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신흥식
길을 가다 우물을 보면
깊이가 궁금하여
돌멩이를 던져 봅니다.
풍덩,
소리를 듣고서야 안심이 됩니다.
오늘 문득
풍덩,
그 소리가 그리워
돌멩이 하나,
그대 가슴에 던져 봅니다.
시인(1931-2022)은 인간의 호기심에 존재론적인 상념을 실어놓았다. 화자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우물에 돌멩이를 던졌다. 그 행위는 사람에 따라서는 일탈의 욕구가 표출된 것일 수 있고 정일(靜逸)함에 대한 파괴적 시기심이 발동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우물의 깊이를 재고 싶었다. 그렇다고 산술적 깊이를 알고자 하거나 직업적 혹은 특정 목적에 따른 행위도 아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문득 그러고 싶었다. 그 호기심은 왜 발동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아무래도 우물의 물이 생명을 연상시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깊이가 궁금하여" 돌멩이를 던졌으므로 물이 깊으면 생존의 안정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호기심은 생존의 불안을 반영한다.
"풍덩" 소리가 났을 때 그는 "안심이 됩니다." 돌멩이가 바닥 혹은 그 바닥의 돌들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면 그는 불안했을 것이다. 혹은, 물이 얕아서 "풍덩" 소리가 시원하게 나지 않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불안은 인간이 생존에 관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풍덩" 소리가 우물 위로 울려 나왔기 때문에 그는 안심했다. 생존의 안전성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굳이 우물의 깊이가 궁금했다. 우물이 깊을수록 불안감은 그만큼 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물의 깊이는 물의 높이를 가리킨다. 그 높이는 우물이 매일 쌓아온 생명의 힘을 알린다. 날마다 사람들은 그 우물에서 생명의 힘을 길어다 쓸 것이니까 그 생명이 소진되지 않을 만큼의 높이가 될 때 그들은 안심하게 된다. 따라서 "풍덩"은 불안의 적막을 깨는 생명의 고고(呱呱)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울어야 사람들이 안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문득" 무심결에라도 그 깊이를 재고 싶어 한다.
관점을 달리해서, 우물에 돌멩이를 던진 것을 우물에다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보자. '너는 얼마나 깊으냐?'는 질문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해 우물의 물은 "풍덩" 소리만큼 깊다고 대답했다. 화자는 이처럼 생존의 불안감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뒤에 그 질문을 "그대 가슴"의 우물에다 던진다. 여기서 "그대"는 연인이라기보다 그 불안감을 갖고 사는 무명의 상대방, 혹은 자기를 포함하는 독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돌멩이가 상징하는 질문은 상징적인 "그대"가 답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대"가 "풍덩" 소리를 내어 자신을 안심시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바로 "풍덩" 소리를 내지는 않고 있다. 그는 그 대답을 그리워하는 상태에서 멈추었다. 시가 거기서 끝난다.
이제 상징적 "그대," 혹은 독자의 시간이다. '내 가슴의 우물은 얼마나 깊은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든 안심하게 할 만큼의 소리를 낼 정도로 생명의 힘으로 충전되어 있는가?' '나는 얼마나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러한 성찰이 자신의 가슴의 우물의 깊이를 확인시켜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일갈이 환기된다. 그 일갈에 경각심이 든다면, "가슴"의 우물에는 생명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으로 깊어지며 높아져야 한다.
잠언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고 가르친다. 가슴의 우물이 생명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면 사람을 살리게 된다. 그 생각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5).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에 분노를 품으면 분노의 파열음이, 상처를 품으면 상처의 비명이 들리게 된다. 이처럼 돌멩이들만 담고 있다면 파열음이 들릴 것이고 물이 담겨 있다면 "풍덩"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가 생명의 힘을 전한다.
마음에 생명의 힘을 품었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거론할 수 있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으로서 거대한 부와 많은 가솔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거주하던 블레셋 지역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번창하는 것을 시기했다. 그래서 그가 우물을 파면 시비를 걸어서 우물을 메워버리거나 빼앗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과 대결하여 그 우물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비가 발생할 때마다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다 우물을 팠다. 에섹("다툼")과 싯나("대적함")의 우물을 그들에게 넘겼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르호봇("장소가 넓음")의 우물을 파게 됐다. 그때 그는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세기 26:22)고 말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시비가 발생할 때마다 가슴의 우물에다 돌멩이를 던지며 스스로 생명의 힘을 가늠했을 수 있다. 그 결과, 그가 양보한 우물들은 그 지역 주민들의 생명의 젖줄이 되었고 그도 또한 넓은 우물을 얻게 되었다. 그는 대적들에게까지 "풍덩" 소리를 들려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