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거듭남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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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시편 51:6-12, 디도서 3:3-7, 요한복음 3:1-21

설교문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Nicodemus)라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요한은 그가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간략히 소개합니다. 바리새인이란 이방 문화의 유입으로 이스라엘 고유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하며 모세5경(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archon)란 산헤드린 회원이란 뜻인데, 니고데모는 70인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법정의 한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는 또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낼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근쯤"(요한 19:39)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당시 부유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밝은 대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어서 조심하고 있던 것일 수도 있고, 당시 랍비들은 율법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조용한 저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예수님을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조금 무례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민족의 최고 지도자 중 하나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추켜세우는데 대뜸 그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처럼 그의 내면은 어둡고 무지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대 지성의 대표이고 상징입니다. 성경에 대해 노련하고 해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그의 지식은 '표적'(기적)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앞장인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과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이 나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그]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기적은 '달'(본질)을 가리키는 '손가락'(비본질)일 뿐입니다. 기적은 기적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달'(예수)을 보지 못하고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기적)만 보았습니다. 그 손가락을 달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훅' 들어온 예수님의 말씀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니고데모는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습니다. 여기서 '거듭나다'로 번역된 헬라(그리스)어는 '아노텐'(anothen)인데,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다시'(again) 혹은 '두 번째로'(for the second time)입니다. 둘째로는 '새롭게' 혹은 '처음부터 완전히 근본적으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위로부터'(from above), 즉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의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첫 번째의 의미로,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한자로 '중생'(重生)인데, 그 뜻은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됨'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이 '위로부터',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니고데모가 예수님 말씀을 뜻을 몰라서 엉뚱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유대인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성경 지식에 정통했던 니고데모는 인간 속에 새 마음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하는 에스겔 선지자를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에스겔 36:26)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개종자가 유대교에 입적할 때 '새로 출생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까요?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무언가 만족하지 못한 깊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허를 찔렸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느냐] 두 번째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라고 의도적으로 딴 척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은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계시는군요. 내게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지금 모든 인간의 영원한 문제, 즉 변화되기를 원하나 스스로 변화될 수 없는 그 문제를 우리 앞에 내놓고 있는 겁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5-7절) 여기 나오는 '물과 성령'을 세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핵심을 놓친 것이라고 일찍이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말했습니다. '물과 성령'은 앞서 읽은 에스겔 36장에 이미 나온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고]...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겠다]"(에스겔 36:24-26)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후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자리에게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4) 하셨고, 또 무리 앞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며 그 생수의 강이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요한 7:37-39)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물과 성령'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8절)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는 그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해 고의로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예수님 앞에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여, No, Thank you.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나는 변화되고 싶지 않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 '21세기 교인'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마도 니고데모일 것입니다. 그는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인물입니다. 성공했고, 자신감 있으며, 개방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입니다. 호기심 많은 그는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 그에 대해 더 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께 매료되었지만 자기가 가진 신앙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가 없었고 그럴 이유를 몰랐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삶 주변과 그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열심히 따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리서 무관심하게 바라보기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니고데모를 종교개혁자 칼뱅은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였다고 평가하면서, 속으로는 개신교인이면서 겉으로는 가톨릭 신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그의 주변 사람들을 '니고데모주의자'(Nicodemites)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2:6)하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2:15)을 비판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예수님과 제한적인 관계만 맺을 뿐, 공개적이고 완전한 헌신을 하지 않은 니고데모를 '예수 추종자'(follower)와는 다른 '예수 흠모자'(admirer)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니고데모는 그리스도교의 긴 역사에서 '선을 그어놓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 주일 아침에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 영적 호기심도 많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신앙을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고 공공의 문제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신앙을 개인의 도덕과 교양의 문제로 간주하고 인간의 삶 전체에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21세기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신자라면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진실하고 진심입니다. 요점은 이 '숨겨진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이 너무 '작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믿음이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그의 믿음을 밝은 대낮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니고데모의 삶에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하라는 초대입니다. 중생, 곧 거듭남으로의 초대입니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영적인 경험이지만, 자기에게는 그런 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은 니고데모의 말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입니다. 이 말 이후 니고데모는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갑자기 독자들만 남습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은 우리의 질문이 되어버립니다. 그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요한복음 3장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16-21절)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에 머물지 않고 이 빛으로 나오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을 초대하셔서 낮의 빛에 거하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풍성한 생명"(요한 10:10)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니고데모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십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애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니고데모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우리가 그렇게 다시 태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빛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며,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다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에 머물지 않고 빛으로 나오도록 초대하십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니고데모가 그 어둠에서 빛으로 완전히 나아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온 니고데모는 다시 요한복음 7장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9장에 다시 나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유대인의 최고법정 산헤드린에 끌려왔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적극 변호합니다. 이미 각본이 짜인 재판장에서 니고데모는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한 7:51, 새번역)라고 격렬하게 항의합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그 많은 산헤드린 회원 가운데 유일하게 저항하다 질질 끌려 나가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낼 때 니고데모가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십자가 처형]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갔는데,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약 33kg]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범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어라"(요한 19:38-40)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을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키며 끝내 자신의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니고데모를 단지 위선자로, 겁쟁이로, 혹은 단순한 예수 흠모자로 평가 절하하지 마십시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매료된 단계에서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따르는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 언저리와 그늘 속에서 살았으나 마침내 빛으로 나아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할 수 있느냐고,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던 니고데모는 마침내 "진리를 따르는 자[로] 빛으로" 나아왔습니다. 성서에서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사실 오늘 우리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의 믿음은 느릿느릿한 거북이의 발걸음이었지만 한평생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요한 17:3) 진정한 지식에 이르기 위해 성실한 믿음의 길을 걸었던 믿음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도 이 니고데모처럼 의혹에서 확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날마다 자라나고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에베소서 4:13)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정연복 시인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마침 기도로 함께 드립니다. 시인은 그렇게 이름 짓지 않았으나 이 기도는 꼭 니고데모의 기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 신비로 가득함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 그 신비를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 소박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하소서. // 명석한 두뇌와 차가운 이성보다는 / 따뜻한 가슴과 풍부한 감성으로 // 많은 복잡한 지식을 뽐내지 말고 / 단순하고 깊은 삶의 지혜를 소망하게 하소서. // 아직은 잘 모르는 것을 / 솔직히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것도 / 다시금 생각하는 신중함을 주소서. // 참되고 성숙한 지혜에 이르는 길은 / 한평생이 걸린다는 것 // 토끼의 약삭빠름이 아니라 / 느릿느릿 거북이의 길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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