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목에 대하여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시인(1962- )은 부모와 이웃의 숨겨진 덕을 기리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덕행을 읊고 있지는 않으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를 "싹 틔우고 꽃 피우[게]" 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들이 버팀목이 되어주었기에 삶이 지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상은 그가 어쩌면 버팀목을 간절히 바라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암시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러한 음덕(陰德)을 말할 때 조상의 음덕(蔭德)을 연상할 수 있지만, 후자가 추상적인 소망을 가리키는 반면에, 부모와 이웃의 존재는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만져 보면 ... 만져지[는]" 체험의 영역에 속한다. 화자인 시인은 그들의 존재를 실제로 느끼고 있다. 시어가 경어체인 점은 그들로 인해 생명이 지속됨에 대한 경모의 마음을 전한다.
그가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얼마 전 태풍 때문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던 기억 때문이다. 태풍과 같은 불의의 타격은 인생의 의의를 성찰하게 한다. 그 타격은 버팀목을 찾게 했고, 그 행위 자체가 삶을 지속하게 하는 원리를 대변한다. 그 버팀목에서 그는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다]"는 영감을 받았다. 나무와 버팀목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암시한다. 우리가 죽음에 기대어 삶을 이어간다는 성찰에 이른 것이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그가 말하는 "죽음에 빚진" 삶이란 무엇인가? 근원적으로 말해서, 죽음이 생명의 동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 세대의 희생으로 자식은 생장한다. 그러나 부모만이 아니라 이웃도 버팀목이 된다. 자연의 운행 원리 또한 그러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비록 죽고 사라지더라도 열매를 남긴다. 삶이란 죽음에 빚졌다고 해서 그 그늘에만 있지 않고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리[며]" 생명의 증거를 드러내는 것이다. 심지어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죽어버린 버팀목에게] 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버팀목이 "이윽고 삭아 없어지[는]" 것까지 목격한다. 이제는 버팀목이 없어도 혼자 서있고, "큰바람이 불어와도" 지난번처럼 쓰러져 눕지 않는다. 그렇다면 버팀목은 그 나무에 생명을 주었고 그 나무가 홀로 설 때까지 대신 산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이 지점에서 수월하게 생명을 예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부재하는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는]" 현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버팀목은 삭아 없어졌어도 그동안 그 버팀목이 버텨준 나무가 서있기 때문에 그 나무에 생명력을 준 것이다. 사실상 곁에서 대신 살아냈다. 그 과정에 그 나무에는 버팀목의 존재가 스며들었다. 이러한 성찰이 있었기에 화자는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그도 힘에 겨워 무거운 발걸음으로 허위허위 걷다가 아마도 버팀목에 기대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듯하다. 불현듯 아버지와 이웃이 그와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라는 나무가 태풍에 맞설 수 있도록 서게 한 아버지와 이웃이 비록 그 순간에는 부재하나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가 확인한 아버지와 이웃의 음덕이 자신의 삶의 버팀목이었다.
비록 그가 현재 버팀목을 염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의 결핍에 집중하지 않는다. 부모와 이웃의 버팀목을 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부재의 존재일 수 있음을 상기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도 미지의 시간에 미지의 대상을 위해 버팀목처럼 버티어주다가 "삭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누군가"의 삶 속에 스며들게 된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누구라도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만져지게 될 것이다. 그 버팀목이 생명의 지속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부재하는 존재의 실존이란 영적인 세계의 현상이다. 영적인 세계 속에서 교감하며 우리에게 음덕을 베푸는 존재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신명기 11:14) 창조 세계를 운행하면서 태풍에 쓰러진 인간도 일어서서 결국 그 태풍에 맞설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 과정에서 그분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도 사실상 자신이 돕는 존재를 대신해서 사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고, 그 과업은 결국 우리의 영적 생명을 대신 살아내신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므로]"(로마서 8:34) 우리를 대신해서 살고 계신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버팀목이 되신다(로마서 8:26-27). 그 버팀목을 만질 수 있을 때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