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시인(1945- )은 초등학교 교장 시절 아이들과 풀꽃 그리기 수업을 하다가 그들에게 해준 말을 그대로 옮겨서 이 시를 썼다. 이 시는 시화집 『너도 그렇다』(2009)에 실렸으며, <풀꽃2>, <풀꽃3>과 더불어 연작시를 구성한다. 수업을 하며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 입말들에서 가르치는 이의 따스한 눈길과 품격 있는 격려가 느껴진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태도에서 인간적인 따스함이 배여 나오고, 아이들을 풀꽃의 모습에 비긴 데에 문학적 품격이 실려 있다. 그의 눈에는 풀꽃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처럼 아이들도 그렇다.
마지막 행에서 앞선 네 행들에서 이어져 온 긴장이 폭발한다. "너도 그렇다." 풀꽃과 아이들을 동일시하되 그들이 동등하게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선언한다. 시인은 사실 풀꽃을 우주적인 차원의 존재로 본다. 그는 <시>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읊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꽃 한 송이에 지구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지구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시적 행위이다. 이는 우주에서 바라본 평가이다. 따라서 그가 풀꽃을 아이들과 동일시한 것은 풀꽃이 우주적 존재이듯이 아이들도 우주적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풀이나 아이들은 약한 데다가 작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예쁜 줄 모르고 사랑스러운지도 알 수 없다. 비록 풀이 꽃을 피우듯이 아이들도 꽃망울처럼 방긋거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양 간주되기 쉽다. 우주적 의미는 그들의 왜소한 외피에 갇혀있다. 이런 조건에 대해서 시인은 그들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 길은 바로 자세한 관찰과 지속적인 관심이다. 그때 어떤 대상이든 예쁘고 사랑스러워지게 된다. 누구이든 자세히 보고 오래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우주적이지 않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도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의 선포이다. 즉, 자세히 보고 오래 본다는 것은 애정을 갖고 본다는 말이다.
이처럼 애정어린 관심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우리 곁에 풀도 있고 아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풀에 꽃이 피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의 이름도 모른다. 김춘수(1922-2004) 시인이 <꽃>에서 읊었듯이, 기껏 "하나의 몸짓"으로 여길 뿐이다. 더군다나 그들을 우리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기란 더 어렵다. 실은,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큼 세심한 관찰과 지속적인 관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보다 본질적인 참조체계가 필요하다.
성경은 보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있는 그 형상을 깨닫는 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물론, 그 형상이 드러나는 모양, 색깔, 이름이 다르기는 하다. 그래서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한다. 그만큼 통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가치를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에 달라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너도 그렇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형상을 품은 우주적인 존재로 보신다. 그분은 우리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고 계셨으며 이후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도 역시 이웃에게 자세한 관찰과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웃을 자세히 볼 때, 그들의 예쁜 모습을 발견하고, 오래 볼 때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시인의 <풀꽃2>는 이렇게 읊는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자세히 보고 오래 볼 때 우리는 이웃의 이름, 색깔, 모양을 알게 된다. 그 관찰과 관심이 지속할수록 관계의 밀도가 점점 짙어간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지는 "비밀"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이다. 그분이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 옆집 사람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만들어가시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과 관심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개별적으로 의의를 지닌 존재가 된다. <풀꽃3>은 개별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이것이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개별 존재의 삶을 긍정한다. 이 존재의 긍정은 이웃을 바라보는 관점이 된다. 결국, 우리는 그 눈으로 이웃을 우리와 동등한 존재로 보게 된다. "너도 그렇다." 이렇게 이웃을 개별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결국 이웃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고 일러준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곁에 있는데 외롭거나 우울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너도 그렇다"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풀꽃> 연작시는 이웃 사랑이 자기확장이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 성경은 그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바울 사도는 십계명 후반부의 내용이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로마서 13:9). 간음, 살인, 절도, 탐욕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이웃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일러준 사랑의 길은 일상생활 속의 마음가짐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래 참는 것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길이다. 이웃뿐만 아니라 자신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았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풀꽃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볼 때 그가 우주적 존재인 사실을 알게 되듯이, 오래 참으며 이웃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우주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