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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묵상] 다음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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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멀잖아 북악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 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 <다음>,

이 절대 불가항력을

나는 내 것이라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변하여

나의 희망은

노도(怒濤)보다도 바다의 전부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눈 오는 날의 서울 거리는

나의 세계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시인(1930-1993)은 희망의 정수를 체험했다. 그의 시가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그는 인생에서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날리는 겨울을 겪었다. 그 겨울의 냉혹함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겨울이 온다"는 말은 위기와 공포를 예고하는 듯 들린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두려움 없이 성큼 겨울 너머의 세계에 들어서 있다. 그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이미 봄을 살고 있다. "그날, 눈 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 상상은 그저 백일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봄이 시간과 공간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상상 속에서 봄은 "<다음>," "희망," "나의 세계"로 구체화된다.

시인에게 그 겨울은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 치하의 감옥을 연상시킨다. 그는 동백림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었다. 얼음 같은 감방에서 전기고문을 당하며 인생의 겨울을 체험했다. 그 겨울에 바람과 눈은 죽음의 전령이었다. 그 일이 서울에서 벌어졌으므로 마침 겨울과 각운이 맞아서 사실상 서울과 겨울은 동의어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죽음 같은 현실의 담을 넘는 상상의 습관을 만들었다. 물론, 상상은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현실은 오히려 그가 빈약한 허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상상은 그에게 <다음>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다음>은 그의 희망이 사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 <다음>은 뒤로 미루어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는 다른 내일의 세계이다. 겨울 속의 봄인 것이다. 그는 이 시공간을 "절대 불가항력"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내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상 확보했다.

이런 믿음은 비록 눈으로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에서 미끄러지기도 하는 "느린 걸음"처럼 더디게 실현될 것이지만, "불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느낌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에 대해 체험적 증거가 있다. 확신에 찬 선언을 한 셈이다. 왜냐하면, "나의 희망은/ 노도(怒濤)보다도 바다의 전부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희망이 "불보다 더 뜨거운 것"의 질감과 "더 무거운 무게"의 비중을 지닌 실체의 힘으로써 바람과 눈과 노도와 바다를 <다음>의 건너편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희망의 무게에 비긴다면 고문의 기억과 노도 같은 일상의 고역은 가볍고도 경솔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겨울 같은 현실이 찬바람과 눈, 그리고 노도나 바다처럼 닥치더라도 봄의 희망은 겨울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에는 <다음>이자 미래의 '세계'가 실려 있는 것이다. 그는 희망의 무게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시 <귀천(歸天)>에서 이 세상에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자신의 삶을 "소풍"이었다고 회고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에게는 <다음>이 늘 현존했다. 그래서 그는 겨울에도 봄을 살아냈다.

시인은 우리가 눈앞의 고초와 실패에 집중하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가르침을 일러주고 있다. 눈앞에 고초가 닥칠 때는 오히려 <다음>을 기정사실로 설정하고 그 세계에서 살아갈 때, 바람과 눈과 노도와 바다도 넘어갈 수 있다! 비록 <다음>은 현재에는 없는 세계이지만, 현실에 <다음>을 현재화하려는 의지가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희망의 시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는 희망이 가히 절대적인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체험했고, 그렇게 살았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11:1-2). 이 정의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정사실화(assurance, 'set under' control, 즉 "실상"은 확보의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보이는) "증거"(conviction, proof)를 제시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서는 믿음의 선배들이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기대와 실현태를 동일시하려는 체험적 행위이다. 믿기 위해서는 기대와 실현태를 동일시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 의지는 체험으로 강화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실 것이라는 기대와 실제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동일시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의해서 강화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다음>의 세계를 현실화하는 일이다. 우리가 현실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게 되면, 그것은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덮친 것 같은 우리네 삶의 거리에 희망의 진중한 무게를 실은 발자국을 찍어 그 영역을 확인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다음>은 삶의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는 표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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