쬐다
이재무
오늘은 추운 마음을 덮히려 강가를 거닐며
강물을 쬐다 돌아왔다. 햇볕이 소금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날을 택해
꽃이나 실컷 쬐다 왔으면 한다
무엇을 쬔다는 것,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워진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쬐는 일이다.
시인(1958- )은 '쬐는' 일의 생명성을 환기하고 그 일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린다. '쬐다'는 햇볕이나 불을 쐬거나 그것에 말리는 행위이니까 더운 기운을 받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가 '쬐었던' 강물이 그의 추운 마음을 이불처럼 덮은 것으로 보아 그 강물의 기운은 햇볕이나 불처럼 추위를 녹이는 힘이다. 여기서 시인이 마음을 '덮힌' 것은 그 단어가 '덥히다'와 동음이의어인 점에 착안하여 덮어 데움의 중의적인 효과를 의도한 듯하다. 마음의 추위가 상징적으로는 죽음의 세력으로서 그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그는 강물을 쬔 뒤 마음의 추위를 초래했던 현실로 "돌아왔다." 생명의 힘을 회복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무엇을 쬔다는 것,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워진다"고 느낀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으면 그 대상을 쬔 것이다. 따라서 '쬐다'는 생명력을 '누리다,' '즐기다'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와 같이 생명력을 누리고 즐기게 하는 행위의 원초적인 양태는 사랑이다. 그는 사랑을 "서로가 서로를 쬐는 일"로 정의한다.
그는 마음이 추웠다. 그 추위는 아마도 외로움, 권태 혹은 모종의 결핍감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언가로 그 마음을 덮어서 추위를 녹이고 싶었다. 일종의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에 이끌려 강가로 갔다. 강물의 생명력이 자기의 마음을 덮어주기를 기대하며 강가를 거닐었다. 기대한 대로 강물의 생명력이 존재론적인 추위를 덮어서 그 냉기를 녹였다. 그렇게 마음이 더워져서 돌아오는 중에 꽃의 생명력도 풍만하게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는 자신이 충전한 생명력이 꽃처럼 화사하게 만개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추운 마음에 생기가 돌면서 소망을 품게 된 것이다. 모색이 확신에 근접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꽃의 생명력은 소금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햇볕을 닮았을 것이다. 햇볕이 눈에 보였다. 그처럼 생명의 힘이 눈앞에서 전개되니까 그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더워진다." 그런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므로 결국 그는 사랑을 쬐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외로움, 권태 혹은 모종의 결핍감을 덮어서 녹여내는 힘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의 생명력이 일방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강물의 힘을 일방적으로 받으며 햇볕의 온기와 꽃의 생명력을 일방적으로 흡입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강물과 햇볕과 꽃을 생명력의 원천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도 그들에게 존경을 쪼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존경은 자연에게 생명력을 원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과 "서로가 서로를 쬐는" 사랑을 하고 있다. 마침, 그가 희구하는 그날, "햇볕이 소금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날"은 햇볕의 따스한 촉각이 하얗게 시각화되는 공감각적 순간이다. 그 순간에 꽃의 아름다운 자태는 감동의 찬양을 받고, 그 꽃을 완상(玩賞)하는 자는 그 아름다움에서 생명의 힘을 얻는다. 그러고 보니까 강물과 햇볕과 꽃은 모성 혹은 여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머니(자연)의 쬐어주는 사랑이 자녀(인간)의 감사로 돌아오는 순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워진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은 서로를 쬐는 관계이다.
그런 사랑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베풀어진다. 시인 유홍준(1962- )의 <사람을 쬐다>를 보면, 쬐는 행위의 생명성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그래서 인기척 없는 독거노인의 집에는 곰팡이나 이끼가 피는 법이다. 지팡이 끝으로 긁어도 곰팡이나 이끼는 걷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은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도 나와 지팡이를 내려놓고 앉아 있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시인은 비록 독거노인과 할머니만 언급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쬐지 않으면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갇혀 곰팡이나 이끼가 군데군데 핀 공간에서 지내며 얼굴에 저승꽃을 피우게 된다고 암시함으로써 사람에게는 사람을 쬐는 일이 사람살이에 필수적이라고 알리고 있다. "사람이란 그렇다."
대문간에 앉으신 한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쬐고 있지만, 그 할머니가 문가로 나와 앉으셨기에 그들도 할머니를 쬐게 된다. 할머니와 그들이 아무런 관계가 없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쬐고 있으니까 그들 사이는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 견강부회인 듯 들릴 수 있으나, 사랑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도 베풀어지지 않는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4-7). 이렇게 구체적인 모습만큼이나 사랑은 다양한 이웃에게로 확산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랑의 송가(?)가 이웃에 대해 일방적으로 양보할 것을 가르치는 듯이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양보는 사랑이 일대일의 대가를 바라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린다. 직접 우리에게로 감사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이웃에게로 양보의 형태로 전이된다면, 그 사랑은 충분히 상호적이다. 혹은, 그러지 않더라도 그 양보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성숙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도 사랑의 상호성은 증명된 것이다.
이러한 상호적인 사랑이 모든 관계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물론, 그 상호성은 표면적이거나 의례적인 교류가 아니라 인격적 교제로써 증명된다. 서로에게 인격적 관심을 쏟는 것이다. 인격적 관심이란 진심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그때 우리는 자연과도 그런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쬐어서 존재론적인 추위를 녹여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강물처럼 목을 축여주고, 어떤 때는 햇볕처럼 온몸을 덮어 마음의 추위를 풀어주며, 어떤 때는 꽃처럼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삶을 풍성하게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워진다."
하나님과 그 자녀들과의 관계도 사랑의 상호성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6).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인간 안에 거하는 통로이자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서 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다양한 양태로 확산될 잠재력이 배양된다. 그 안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도 서로 상대방의 생명을 회복시키고 생명의 힘을 배가시킨다. 그러면 그들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쬐는 일"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