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행복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인(1908-1967)은 사랑하는 이를 그리며 편지를 쓴다. 그의 마음은 "에메랄드 빛 하늘"과 같다.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바라다본 하늘이 바로 그 마음이다. 그는 그 마음을 행복이라 칭한다. 그 행복감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도 행복의 눈으로 바라본다. 우체국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사연이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인 것을 알지만 슬픈 사연에 괘념하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으나 곧 "더욱 더 의지 삼고" 양귀비꽃으로 피어난 사랑의 현실을 눈앞에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싸여 있다. 에메랄드 빛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그 진홍빛 양귀비꽃은 "사랑하는 것"의 선명한 행복을 주저 없이 증언한다.

그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담겼을까? 아마도 지나온 사랑의 여정을 되새기며 현재 피어난 사랑의 꽃을 찬양할 것 같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둘러싼 "인정의 꽃밭," 즉 사람들 사이의 정이 세파에 시달려 "헝클어진" 모습이지만,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은 그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사랑의 의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편지의 결어는 아마도 서두와 같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으로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그 양귀비꽃을 연인에게 바친다. 그는 더 이상의 염원이 없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는 시인의 체험을 승화했다. 그는 통영여중에서 함께 근무했던 시조시인 이영도를 사랑했다. 미망인에 대한 사회적 통념 때문에 그녀는 유부남의 구애를 거절했고 학교를 옮기면서까지 자기 외동딸과의 생활을 보호하고자 했다. 물론, 그의 구애는 플라토닉 러브였고, 이영도는 그가 죽기 3년 전쯤에야 마음을 열었다. 그들이 20여 년간 주고받은 편지가 5천여 통이었는데,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행복하였네라"고 느꼈던 듯하다. 그 편지들 중 선별된 200통이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1967)로 출판되었다. 한편에서 보면, 이러한 순정어린 고백이 유부남의 정신적 불륜을 연상시키기는 한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그 관계의 긴장과 순진한 열정은 사랑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정의를 기대하게 한다.

그는 자작시해설총서 『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 1959)에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일은 내가 소유됨이요, 내가 사랑함은 곧 내가 소유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소유한다는 사실은 곧 다른 하나의 나를 더 설정한다는 일이 아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 "그지없이 허무한 목숨에 있어서 나를 더 설정하여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큰 구원의 길"이라고 부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시 속에 표현한 사랑은 청순한 사춘기적 연정을 연상시키는 한편으로 자아의 확장이라는 본질적 요소도 암시하고 있다. 물론, "내가 소유하는 때문"에 행복을 느낀다는 표현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나를 더 설정"했다는 기쁨의 표현이다. 이것은 연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서 상대방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시인이 체험에서 응축적으로 추출해낸 사랑의 진솔한 경지는 "구원의 길"에 맞닿아 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을 에메랄드 빛 하늘을 배경으로 핀 진홍빛 양귀비꽃으로 구현했다. 그 상징에는 '하늘'과 '양귀비꽃'이라는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사랑이 하늘처럼 소유할 수 없는 반면에 양귀비꽃처럼 소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알리는 듯하다. 사랑은 소유와 비소유의 긴장을 조화롭게 유지하되 독점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능력인 것이다. 이처럼 유부남의 정신적 사랑이라는 베일을 걷어내면, 이 시는 "사랑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형상화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의미의 색깔이 진홍빛인 점이 십자가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십자가도 "사랑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또 다른 한 송이의 양귀비꽃으로 구현한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올려다본 그날의 하늘도 분명 에메랄드 빛이었을 것이다. 죄와 흑암의 "고달픈 바람결"이 "인정의 꽃밭"에서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늘의 빛은 진홍빛 양귀비꽃 같은 선혈을 뚝뚝 흘리면서 목숨을 대신 내어준 그분의 마음을 반영했다. 그분은 아마도 이렇게 되뇌었을 것 같다.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 마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을 "다른 하나의 나"로 설정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한다. 이 사랑의 수신자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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