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백창우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뭐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나 가벼워질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사는 게 고단하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한다

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시인(1960- )은 이 시에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을 패러디한 제목을 붙였다. 이 시가 실린 시집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1996, 신어림)의 제목도 소설이 다루는 영원회귀의 주제를 암시한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관습, 전통, 도덕, 책임 등의 무거움과 자유, 방종, 탈출, 허용 등의 가벼움을 각각 대변한다. 그리고 그들의 무거움은 가벼움으로, 가벼움은 무거움으로 기울어진다. 즉, 자유를 누리며 방종하기까지 하지만 결국 무의미와 공허만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되고자 관습과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는 하나 그것의 무거움이 욕망을 통제하고 죄책감을 심어주기 때문에 다시 탈출을 도모하게 된다. 이런 회귀는 끝이 없어서 마치 운명의 굴레와도 같다. 시인은 영원회귀의 무거운 굴레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물론, 시집의 제목을 보건대, 그 가벼움도 참을 수 없는 순간을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화자는 인생을 무거운 짐으로서 경험한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정말"은 그의 간절한 마음을 대변하며, 그 가벼움의 상태가 승화적인 변신을 소원할 정도임을 예고한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나비와 딱새의 고운 깃털이 그 가벼움의 시각적 실현이다. 마치 중력의 인력조차 벗어난 듯 인생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가 느끼는 무거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가벼워질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것으로 보아 소유의 욕망이 존재를 무겁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부여잡고 있는 것들을 내다버리고 잊고자 한다. 그렇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기는 하나 "사는 게 고단하다"고 느끼고 있으므로 그 고단함을 벗어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무겁기 때문[에]" "내가 한 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한다." 사실상 세상살이가 그를 무겁게 만들었으므로 그 세상을 따라잡을 일은 아니나 세상이 앞서 달아날 정도로 그의 걸음이 느리다. "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극단으로까지 연장하는 이유이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서/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그 가벼움은 시각과 청각이 각 영역의 "길이 끝나는 데[서]" 공감각적으로 교합하는 듯한 지점에서야 얻을 수 있다. 그는 자유를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길이 끝나는 데"서 무거움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기는 해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끝이 다른 끝으로 이어질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그 끝은 무거움의 종말이기 때문에 의미의 종말이기도 하다. 사실상 그가 가벼움을 추구한 동기가 무거움 때문인데 그것의 끝이라면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모색의 의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미를 모색하며 다시 무거움을 지향하고, 또한 그 무거움이 힘겨워질 때, 즉 그 의미를 소유하고자 할 때, 그것을 못 견뎌 할 지점에서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고 다시 되뇔 것이다. 이 회귀는 영원하다. 공교롭게도, 이 과정은 의식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운명적 굴레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라 칭할 수 있다. 누구든 존재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을 때 가벼움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연쇄는 반대 방향으로도 이어진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연쇄적으로 치환되는 지점이 존재가 견딜 수 없는 순간이다. 이처럼 인간은 무거움이든 가벼움이든 한 가지 조건을 변함없이 지속하지 못한다. 굳이 무거움과 가벼움을 교차시키지 않더라도 그러한 존재의 불안정성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통해 이미 확인된 바이다. 누구도 이 불안정을 원하지 않으나 그러한 변화를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왜 그런가? 이는 본질적으로 "내 안에 뭐가 있기에[없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가벼운가]"에 대해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귀적 변화는 인간에게 불가지한 운명적인 짐과 같다. 인생을 고통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런 존재의 불안정성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과 쿤데라와 니체가 성찰한 영원회귀는 원초적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설정된 실존적 조건이다. 영원회귀의 개념을 기독교와 연결하는 것이 논리적 비약으로 여길 수 있으나 그 고리가 없지 않은 것이다. 죄가 범죄 이전의 존재적 항상성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 죄란 인간이 운명적 굴레를 스스로 떠맡으며 하나님과 절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절연이 존재적 불안정성의 원인이다.

인간은 죽을 때에라야 그 굴레를 벗을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죽으면 이 땅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인간에게 그 죄의 삯으로 생명을 요구하는 것은 존재의 의의 자체를 무시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명의 하나님은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예수로 성육신하신 뒤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죄과를 대속하셨다. 그후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이로써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적발하고 그 죄를, 즉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구원을 얻게 된다. 이 믿음이 운명적 굴레를 벗어날 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구원의 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이다. 현재 십자가 수난은 시간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수난에 실린 대속의 은혜를 믿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은혜를 믿지 않으면 여전히 운명적 조건 아래 살다가 결국 지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믿으면 그 짐을 파쇄하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불이 난 아파트에서 에어매트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 운명적 굴레 안에서는 탈출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바깥의 존재가 내미는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말씀하셨다. 운명의 굴레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상태를 벗어나려면 그 굴레 바깥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길밖에 없다. 믿음은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전환의 결단만이 운명적 순환을 그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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