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29)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제11장

에필로그: 결론적인 요약

10. 중얼중얼하는 뜻모를 UT방언이 다른 언어로 통역될 수 있는가?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을 대비하면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말할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권면했습니다. 이 장(章)은 방언 장이 아니라 예언 장입니다. LT방언은 의미있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언어 혹은 외국어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통역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LT방언이라도 그것이 통역되지 않는다면, UT방언과 다름 없이 교회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LT방언이 통역되지 않아서 그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들이 LT방언 말하는 자들을 "미쳤다"(고전 14:23)고 흉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UT방언으로 큰 소리로 기도한다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얼중얼하는 뜻모를 UT방언이 다른 나라 말로 통역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내뱉는 의미없는 소리(meaningless voice)가 어떻게 의미있는 다른 나라 언어(meaningful other language)로 통역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LT방언이 제대로 통역이 된다면,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예언과 유사한 기능을 하게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고전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LT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LT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LT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언급된 "각종 방언 말함('etero gene glosson, divers kinds of tongues-KJV, different kinds of tongues-NIV)," "방언들 통역함('allo de 'ermeneia glosson,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KJV, NIV)"에서 방언이라는 낱말(고전 12:10b)은, 복수형으로서 언어 혹은 외국어를 말하는 기적적인 은사로서의 LT방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통역을 언급할 때 LT방언의 통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별로 건강하지 못한 분파적인 운동들이 "UT방언"과 "UT방언 통역"을 부추기면서 기독교계를 어지럽혀 왔습니다. 의미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은 UT방언을 다른 나라 말로 통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탁월한 영성과 지성을 갖춘 사도 바울이 방언통역을 말할 때에는 주로 LT방언의 통역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세 구절들에서 바울 사도는 UT방언을 언급하면서 방언통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13) "그러므로 방언(UT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 14:27-28) "만일 누가 방언(UT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 뜻모를 UT방언을 중얼거려 놓고는 그것을 통역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비꼬는 투로 말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UT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을 피우는 자는) UT방언의 내용을 통역하기 위해 한번 기도해 보아라." 사도 바울은 이 구절들에서 UT방언의 통역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으나, 그는 비꼬는 투의 풍자적인 어법(satire, diatribe)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역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들마다 통역을 시켜보면 통역의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UT방언에 대한 통역이 곧 거짓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비꼬면서 경계를 했습니다. 27절과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UT방언과 그 통역에 대한 기본원칙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1) UT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 혹은 많아야 세 사람이 해야 한다,

2) 두 세 사람이 동시에 말해서는 안 되고 차례를 따라 한 사람씩 해야 한다,

3) 그리고 한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한다,

4)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UT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

5) 꼭 하고자 한다면 자기와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이상의 원칙들과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이 행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UT방언은 통역하여 전달할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통역 자체가 무의미하고 또한 불가능합니다. 중얼중얼하는 뜻모를 UT방언을 소리내어 놓고 그것을 한국말로 통역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설한다면, 그것은 곧 성경 밖의 계속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 beyond the Bible)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UT방언에 대한 통역은 통역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들에따라 통역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고 모두 다를 것입니다. UT방언 통역은 얼마든지 순진한 청취자들을 속이거나 혼란케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전 14:28a)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계시가 완성된 후 다시 말하면 사도시대가 마감이 된 이후에는, LT방언이나 그것의 통역이 더 이상 계시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이유나 필요성이 없어졌습니다. 신약성경의 계시가 완성된 이후(요한계시록이 씌어진 90-95년경 AD), LT방언이 그친 것(고전 13:8)과 함께 LT방언의 통역 역시 그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글로써 완성된 이상, 그 이전에 직통계시의 역할을 했던 예언과 LT방언과 그것의 통역은 더 이상 그 기능이 지속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the written Word of God continues speaking).

11. UT방언 행습이 건전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최근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고 있는 건강하지 못한 크리스천 신사조(新思潮)들이 한국기독교계에 유입되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에 의해 주도된 UT방언 기도의 행습은 성서가 말하는 참 방언이 아니고 이교적인 종교행습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UT방언이 모든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할 수 있는 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그것이 모든 감정적인 사이비 성령운동이나 비성서적인 신비주의운동이나 미신적인 신앙운동의 출구가 될 위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Orthodox Church)와의 화해,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 간의 대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간의 신학적 포용주의(theological inclusivism)와 선교적인 협력(missionary cooperation) 등이 기독교 언론들의 뜨거운 잇슈가 되고 있습니다. 교단이나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Oneness in Jesus Christ)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바람직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치의 범위가 성서적인 가르침을 넘어서고, 복음전도적이고 선교지향적인 일치가 아니라 기구적인 획일화(organizational uniformity)를 도모할 때에는, 종교통합(religious unification)과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로까지 확대될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에서도 나름대로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건전하지 못한 그릇된 비성서적인 신학으로 흘러가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일치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기관은 1948년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입니다. 그것의 한국지부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원교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2.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3. 기독교대한감리회, 4. 대한성공회, 5. 구세군대한본영, 6. 기독교대한복음교회, 7. 한국정교회 대교구, 8.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9. 기독교한국루터회. 이들 교단들 가운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정식 회원교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2.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3. 기독교대한감리회, 4.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자료> http://www.kncc.or.kr/eventView/member, 2019년 7월 13일 접속.].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기관들의 정식 회원교단은 아니지만 참관자(observer)로서 참여하면서 세계교회일치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들이 중심이 된 교회일치운동은 최근 들어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religious pluralism)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절대성(絶對性)과 배타성(排他性)을 배제하고, 모든 종교들에는 제각각 추구하는 구원개념과 고상한 윤리와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종교들 간에 이해와 양보 그리고 상호 조화와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산의 정상은 한 곳이지만 정상을 오르는 길들은 여러 갈래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WCC의 교회일치운동이 단순히 기독교 교회들 간의 하나됨에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들 간의 하나됨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들 간의 일치운동에서 공통분모 역할을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소위 말하는 "방언"(UT방언)입니다.

기독교 내에서 20세기초에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에서 시작된 방언운동이 "은사주의운동"(Charismatic Movement, 신오순절운동)과 "제3의 물결운동"(The Third Wave Movement)을 거치면서,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교회들에까지 그러한 신앙행습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로마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일부 성직자들과 수도원 수사들 그리고 수녀들에 의해 방언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에서도 UT방언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필자는 UT방언 기도운동이 한국의 기독교계에 확산이 되면 될수록 한국교회는 성경의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체험도 소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잣대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Written Word of God, 성경, 계시)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마력이 센 기관차라 할지라도 궤도를 이탈하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이라는 궤도 위에 놓여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의 전통과는 무관한, 종교개혁적 전통을 가진 역사 깊은 교회들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가운데, "후속교리"(subsequent doctrine)나 "제2의 축복이론"(the second blessing theory)에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경우를 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체험 이후에, "성령뱁티즘"(성령침례, 성령세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교인들에게 UT방언 체험을 하도록 부추기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목회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급속한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오순절 성령론 신학체계를 수용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빨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입니다. 가시적인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입니다. 목회자들은 뼈대의 역할을 하는 올바른 성령론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체험이나 신비적인 느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과 "성경이 말하는 방언"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적인 목회를 실천할 것을 권면합니다.

20세기초의 오순절운동 이전에 존재해 왔던 여러 복음적인 교단들에 속해 있는 목회자들이, 오순절 성령론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령뱁티즘 개념을 "후속교리"(Subsequent Doctrine)나 "두 번째 축복이론"(The Second Blessing Theory)으로 이해를 하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이라도 성령뱁티즘(성령침례, 성령세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뱁티즘 운동은 곧 방언운동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중얼중얼하는 뜻모를 UT방언 기도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제1차적인 모토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성경을 제쳐두고 교회와 교회의 전통을 권위로 여겼던 로마가톨릭교회를 향해서,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용감한 종교개혁가들이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회개혁의 깃발을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20세기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의 목회자들은 성경을 제쳐두고 체험(experience)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성경은 단지 개인적인 체험을 정당화 혹은 합리화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적인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은 다시 성경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분투노력(奮鬪努力)해야 하겠습니다.

필자는 이 책에서 방언에는 LT방언과 UT방언이 있지만 성경적인 방언은 LT방언뿐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중얼중얼하는 뜻모를 UT방언은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신적인 은사(divine gift)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연유한(humanly oriented) 발성현상일뿐입니다. UT방언과 같은 현상은 기독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 이슬람, 힌두교(하레 크리쉬나), 심지어 신비종교나 무당종교의 기도행습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UT방언을 성경적인 은사로조차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UT방언과 통역되지 않은 LT방언을 교회공동체를 혼란과 무질서로 몰아넣을 수 있는 요소들로 보아 그러한 신앙행습을 퇴출시킬 목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다"(고전 14:22a)라고 말했을 때, 그는 불신자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의 메시지로서의 말 혹은 언어인 L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LT방언도 신약성경이라는 새로운 계시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사도시대의 종언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고전 13:8).

그런데 종교개혁의 후예로 자처하는 한국의 전통있는 교단들의 복음적인 목회자들 중에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에서 주장하는 UT방언의 은사를 용인하고 또 그것을 목회사역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UT방언을 하나님과 영적으로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UT방언을 강조하며 그것을 교회의 목회사역에 도입하게 되면, 교회는 그러한 체험을 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UT방언 체험을 한 교인들에게는 영적인 교만을 부추길 소지가 있고, 그들은 그러한 체험을 하지 않은 교인들에 대해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히 UT방언 체험을 하지 않은 교인들은 영적인 열등감에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을 본받지 말라"(마 6:7-8)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고 하셨습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뜻 모를 소리를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UT방언 기도행습은 이러한 성경적인 가르침들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명령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 곧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1:3)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그리고 최근에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유행하고 있는 빈야드운동(Vineyard Movement)이나 신사도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 등에서 성경을 벗어난 오염된 성령론 신학을 양산해 왔습니다. 한국의 복음적인 교단의 교회들에서 이러한 신학사조들과 운동들의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용납하는 것은 진리의 원수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필자는 성경 말씀을 제쳐두고 감정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인 체험을 앞세우며 진리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를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도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UT방언의 은사를 복음적인 교회들에서 용납하는 것은 최근의 그 어떤 교리적인 오류들보다 더 많은 신학적 오류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적인 교회들이 주관적인 경험주의(subjective experiencialism) 신앙에 문을 열어놓게 되면, 온갖 형태의 이단들과 사악한 행위들과 신비주의적 신앙이 교회 안에서 활개를 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복음적인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성경적인 성령론 신학을 확고하게 견지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교단에 속해 있지만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의 성령론 신학을 용인하며 수용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향해서,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은사주의 신학은 우리 시대의 "다른 불"(Strange Fire, "이상한 불"-필자 주)이다. 복음주의 신자는 그런 불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그런 불로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필자 주). 나는 사람들이 성경의 전례가 없는 행위를 정당화하기를 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특히 현대의 행위가 온갖 종류의 신학적 오류를 양산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왜 그러는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복음적인 은사지속론자들" (복음적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 UT방언을 옹호하고 실천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필자 주)은 이런 위험성을 의식하지 못한 채 무사태평하기만 하다. 자신들의 가르침이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과 독특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John MacArthur, 「존 맥아더의 다른 불」(Strange Fire), 339.].

이제는 참 교회가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성경적인 복음을 회복하고, 종교개혁이 주창한 "오직!"의 원리들(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 solas Christus, soli Deo gloria!-필자 주)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고조시켜야 할 이 때, 안일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성경에 충실한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모든 것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진리를 외쳐 성령의 거룩한 이름을 담대히 옹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면, 그들과 같은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도"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남용하는 일들이 만연한 이 때, 모두 힘을 합쳐 힘차게 싸워야 한다....... 무분별한 은사주의 신학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성경이 오류로 단죄하는 것을 과감하게 배격함으로써, 유다서 1장 23절a("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필자 주)의 명령을 좇아 거짓 영성이라는 "다른 불"(Strange Fire, "이상한 불"-필자 주)로부터 영혼들을 끌어내 구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Ibid. 339-40.].

12. 성경은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을 "간절히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들은 절대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대로," "그 분께서 원하시는대로"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gifts of God)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그러한 은사를 주신 그 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 선물로 인해 스스로 자랑을 하거나 과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주위 사람들과 교회공동체를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으로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정 은사를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처음 우주적으로 강림했을 때, 제자들은 성령을 받거나 성령뱁티즘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거나 은사체험을 위해서 큰 소리로 부르짖거나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누가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행 2:1)라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강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사집회에서 전자오르간과 전기기타와 드럼과 같은 고성능의 악기들을 동원하여 반복적으로 찬양을 하게 한다든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들을 집단최면(集團催眠)에 빠지도록 하여, UT방언 기도소리를 내도록 유도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이 소위 말하는 "방언집회"를 인도하기도 하는데, 참석자들로 하여금 인위적으로 방언기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그러한 집회는 사도 바울의 의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비성서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행위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는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명이나 되더라"(행 1:14-15a)는 기록이 있지만, 2장에서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 성령이 강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때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성령이 이 땅에 강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LT방언으로 말(speak)을 했지 UT방언으로 기도(pray)를 하지 않았습니다(행 2:4,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they began to speak with other tongues-KJV, they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NIV).

사도행전 2장의 앞 부분(행 2:1-13)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 "최초의 역사적인 성령강림"과 "지상 최초의 교회설립"이라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120여 제자들 모두가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LT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흩어져 살고 있던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체류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자신들의 난 곳 언어들(native languages)로 "하나님의 큰 일"을 알아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LT방언으로 "말하고 듣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땅끝까지 급속한 복음의 확산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바벨탑을 쌓음으로 인해서 "백성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그들이 지면에서 흩어짐을 당했던" 사건(창 11:1-9)이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역전되고 회복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의 뒷 부분(행 2:14-42)에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그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은 신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성경 요엘 선지자의 예언(행 2:16-21)을 인용하면서 그 날의 성령강림 사건을 설명하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분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설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고 촉구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뱁티즘을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사도행전 2장의 뒷 부분은 앞 부분에 비해 보다 일반화된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와 그에 대한 반응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뒷 부분에서는 3,000여명의 새로운 제자들이 LT방언이든 UT방언이든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성령뱁티즘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앞 부분은 교회역사 상 매우 독특하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particularized event)이었다면, 뒷 부분은 보편적으로 일어난 일반적인 사건(generalized event)이었습니다. 오늘날을 위한 규범(Norm)이 되는 사건은 사도행전 2장의 앞 부분(120여명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동시에 성령충만을 받아 LT방언을 말한 사건)이 아니라 뒷 부분(3,000여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사도행전 2장 1-13절에서 제자들이 말했던 방언은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LT방언이었습니다(행 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UT방언 주창자들이 성령뱁티즘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UT방언은 성서가 말하는 참 방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방언입니다. 가짜에 도취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위조지폐들(counterfeit notes)을 집안에 잔뜩 쌓아두고 부자가 된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거짓 체험에 속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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