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종려주일 설교] 든든하고 탄탄한 신앙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제주 4.3 기념주일

성경본문

에스라기 5장 17절 - 6장 5절, 고린도전서 3장 10-17절

[타향살이 몇 해던가]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운이 점점 쇠락해지던 시절,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등 유력한 가문의 세도 정치에 의한 수탈과 자연재해 등으로 가난을 면치 못하고 생계가 어렵던 이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만주와 간도, 연해주, 일본, 미국 등지로 갑니다. 우리 동포가 맨 처음 이주한 지역은 만주와 연해주였습니다. 특히 만주는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되고, 개척할 농경지도 많아서 수렵이나 벌목으로도 생계가 가능했습니다. 1910년 무렵이 되면,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한인이 20만 명을 넘게 됩니다.

한편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할 목적으로 한인의 이주를 허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동포들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정부가 준 토지를 경작하거나 황무지 등을 개간하게 됩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곳곳으로 한인이 이주해 왔고, 20세기 초, 연해주에는 8만 명이 넘는 한인이 모여 삽니다. 한인들은 100여 개에 이르는 신한촌을 세우고 자치 기구를 만들고 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서로 불어 넣는데, 을사조약 이후 연해주 지역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의 중심지가 됩니다. 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합병된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많은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 만주로 이주해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고 국내와 연결하여 독립운동을 펼쳐 나갑니다.

만주와 연해주로 이민했던 이들에게 늘 그리운 곳은 고향이었고,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타향>이라는 노래입니다. 1934년 봄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전조선명가수선발음악대회를 개최하는데, 이 때 23세의 고복수가 2등으로 입상하였고, 몇 달 뒤에 김능인 선생이 작사하고, 손목인 씨가 대중가요로는 처음 작곡한 <타향>을 부르게 됩니다. 이후에 <타향살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불린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한 달 만에 5만 장이 넘게 팔렸습니다. 가사는 이러합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이 노래는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어디를 가도 고향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나라 뺏긴 사람들의 설움을 잘 드러내는 노래였기에 당시 한국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만주 하얼빈 공연에서는 무려 10번의 앵콜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는 나라 잃고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이들의 가슴 저린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뒤이어 상당수의 주민들이 사로잡혀 감으로써 유다 왕국은 몰락하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시작입니다. 거의 50년 후인 539년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Cyrus the Great)가 바벨론 제국을 굴복시키고 관대한 종교 정책을 추진합니다. 키루스는 어느 나라든지 자신과 자신의 제국의 안녕을 위해 각 나라의 신들에게 기도해 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 정비하라는 명령과 함께 바벨론에 사로잡혀 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합니다.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주전 538년에 첫 유대인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다시 짓게 되었는데, 페르시아의 정치 상황이 바뀝니다. 키루스가 죽고 뒤를 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등극하였는데, 이 왕도 일찍 사망하자, 다리우스는 캄비세스 2세의 다음 승계자인 바르디야를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은 새로 왕이 된 다리우스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관련된 선대왕의 칙령을 살펴볼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1차 귀향 유대인들과 아직도 페르시아 땅에 남아 있던 이들은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요?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나라의 독립과 유일신 하나님 신앙의 회복,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의 모든 희망이 걸린 문제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민족적 정체성을 세워 주고 강화해 주던 예루살렘 성전이 초대 교인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세워집니다. 기원후 66-73년까지 벌어진 로마-유대 전쟁에서, 키루스의 명령으로 재건되었고 헤롯에 의해 증축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서쪽 벽을 남겨 둔 채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된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며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를 만들어갑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나의 종교로 발돋움하게 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바울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대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그 교인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의 놀라운 선포와 신학적 해석 속에서 이제 그리스도교는 제사 종교인 유대교를 벗어나 성숙한 인격들을 길러내고, 사회를 변혁하는 새로운 윤리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워나가게 됩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새롭게 세워지는 하나님의 성전을 말하면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새로운 성전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떤 집을 지을지 각자가 신중히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 제사의 형식에는 분노한 신을 달래고, 신을 즐겁게 하여 자신들의 안녕과 복을 이루고자 하는 고대 종교의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개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의례가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성전 제사는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곳에 가두고, 성전 밖의 삶과 성전에서의 종교를 분리하지만, 개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개인의 삶과 종교적 신앙이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일년내내 죄를 짓고 속죄일 하루 나와서 죄를 고백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자신이 몸소 하나님을 모시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하늘이나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은 때로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멀리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사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서의 책임성과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자기 삶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사람은 이제 자신이 지은 신앙의 집으로 하나님에게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신앙 개혁 운동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한국 개신교는 그동안 교회를 크게 짓고 주일을 속죄일 삼아 유대교의 제사 종교 전통을 답습해 왔습니다. 즉 주일 신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세계 대 유행은 이런 한국 교인들의 관습을 깨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첫째로 가슴 깊이 성찰해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신앙의 건물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인 제가 실로 고민이 되는 점은 저와 여러분을 비롯하여, 한국의 모든 교인이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신앙의 기초로 놓고 있는가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한데, 우리 신앙의 기초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라든가, 아니면 불순물들이 많이 섞여서 부실한 기초가 된다면 이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교회의 기초가 엉뚱한 것이거나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 번에 걸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강의도 하고, 수요사경회를 통해서도 90강에 걸쳐서 예수님을 다룬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삶에 기초로 놓지 않으려는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질 때, 겉으로 볼 때, 교회가 화려하고, 부흥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네 복음서가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읽을 때도 저마다 처한 상황과 신앙의 수준에 따라 각자 다른 감동과 다른 깨달음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동과 깨달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지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바탕이시고,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고, 말썽이 생기고, 갈등과 분열이 생겼을 때도, 그것을 풀어가는 기준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그런 일이 생기면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정의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 자신이 받은 상처, 자신의 감정을 가장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래서 갈등과 문제는 더 깊어지고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거나, 예수님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영생이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17:3).

예수님을 바로 알고 따른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과 일에 대하여, 사람 대하는 법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인 태도와 자세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기초를 제대로 놓았다면 이제 다음은 그 기초위에 자신만의 신앙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든든하고 탄탄한 신앙]

예수님을 기초로 놓았다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단단하고 튼튼하고 멋진 건물을 짓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바로 멋진 신앙의 집 하나를 짓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비유를 통해서 어떤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지을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을 떠올려 보라고 합니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집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잘 된 설계에 따라, 훌륭한 일꾼들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신앙의 집은 자신이 건축가이고 시공자이기 때문에 이제 중요한 것은 잘 된 설계와 재료가 남습니다.

오늘날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인생은 사계절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유년부터 청장년, 노년의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누구나 거쳐 갑니다. 그 나이 때에 알맞은 신앙을 여러분은 어떻게 빚어 가시고 있습니까? 맹목적 열정과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때가 있습니다. 밤새 통성기도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한 적도 있지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도 있었고, 심각한 회의에 빠져 마치 무신론자가 된 것처럼 살았던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우리 신앙은 인생의 나이테에 따라 성숙하고 성장해야 하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40-50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떼를 쓰며 돈이나 떼어가려는 자식이 있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많은 교인은 수십 년 교회에 다녀도 여전히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작은 아픔에도 목놓아 울지만, 나이 든 어른은 사소한 상처는 가볍게 넘기고, 웬만한 어려움도 잘 견디어 냅니다. 어릴 때는 자기만 알고, 피 끓는 청년 시절에는 세상의 모든 사건을 선과 악의 구도로 보면서 세상을 다 뒤집어엎으려고 하지만,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 남도 생각해 주면서 선악 너머에 있는 세상도 바라볼 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교인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기만을 챙겨주길 바라고, 자기가 옳다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고대에 건물을 지으려면 그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벽돌처럼 뭉쳐 있어야 합니다. 흙이나 모래처럼 풀어지는 재료로는 집 자체를 지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흩어진 정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산만한 믿음 생활로 신앙의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집을 짓는 재료를 만드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좋은 영적 지도자와 동반자가 필요하고, 본인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야 집을 지을 수 있는 벽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집을 지으려고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단번에" 또는 "한꺼번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에 "단번에"라는 말은 없습니다. 쌓인 시간, 그냥 쌓인 시간이 아니라, 충실하게 성실하게 쌓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옛 믿음의 선배들은 주일성수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은 주일성수가 문제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어쩌면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 옛날 베드로가 만났던 식으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일, 함께 삶을 나누지 못했던 예수님을 알고 체험하고 따르는 일은 오늘날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지금처럼 자연과학이 주류가 되고, 돈이 주인이 되고, 철저하게 세속화된 세상에서 종교적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더 철저함이 요청됩니다.

든든하고 탄탄한 신앙이 되어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따르려면 우리는 지금 시대가 주입하는 잘못된 가치관과 싸우려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시대는 돈을 최고로 알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고, 쓸모라는 이름으로 참된 가치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서 적응한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적으로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이해하기보다 남이 나를 이해해 주어야 하고, 남에게 맞추기보다, 남이 나에게 맞춰야 하며, 세상은 전부 나를 중심으로 굴러가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또 행동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절대로 함께 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 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외롭습니다. 외로운 데다가 혼자 있기 때문에 혼자 할 수 없는 일 앞에서는 불안하고 공포심을 느끼게 됩니다. 남들과 협력해본 적이 드물기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화를 내는 등 이상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는 비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진리의 말씀이 선포된다고 해도 교인 다수가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결코 예수님의 공동체, 사랑의 성전,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이런 자기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입니다. 늘 하나님의 높고 깊은 뜻을 생각하고, 신앙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며, 믿음의 동지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먼저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많은 공동체가 될 때, 그 교회는 든든한 교회, 탄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든든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알차거나 충실하여 미덥거나 믿음직하다"라고 나옵니다. "탄탄하다"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무르거나 약하지 않고 아주 단단하고 굳세다."라고 나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알차고 충실하여 믿음직할 뿐만 아니라, 무르거나 약하지 않고 아주 단단하고 굳세길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든든하고 탄탄한 교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쳤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갈릴리부터 예수님을 섬기던 여성 몇몇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광의 자리뿐만 아니라 십자가 그늘 아래에도 있기를 빕니다. 그럴 때에만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자리까지 내려오신 하나님! 많은 고초를 당하시고, 악행을 하는 무리들에게 조롱을 당하시고, 불의와 함께 기뻐하는 이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질병이 물러나고, 귀신을 내쫓김을 당하고, 모두가 한 자리에 앉아 풍성한 식탁을 마주하는 것이 복음이었듯이,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걷는 것 또한 기쁜 소식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다면,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주님의 손을 붙드는 자가 되게 하소서.

참 믿음을 보여 주신 주님! 우리에게도 든든하고 탄탄한 신앙을 허락해 주소서.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결단의 기도를 하게 하시고,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넓디넓은 마음으로 내어주는 손, 달려가는 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더 나은 신앙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세상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애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홀로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며 기쁨이 되며 위로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받은 축복을 헤아릴 수 있어서 감사드리고, 하루를 마치며 당신의 은혜를 느끼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출근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주신 것과 일할 수 있는 건강과 힘과 기술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곁에 함께 해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획과 약속 안에서 우리에게 선을 향한 영감을 불어 넣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생명사랑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주소서. 우리가 주님의 구원 활동에 한몫을 담당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된 신앙인이 됩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 기초 위에 든든하고 탄탄한 신앙의 건물을 지어가십시오.

* 축도

이제는

거룩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진 것들을 굳건히 지켜 주시고

거친 바다에서 여러분을 보호하시며

육지에서도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거센 폭풍이 여러분을 삼키지 않도록

뜨거운 태양과 어둔 밤의 냉기가 여러분을 해치지 않도록

사랑으로 하나 되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인생길 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을 이끌어주시며

여러분을 참된 믿음과 영원한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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