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42:1-4, 빌립보서 2:5-11, 누가복음 2:1-7
설교문
오늘의 복음서를 보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다]"(누가복음 2:1) 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입니다.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가 암살당한 줄리어스 시저의 후계자로 지목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살, 약관의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오르고 올라,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을 '신'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의 탄생을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위로 올라가는 것, 상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낮아지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그것을 거스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신]"(빌립보서 2:6-8) 사건 말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는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가장 존엄하신 분이 황실의 요람(搖籃)이 아니라, 가축의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가장 거룩하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비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이사야 42:3)하는 그분은 하늘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치욕'이라 했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영광'이라 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그런데 육신을 입고 오시는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며]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이사야 40:3)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으로 모든 사람이 호적(戶籍)을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갈 때,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약혼자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갔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잉태했고,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6-7)라고 누가는 보도합니다.
여기서 '여관'이라는 번역은 의문을 낳습니다. 원어는 '카타루마'(κατάλυμα)인데, 돈을 받고 영업하는 여관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여관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판도크세이온'(πανδοχείον, 누가복음 10:34)입니다. 카타루마는 단순히 '숙소'라는 뜻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가정에는 방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족이 거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손님에게 내어주는 방입니다. '객실'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큰방은 온 가족이 함께 먹고, 자고, 기도하는 곳으로 '원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엔 가축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가축의 온기가 실내 온도를 덥히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축을 집 안에 두면 도둑을 대비하기도 쉬웠습니다. 당시 평범하고 소박한 집들은 이렇게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방문하는 여행자가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잉태했고 베들레헴에 당도했을 때 이미 만삭(滿朔)이었습니다. 정말로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 숙소의 가족들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문화에 익숙한 중동의 성서 해석자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아마 그 집의 남자 가족은 모두 객실로 가고, 큰방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내어주고 그 집의 여자 가족들이 모두 해산을 도왔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중동의 환대 문화에서 아기를 낳는 산모를 가축우리에 방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집의 가족은 자기들이 생활하던 주공간을 내어주었고, 그 안에 있던 구유 위에 아기 예수가 누우셨다는 것이 누가가 전하는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은 모노드라마가 아닙니다. 성탄은 일인극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협업입니다. 한밤중에 밖에서 양 떼를 목자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고]"(누가복음 2:12) 새 구주 탄생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라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별을 따라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습니다.(마태복음 2:1-11) 무엇보다 베들레헴의 어느 가정은 여행 중 출산이라는 위기 상황을 맞은 예수님의 가족에게 마음 문을 열고, 집 문을 열어서 배려와 환대 속에 메시아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차갑고 냄새나는 마구간에 내쳐진 마리아와 요셉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거기엔 하늘 높은 곳에서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립보서 2:7-8) 메시아를 영접하고 맞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좁은 집, 궁색한 살림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산모를 배려하고 한 생명의 탄생에 존중을 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환영 속에 아기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은 환대의 계절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정겨운 시간을 나누고, 이웃, 특히 나그네들에게 손을 내미는 절기입니다.
"우리 각자는 아기 예수를 위해 방을 내어줄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집] 주인과 같습니다."(Each of us is an [house]keeper who decides if there is room for Jesus) 해산할 날이 찬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여러분의 집 앞에 당도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위해 여러분의 방을 내어드릴 용의가 있으십니까? 낯선 나그네를 사랑으로 기꺼이 환대할 용의가 있으십니까? 성탄은 "빛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탄생하는 것"(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베들레헴 / 작고 / 추한 말구유를 / 허물치 않으시고 / 거기 나신 예수님[이] / 나의 작고 추한 / 마음 구유에 / 탄생 / 좌정하시[는]"(이용도, <마음 구유>) 것이 성탄입니다. 주님을 환대하고 이웃을 맞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일생 하루하루가 내 마음속에 사랑이신 주님이 날마다 태어나는 기쁨의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을 위해 / 하늘에서 내려오는 // 찰하고 아름다운 / 아기 에수여! // 지금 나의 몸 / 죄로 붉게 물들어 있고 // 지금 나의 가슴 / 사랑의 샘이 메말랐으니 // 가없이 여겨 / 한시바삐 나를 찾아오소서 // 나의 마음속에 / 들어오셔서 떠나지 마소서 // 나의 가슴속에서 날마다 / 사랑의 신으로 태어나소서 // 내 생의 하루하루가 성탄절이 되게 하소서."(정연복, <성탄절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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