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익숙하고 친숙하다. 구약 선지자들이 신의 뜻을 전달하면 백성들은 들었고, 예수의 가르침에도 따르는 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개신교도 듣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예배는 사실상 설교 중심이고, 참석자들은 대부분의 예배 시간에서 '듣는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근거한 '말씀의 신학'을 펼쳤는데,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상당부분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말'과 관련하여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말이신 하나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1장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전한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말이시고, 또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양명수 교수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논문이 이 내용에 천착한다.
요한복음서가 사용한 용어 로고스(Logos, Word, 말)는 그리스어인데 크게 원리(ratio)라는 뜻과 말(oratio)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서는 이 중 '말'이라는 의미를 취했다. 그리고 이 말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요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1:14)고 전한다. 하나님은 왜 '말'이고, 또 그 말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어떤 것을 말하는가?
양명수 교수는 먼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신의 '초월성'에 대하여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음을 밝혔다. 양 교수에 따르면 "대개 초월적 존재를 믿는 모든 종교에서 그 초월자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은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의 알라는 세상과 접촉하지 않고,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도 창조할 때 낮게 여겨지는 질료[물질]를 사용해야 하기에 다른 신을 시켰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면서도 그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 세상과 접촉했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는데, 니케아공의회(325)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임이 선언되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성부로서 매우 초월적인 신이지만, 동시에 성자로서 세상과 접촉하고 함께 하는 신"인 것이다.
양명수 교수는 이 문제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주제에서 다시 조명한다. 양 교수는 초월자이시나 세상과 접촉하신[육신되신] 그리스도교의 신은, 홀로 존재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세상없이 있을 수 없"는 분으로 해석한다. "세상과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없다"고 그는 반복하여 강조한다. 이는 신적인 것을 인간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세상과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고, 따라서 피조물은 창조자와의 관계에서 종속관계이다. 그런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성자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셨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앙이 믿는 하나님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창조자이시면서, 세상과 접촉하시고 인간과 함께 하시는 신이다. '함께 하는' 하나님에게 인간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에게서 세상과 인간은 필연적 사건"이라고 양 교수는 밝힌다.
창세기 1장도 양명수 교수는 위의 맥락에서 다시 밝힌다. 성서 기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이 창조 때에 힘이나 세력 혹은 이질적 물질이 아닌 '말씀'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은 내게 말을 건네고 말을 붙이는 하나님이 있었다는 말이다"라고 밝힌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이었고, 내게 말을 건네는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양 교수는 이를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Sein)의 언어성과 비교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언어는 언어의 계시성을 의미하고, 거기에서 언어는 진리가 드러나는 길이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들음이 요구된다. 그리스도교도에도 '말'이 중요하고 따라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의 들음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에서의 하나님은 "단순히 일방적으로 드러내고 가르치는 하나님이 아니"고 "말씀이신 하느님은 먼저 내게 말을 건네고 붙이는 하느님"인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믿기가 쉽지 않다. 초월자이자 창조주이신 신께서 피조물에게 말 붙이시고 피조물의 세계에 들어와 함께 하신다는 이같은 내용은, 특히 비관주의자나 냉소주의자들에게는 요정이 등장하는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은총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바울도, 루터도 그렇게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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