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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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6:16-19, 고린도전서 3:18-20, 누가복음 12:27

설교문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신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그의 유고집 『팡세』(1670)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갈대일 뿐이다.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그는 인간의 특별함을 '생각'에서 찾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책 제목 '팡세'(Pensées)가 불어로 '생각들'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람은 하루종일 생각을 하며 삽니다. 생각하는 것,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훌륭한 특질입니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다른 동물과 달리 위대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정말로 그렇게 좋기만 한 걸까요?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종종 제멋대로입니다. 생각은 흐르는 물이나 바람처럼,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풍선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생각의 특징은 종종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생각이 불쑥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내 안에서 속삭이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기도 하고 거기에 형상을 부여해 강력한 힘을 갖게 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도 그 이야기 실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명상할 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단, 코끼리를 절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면 눈을 감자마자 떠오르는 것이 바로 코끼리입니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자꾸 나타나는 것이 코끼리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명상할 때 오직 코끼리만 생각하라' 하면 그땐 코끼리만이 아니라 사자, 원숭이, 하마가 계속 나타납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과 싸우느라 지쳐버립니다. 눈을 감고 고요해지려고 하면 더 시끄러워지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쉽게 우리를 생각의 하인으로 만듭니다. 생각은 내 마음에서 나왔는데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마음만큼 형편없는 주인도 없어서,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실제 일어난 일보다 더 많은 상상으로 고통받게 합니다. 생각도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겨울날 깊은 숲속에 사는 박새가 옆에 있던 비둘기에게 말했습니다.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아?' 비둘기가 답합니다. '무게가 거의 없어.' 그러자 박새는 말합니다. '그럼 내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내가 전나무 등치 바로 옆 가지에 앉아 있었거든. 그때 눈이 오는 거야.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심한 눈보라도 아니었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들의 숫자를 세었지. 정확하게 3,741,952개였어. 너의 말대로라면 무게가 거의 없는 그다음 번째 눈송이가 내려앉는 순간 나뭇가지가 툭 부러졌어.'

지금 여러분의 마음엔 얼마나 많은 '생각의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습니까?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하는 생각의 방해로 평화롭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멈추려 해도 내 '뇌 안의 수다쟁이'는 끊임없이 떠들어댑니다. 쉬지 않고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마음은 한 개의 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답니다. '만약 누군가의 화살을 맞으면 아프겠는가?' 제자가 답합니다. '당연히 아픕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똑같은 자리에 두 번째 화살을 맞으면 더 아프겠는가?' '몹시 아플 겁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한 감정의 고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

첫 번째 화살은 누군가가 나에게 쏜 화살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그 화살을 맞은 자리에 내가 다시 쏜 화살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실패와 좌절과 비난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그런데 실제 고통의 대부분은 그 사건보다 그것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 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진실이 겨우 신발 끈을 묶고 있을 때 거짓은 벌써 사람의 입을 타고 지구의 반 바퀴를 돈다고 합니다. 억울함과 배신감, 그리고 증오와 복수심에 치를 떨고 꿈속에서도 괴롭힘을 당합니다. 바로 그런 감정들이 오늘을 생생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어젯밤에도 근심 걱정으로 잠 못 이룬 게 저만의 이야기일까요?

브라이언 패튼의 <고양이는 옳다>입니다. "날마다 고양이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 추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는 길, / 가장 따뜻한 지점과 / 먹을 것이 있는 위치를 기억한다... / 마룻바닥의 삐걱거림과 사람의 발자국 소리, / 생선의 맛과 우유 핥아먹는 기쁨을 기억한다. / 그밖의 기억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 마음속에서 내보낸다. / 그래서 고양이는 우리보다 더 깊이 잔다. / 너무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하면서 / 심장에 금이 가는 우리들보다."

이 시의 원제는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너무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하면서 / 심장에 금이 [간] 우리들"은 어젯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늘 걱정을 안고 삽니다. 우리 말에는 심지어 "걱정을 사서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다'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값을 치르고 내 것으로 만든다는 뜻인데, 하필이면 걱정을 '사서' 하다니요, 사서 할 필요까지 있습니까? 우리는 안 해도 좋을 걱정을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염려'라고 하셨습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누가복음 12:27) 과장(誇張), 곧 사실보다 부풀린 말씀은 아닐까요? 솔로몬이면 한 나라의 제왕인데 그가 얼마나 화려한 옷을 입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입은 옷이 들풀 하나만큼도 못하였다니요. 하지만 예수님은 거침이 없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는 늘 맨발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맨발입니다. 내일 먹을 양식을 담아두는 호주머니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새를 '보라' 하셨습니다. 여벌 옷 하나 없는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그 새를 보고 그 백합화를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태복음 6:31) 하셨습니다.

염려(念慮)라는 말은 성서의 그리스어로 '메림나오'입니다. '메리조'(나뉘다)와 '누스'(마음)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성서에서 염려라는 말의 뜻은 '마음이 나뉘다', '마음이 쪼개지다', '마음이 조각나다'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마음이 어제의 거기에, 내일의 일에 가 있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오늘을 생생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느라 지금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율곡 선생은 "말이 많고 걱정이 많은 것처럼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는데, "말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부족한 탓이요, 걱정이 많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탓"(김흥호)입니다. 예수께서도 염려하는 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태복음 30)라고 하셨습니다.

"조용하게 앉으라. / 그리고 그 안에서 누가 / 너의 생각을 관찰하고 있는지 찾아보라. / 주의 깊게 바라보면 / 네 안에서 또 하나의 너를 발견하게 되리라... / 그렇게 안을 들여다보라. / 네 안의 또 하나의 너를 찾으라..."(스와미 묵타난다, <조용하게 앉으라>)

생각은 '나'가 아닙니다. 본래의 '나'는 생각들이 아니라 그 생각들을 관찰하는 자입니다. 그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생각이 내 삶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생각의 종이 됩니다. 내 마음이 이야기를 꾸미기 전에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두려움과 욕망과 불안을 연료로 하여 지어내려는 이야기를 얼른 알아차려야 합니다. 끊임없는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6)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숨어서 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cus)에게 기도하라 했습니다. '숨어서 계시다'라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나 생각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함석헌 선생이 <하나님>이라는 시에서 이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몰랐네 / 뭐 모른지도 모른 /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 몰라서 겪었네 / 어림없이 겪어보니 /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 벅차서 떨었네 / 떨다 생각하니 /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었네 // 하도 야릇해 가만히 만졌네 / 만지다 꼭 쥐어보니 /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었네 //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이었네 //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숨어서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내 마음에 '대드는 계심'이고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고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고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며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입니다. 그 '그득한 빛'에 녹아버리는 게 기도입니다. '텅 비인 빈탕'에 자유롭게 뛰놀며 거룩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게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참 알다가도 모를 신비의 경지입니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 [이게]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모를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도] 모르는 내 얼[생각] 빠져든 계심", 그 계심이 바로 '없이 계시는' 하나님, 곧 '숨어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현존(現存)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신비입니다. 신비는 이름과 분류를 넘어서 있습니다. 서구 철학은 '앎의 주체'와 '앎의 대상'을 구분했습니다. 그런 지식은 세상의 지식을 다 가져도 풀 한 포기에 깃든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지식은 앎이 아니라 대상을 분류하는 편리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대'입니다. '현존'입니다. '신비'입니다. '당신'입니다. 그런 "당신을 하느님으로 안다는 것 / 그것은 다만 / 우리가 당신에 대해 /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 깨우치는 것입니다 / 당신은 우리의 사유와 관념 / 그 너머 / 영원한 세계 / 그곳에 계시는 까닭입니다."(조마나스 신부, <하느님이신 당신에게>) 우리는 이런 세계에서만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요한복음 15:5) 거하는 신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히브리어로 '레히트팔렐'인데, 자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이라는 맑은 거울 앞에 자신과 세상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생각을 중얼거리는 시간이 아니라 '없이 계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우는 시간입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마가복음 14:36, 새번역)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비우는' 것입니다. 내 뜻과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내 안의 어둠과, 불안과, 욕망을 비운 만큼 삶의 여백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백의 미를 가진 사람이 되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분이 있었습니다. 심한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느 날 그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영적 스승에게 조언을 청했습니다.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마세요." 암에 걸린 것을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크게 확대해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암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임을 깨닫고 계속 활동적으로 살아가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암에 관한 생각을 내려놓지 그분은 두려움과 싸우던 에너지를 생명력으로 바꾸어 스스로 치유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베트 속담입니다. 우리는 버릇처럼 걱정합니다. 생각이 자기 멋대로 꾸며낸 이야기 속에 스스로 가둡니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그 자리에 두 번째 화살을 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 입은 감정들이 내 삶을 방해하는 것을 너무 오래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화살들을 단호히 뽑아버려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4) 하셨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의 80%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질병이나 죽음이 아니라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의 하나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이사야 41:10) 하셨습니다. 걱정이 많은 것처럼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걱정이 많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적에 싸여 있습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도 귀히 기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귀히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인간이 삶은 사는 방식에는 오직 두 가지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기적'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은 없다'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요나 2:7) 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닌진 자 누[가]"(찬송가 369장 3절) 있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원한 길로 인도[하실]"(시편 139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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