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여호와 보시기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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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6:16-18, 히브리서 4:14-16, 마가복음 16:1-8

설교문

어느 학자(사이먼 시넥, <인피니트 게임>)는 인간의 삶에 두 가지 유형의 게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유한게임'입니다. 여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규칙이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이와 같습니다. 정치도 종종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의 유형은 '무한게임'입니다. 여기에는 출발점이나 결승선이 없습니다. 합의된 규칙도 없습니다. 승자와 패자도 없습니다. 예술과 음악과 문학이 그렇습니다. 베토벤은 누구도 이기지 않았습니다. 바흐도 아무에게도 지지 않았습니다. 유한게임은 이기기 위해서 합니다. 무한게임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합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신명기 6:16-19) 이 구절은 좀 특이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라]"라고 해도 충분합니다. 구약성서에는 613개의 계명이 이미 잘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말 뒤에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Do what is right and good in the LORD's sight)라는 말을 덧붙였을까요? 단순한 동어반복입니까?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라는 말은 설사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주님 보시기에 옳지 않고 선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일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운 일이면 하라는 말입니다. 규례와 명령과 법률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유한게임입니다. 아무리규례와 명령과 율법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드려진다 해도 모두 유한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라는 말은 동어반복이 아닙니다. 율법을 넘어서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규례와 명령과 율례는 다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이 허용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만약 그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규칙으로, 율법으로, 규례와 명령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게임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무한게임입니다.

신명기 6장에 이어서 모세는 신명기 7장에서도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brit)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hesed)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신명기 7:9, 새번역) 역시 문구가 이상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브리트', 즉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 '헤세드', 즉 한결같은 사랑을 추가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7장에서 한 번 더 브리트와 헤세드, 즉 언약과 사랑을 연결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brit)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hesed)을 베푸실 것입니다."(신명기 7:12)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브리트', 즉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 '헤세드', 즉 한결같은 사랑을 추가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만이 아니라 '언약과 사랑'(covenant and love)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이 조합은 찾기 쉽지 않을 정도로 특별합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 짓고 나서 봉헌할 때 드린 기도에도 '언약과 사랑'이라는 특별한 조합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brit)을 지키시고 은혜(hesed)를 베푸시나이다."(열왕기상 8:23) 뿐만 아닙니다.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귀향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brit)과 인자하심(hesed)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헤미야 9:32)

헤세드가 무엇입니까?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인애'(仁愛), '은혜', 혹은 '인자하심'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사랑의 친절'(loving-kindness)로 번역되곤 합니다. 헤세드는 우리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입니다. 헤세드는 나의 친절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은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시편 89편 기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하나님의 '사랑의 친절'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항상 주의 사랑(hesed)을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대대에 전하겠습니다. 주의 사랑(hesed)이 영원하며 주의 성실하심이 하늘처럼 영구함을 내가 선포하겠습니다."(시편 89:1-2, 현대인의 성경)

그렇습니다. 나는 법적으로 '의롭다'(tzedaka, 체다카)라고 여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명령과 규례를 잘 지키면 됩니다. 혹은 도덕적으로 '공의롭다'(mishpat, 미슈파트)라고 여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면 됩니다. 하지만 성서의 신앙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hesed, 헤세드)을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이 사랑의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의 친절로 행동할 때 그것은 순수한 은혜의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이 사랑을 베푸셨다는 게 성서의 특별한 고백입니다.

구약성서의 룻기는 이 '헤세드'가 무엇인지 탁월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룻(Ruth)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모압 여인이었지요.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남자와 혼인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다문화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나오미(Naomi)입니다. 이 룻의 이야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장면이 나옵니다. 첫째로,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가려 결심했을 때의 일입니다.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나오미는 두 이방인 며느리들에게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며느리들은 자기의 아들들과 결혼했으나 지금은 과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은 없습니다. 며느리들은 모압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가면 이방인이 될 것이므로 거기에 갈 아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너희는 나에게 빚진 게 하나도 없다. 너희는 친절하고 좋은 며느리였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룻은 나오미를 따라갔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에 온 룻이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 곡식을 거두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남자인 보아스는 룻을 세심하게 돌보고 배려했습니다. 그래서 룻이 보아스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이방인인 저를 인정해주십니까?' 이방인은 완전한 외부자(outsider)입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룻을 돌볼 율법의 아무 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치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은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아스는 룻에게 헤세드, 즉 사랑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마치 룻이 이젠 아무 의무가 없는 나오미에게 헤세드, 즉 사랑의 친절을 베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일, 그것이 헤세드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일, 그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룻기는 자신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친절인 헤세드를 우리도 실천하며 살 수 있음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왜 모세와 솔로몬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단지 '언약'(브리트)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언약과 사랑'(브리트 & 헤세드)이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설명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언약은 본질적으로 조건적입니다.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둘은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기로 서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실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if)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then) 너희가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소중한 백성이 될 것이다."(출애굽기 19:5, 현대인의 성경) 언약관계에는 '만일~그러면'(if~then)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언약은 본질적으로 취약합니다. 깨지기 쉽습니다. 인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약속과 계약과 서약이 깨지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러나 헤세드에는 '만일~그러면'이라는 조건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헤세드는 받는 사람의 가치와 상관없이, 주는 사람의 선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렸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또 그 땅도 기억하겠다... 비록 그들이 [내가 명한 법도를 거역한] 죄값을 치르고 있더라도... 나는 절대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미워하지도 않고 멸망시키지도 않겠다. 그래서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겠다. 내가 주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6:42-44, 새번역)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과 같은 마음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혹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이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멀어질 수는 있지만, 부모는 여전히 부모이고, 자녀는 여전히 자녀입니다. 결혼은 언약이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했든 하나님의 우리의 부모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헤세드는 자녀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든 없든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한없는 연민입니다. 언약은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언약관계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사랑의 친절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헤세드가 뒷받침된 브리트라야 온전합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보아스가 룻에게 행한 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헤세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룻의 그 따뜻한 사랑의 친절로부터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계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점을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태복음 1:1) 이것이 신약성서의 맨 처음은 마태복음의 맨 첫 구절입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계보를 소개하는데, 그 계보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모압 여인 룻의 이름이 나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태 1:5) 이렇게 이어지던 계보는 결국 "엘리웃을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 1:15-16)라고 끝납니다. 마태복음 1장의 계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에 관한 단순한 족보(族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무조건적인 은혜, 그리고 한없는 연민, 바로 그 헤세드의 계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4-16)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 그 은혜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연민하셔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 그 사랑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약만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언약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자격이 없지만, 오늘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이렇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꼭 이걸 묻습니다.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 저의 대답은 지금도 갈릴리입니다. 예수께서 직접 걸으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무리를 먹이시고, 고치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신 그 선교의 현장이 저에게는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순례 여정 중 갈릴리 바다를 찾아갔는데 매우 놀랐던 일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한참이나, 정말 한참이나 내리막길을 달려서야 비로소 갈릴리 바다가 나왔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헤르몬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와 바다 안에는 풍성한 생명이 넘칩니다. 이 신선한 물은 남쪽 요단강을 통해 사해(死海)로 흘러갑니다. 그 갈릴리 바다에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바다가 지중해 해수면보다 무려 200m나 아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이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바다입니다. 가장 낮기에 물이 모여듭니다. "계곡은 낮아서 물을 모으고, 바다는 더 낮아서 큰 물을 담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그 즉시 왜 갈릴리 바닷가가 예수님의 선교현장이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천상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지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껴안으셨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렇게 '낮아지려는 마음'을 '하심'(下心)이라고 한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심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하나님의 하심'이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빌립보서 2:5-8)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役事)가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활의 신(新)새벽에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은 세 여인에게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마가 16:6-7)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부활의 새벽에 서둘러 가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가셨습니다. 그리로 따라오라는 전갈 하나 남기고 총총히 새벽길을 떠나셨습니다. 갈릴리가 어디입니까? 목자 없는 양 같이 굶주리고, 방황하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세계 고난의 현장 한복판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지금 지옥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타인의 고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테레사 수녀는 자기 혼자 천국에 가서 호강하는 일을 마다하고,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사는 지옥을 자청(自請)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연민하시는 주님의 사랑엔 끝이 없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는 규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친절은 무한게임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마태복음 20:28) 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도 누군가를 섬기고, 연민하고, 사랑의 친절을 베푸는 무한게임일 수 있겠습니까. 이 나라의 교육도 시험점수와 자격증에만 관심을 갖는 유한게임이 아니라 서고 돕고 존중하며 사랑의 친절을 베푸는 훌륭한 인격들을 양성하는 무한게임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나라의 정치도 누군가를 무찌르고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기 위한 유한게임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봉사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을 실현하는 소명의 무한게임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또]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신명기 6:16-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what is right and good in the LORD's sight), 그 헤세드를 행하며 사십시오. 나에게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아무 의무도 지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의 친절을 베풀며 사십시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서 순수한 은혜의 행동을 실천하며 사십시오. "여호와 보시기에" 이 사랑과 친절과 은혜를 행하며 사람 사람에게 성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아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좋은 땅에 들어가"(신명기 6:17b, 현대인의 성경)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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