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시인(1970- )은 소설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1993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 시는 그녀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에 실렸다. 그녀의 시에는 삶의 밝고 건강한 순간보다는 고통받는 자의 고뇌와 왜곡, 그리고 음울함과 우울함의 기조가 두드러진다. 시는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경험하는 백일 전후의 악몽과 같은 일을 읊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피로에 절어 지냈던 기억을 환기한다. 물론,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그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인간 존재의 우울한 조건을 상기시키지만 고통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그 "거품 같은 아이[는] 꺼져버릴까 봐"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온 몸을 바쳐서 울고 있다. 원인이나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이는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저녁마다 울었다. 그것도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을 울었다. 움츠러든 마음에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라고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다. 대답 없이 울기만 하는 아이를 두 팔로 껴안고 집안을 수없이 돌며 눈물 젖은 아이의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니 아이도 사실상 이유를 모른 채 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목이 쉬도록 울기만 하는 아이가 애처로워 화자는 자신의 눈물이 아이의 얼굴에 떨어져 그 눈물들이 섞이는 것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이제와는 다른 말을 하게 됐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라고 말했다. 마치 이유를 알게 된 것처럼 말했다. 모두 해결됐으니 그만 울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추측할 만한 일은 그녀의 눈물이 아이의 눈물과 섞였던 것뿐이다.
두 눈물이 섞였다는 것은 고통 때문에 말 못하는 아픔을 겪는 것이 아이뿐만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모두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존재이다. 그녀는 아이에게서 자기의 분신을 본 것이다. 이처럼 눈물이 섞이며 한 몸처럼 고통을 공감했을 때는 우주적 통찰이 닥치는 순간이다. "괜찮아"라는 말을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하게 된다. 초월적 통찰의 순간이다. 그 존재의 순간에 시인은 "내 울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자신 안의 "누가 가르쳐준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 오열하면 "왜 그래"라고 이유를 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설득하고자 한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졸지에 당한 욥에게 그의 친구들이 했듯이 "왜 그래"를 치밀하게 구성해서 추궁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 이유를 알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실용적 의도가 염두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오열할 때는 자기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유를 채근할 일이 아니다. 화자가 했듯이 자신의 눈물을 보태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녀처럼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안의 자신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녀는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 그리고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보고 "내 안의 당신"을 발견했다. 지금 서른이 되었으나 인생의 광막한 여정 앞에서 여전히 갓난아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아보았다. 그에게 닥쳐온 인생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는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괜찮아"라는 말은 고통 속에 울부짖는 자에게 힘을 준다. 어차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을 살아가야 한다면, 공감의 위로가 생명의 힘과 소망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스스로 고민할 여유와 심리적 안정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고통은 우리의 안팎에 산재하므로 이 갓난아이는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실은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힘들어 울부짖는 가운데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게 사실상 갓난아이와 같다. 그리고 그 갓난아이는 나 자신이다. 모두 "거품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겠는가? 나를 힘들게 하거나 고통을 준 존재를 갓난아이라고 볼 수 있을까? "두 팔로 껴안고" 집안을 수없이 돌며 "괜찮아/ 이제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그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내 눈물을 떨구어 그 눈물이 섞이도록 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4-15). 그렇게 하더라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겠지만, 그렇게 말하게 되면, 오히려 내 울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