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불안과 절망이 없었던 시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떠안은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그래서 다양한 '용기'의 담론들이 나온다. '세계'는 물론 '너'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폴 틸리히의 명저 《존재의 용기》를 소개한다. 그는 현대의 초입, 절망과 상실의 시대를 살과 뼈로 겪으며, 비존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구하고자 했다. 그가 길어올린 것이 '존재의 용기'이다.
이 책 소개는 3번에 나누어서 한다.
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불안들을 해부해 보면
②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들의 실체
③ 의미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존재의 용기'
<3> 의미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존재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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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가 제시한 인간의 생을 위협하는 세 가지 불안 중 우리 시대의 불안을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미함의 불안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죽음의 불안과 죄의식의 불안도 인간을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런데 틸리히에 따르면 이 두 불안은 적어도 인간에게 "의미"와 "확실성"은 앗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전통의 확실성은, 불안한 개인들에게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좀 다르다. 우리는 사실상 절대가 상대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오랜 시간 전통을 떠받쳐오던 절대적 원인들, 인간 현존의 필연성들이 우리 시대에는 희미해졌다. 우리 시대는 전통적 의미가 상실되었고, 무의미함의 불안이 인간을 덮친다. 틸리히는 밝히기를, 죽음의 불안과 죄의식의 불안은 "우리를 위협하기는 하지만 우리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심과 무의미함의 불안은 "의미와 확실성"을 모두 삼키고, "진리도 사라지"게 한다. 진리도 의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글<2>에서 살폈던 19세기의 포이어바흐, 맑스, 니체로 위시되는 "혁명적 실존주의"는 전통에 대한 반동들이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예술, 문학, 철학 등에서 나타난 실존주의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실존 그 자체의 무의미함과 상실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 했고, 과감하고 거칠게 드러낸다. 틸리히는 그 예로 사르트르(Sartre)의 연극 〈출구 없음〉(No Eixt), 엘리엇(Eliot)의 시 〈황무지〉(The Wasteland), 카프카(Kafka)의 소설 〈성〉(The Castle)과 〈심판〉(The Trial), 오든(Auden)의 장시 〈불안의 시대〉(Age of Anxiety), 카뮈(Camus)의 〈이방인〉(The Stranger) 등의 작품들을 든다. 틸리히는 이 작품들을 단순히 허무주의로 평하지 않는다. 무의미함을 경험하며 절망 가운데 처해있지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고, 무의미함의 불안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가진 용기는 한계가 있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표출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 자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함의 불안에 절망하고 있는 인간이 자신을 구원해 낼 의미를 구해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수학 공식처럼 증명해낼 수 있지는 않다. 의미라는 것은 해석의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틸리히가 "섭리"를 "종교적인 상징"이라 한 것도 이 맥락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존재 자체로 들어가야 한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용기는, 상실한 주체와 그 주체가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용기가 아니라, 상실된 것 그 자체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용기는 존재 자체에 대한 용기이다. 이것이 바로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가 가져야 할 "존재의 용기"이다. 이제 이 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의 용기가 어떤 것인지 밝히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는 공개적인 혹은 감추어진 종교적 근원이 있다"고 밝힌다. 사실상 인간 존재의 근거와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종교환원주의의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종교적인 근원"을 가진 '존재의 용기'에 대하여, 우리는 어렵지 않게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의 용기'임을 생각해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신에 대하여 어떠한 용기를 가질 수 있는가? 유한이 무한에 대하여, 한계가 초월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용기의 종류가 어떤 것인가? 이 관계에서 용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종류의 용기와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는 <2>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와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보았다. 이 용기의 주체는 명백히 자기 자신으로, 그 용기의 정체는 인간이 '~을 하려는' 용기이다. 그런데 신과의 관계에서는 이 공식이 깨진다. 틸리히는 그 용기를 "용납하는 용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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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원에서 틸리히가 말하는 '용납하는 용기'는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이다. 이 용기는 인간 자신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께 바탕을 두고 있는" 용기라고 틸리히는 부연한다. 인간은 무엇이 용납되었고, 또 이 용납을 용납하는 데에는 왜 용기가 필요한가?
틸리히는 인간을 위협에 빠뜨리는 불안들을 극복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변증한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에서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외부적으로는 교회가 신도들을 대상으로 죄의식을 양산해 낼 수 있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가운데 종교개혁의 원리들은 개인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개인은 이제 오직 믿음으로 신의 은총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신의 은총은 인간의 행위에 비례하지 않고, 인간의 불완전함에 영향받지 않는다.
물론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이 여는 세계가 죄의식의 불안을 남김없이 도말시킨 수 있었던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행적은 여전히 사실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회개 후에도 여전히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고, 주변의 정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고, 혹은 무의식중[꿈]에도 고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칭의된 인간 역시도 죄적 실존 가운데 있는 현실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틸리히는 여기서 "죄의 용서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지자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가 용납되었다는 것, 우리가 비록 죄적 실존 가운데 있는 자이지만 "용납할 수 없는 자가 용납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죽음과 운명의 불안에 맞서는 용기도 같은 맥락에서 가능하다. 앞의 글에서 다룬 바 있는 것과 같이, 죄의식의 불안과 죽음의 불안은 맞물려있다. 이것은 루터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던 루터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무서워 떨었다고 한다. 틸리히는 루터에게 있어 "죄의식의 불안을 정복하는 것은 운명의 불안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때문에, 죽음이 "죄의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에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음을 틸리히는 역설하였다. 죄의식의 문제가 다시금 요청되는 것이다. 죄의식은 앞에서 극복된 바 있다. "용납할 수 없는 자가 용납되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용납되었음"을 용납할 때, 정죄의 불안과 죽음의 불안이 힘을 잃는다.
그러고보면 틸리히가 말하는 용기는 믿음이다. 즉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는 사실상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는 것과 같이, 섭리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과 같이, 용납됨을 용납하는 것도 사실상 믿음이다. 앞선 용기들이 인간이 '하려는' 용기였던 것에 반해, '용납하는 용기'는 믿음의 행위이다. 이 용기를 가짐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인하여, 유한과 무한 사이의 "무한한 간격이 메워진다"고 틸리히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의 불안이 남았다. 무의미함의 불안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틸리히는 여기서 앞선 두 불안에의 '용납하는 용기'와 같은 용기를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틸리히는 명확한 설명을 보류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정직하다. 앞의 두 불안과 달리 무의미함의 불안은, 틸리히의 시대에도 결코 얕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더욱 깊은 무의미함의 불안이 인간을 덮칠 것을 틸리히를 비롯한 몇몇 선각자들은 예측까지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틸리히는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행위", "절망을 받아들이는 행위"에 대하여 말한다.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무의미함의 불안에 잠식되는 행위와 구별된다. 그것은 생에 속한 무의미함을 알고 인정하되, 그것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생에 대한 애착의 경험에 기대어 있듯이, 무의미함의 불안은 의미의 경험에 기대어 있다. 의미를 생각하는 자만이 무의미함의 불안을 경험한다. 그래서 무의미함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틸리히는 "믿음의 행위"라고 말한다.
틸리히가 말하는 '믿음'과 '신앙'의 세계를 보면, 거기에는 의심과 회의가 포함되어 있다. 존재에 비존재가 있듯이, 용납됨에 용납할 수 없는 자가 있듯이, 절대적 믿음에는 회의가 있다. 다만 존재의 용기는, 즉 믿음은, 회의에 굴복하지 않고 회의를 넘어선다. 그 믿음과 용기의 뿌리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존재 자체에, 즉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역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필자는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의 용기"를 가지는 첫 걸음이, 전도서 기자의 격언과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에서 비존재의 위협을 맞닥뜨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생이 지속하는 한 누구든 용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인간 자신에게 뿌리 내린 차원의 용기를 넘은, "존재의 용기"를 가져보자고 틸리히는 권면한다. 그리고 "존재의 용기는 존재 자체로 통하는 관문이다"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이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용기는 여타 의례와 행위를 겸비해야 하는 인위적인 그 무엇이 아닌, 다만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담백한 믿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북리뷰/서평 문의 eleison2023@gmail.com
*틸리히의 책에서 직접 인용한 어구, 문장은 큰따옴표(", ")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