 "할렐루야"를 수십 번 반복적으로 말하게 하거나 공개적으로 훈련을 시키거나 집단적으로 독려하거나 강요하는 행위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행습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은 방언기도가 주는 유익들을 과대포장하여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그러한 유익들은 정상적인 언어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할 때에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유익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UT방언 기도의 비결이나 유익성을 강조하며 설명해 주는 곳은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제 정신으로 자기 언어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그리고 진실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할 때,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인격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점점 더 성화되어 가고, 한층 더 무르익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뱁티즘(성령침례 혹은 성령세례)이나 UT방언 기도의 은사를 사모할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과 그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Holy Spirit)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화의 과정입니다.

UT방언 기도체험의 유익함을 특별히 강조하는 그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나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 목적에 배치(背馳)되는 것입니다.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a)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비꼬면서 비판했던 말이지 방언의 유익성을 긍정했던 말이 아닙니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b)라는 말과 대비하면서,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바울이 책망을 했던 말입니다. UT방언은 "자기를 세워서"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위험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교만을 부추기게 될 소지가 있음을 경고(警告)하는 말인 것입니다.

"방언 말하기"(Speaking in Tongues)라는 글을 쓴 레만 스트라우스(Lehman Strauss) 박사는 방언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7가지 주장들은 "잘못"(mistake, 실수)이라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언을 LT방언과 UT방언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아래의 문장들에서 대체로 UT방언을 지칭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1) 방언을 말하는 것과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Spirit Baptism, 성령침례, 성령세례)을 동의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2) 방언 말하는 것을 성령충만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3) 방언 말하는 것을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4) 방언은 방언 말하는 자의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5)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받으려고 간절히 추구하는(seek) 것이나 추구하도록 강요하는(force to seek) 것은 잘못이다.

(6) 여자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openly) 방언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7) 표적은사들(sign-gifts)이 오늘날의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Lehman Strauss, "Speaking in Tongues," <온라인자료> https://bible. org/article/speaking-tongues, 2019년 6월 20일 접속.].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16세기 칼뱅은 충분히 진화론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이오갑 강서대 명예교수(조직신학)가 「신학논단」 제117집(2024 가을호)에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 의미 밝혀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을 중심으로 집단리더가 구조화된 집단상담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통해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학철 교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 부정하는 이유는..."

연새대 김학철 교수(신학과)가 상당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소위 '창조과학'을 따르는 이유로 "(진화론이)자기 신앙의 이념 혹은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원효의 체상용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원효의 체상용의 불교철학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이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손호현 교수(연세대 신과대학)는 얼마 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