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늦가을 화자는 국화 옆에서 그 꽃이 피기까지의 시간을 반추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에 서려 있는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소리와 무서리 그리고 자신의 불면의 밤을 떠올린다. 이러한 요인들이 눈앞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들이 그 꽃을 생장시켰다는 생물학적 증거는 없다. 그래서 그가 그 꽃에서 불교의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읽고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꽃 자체가 가진 직접적인 힘(因)과 위와 같은 간접적인 힘(緣)이 조합을 이루어 생명이 생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우주라는 거대한 범주를 전제하기 때문에 우주 안의 그 어떤 대상에게라도 적용이 가능하다. 현재 그가 국화를 "옆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실감하기가 다소 어려운 해석이다. 따라서 그러한 원리보다는 현상적이고 체험적인 상상력을 추정해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화자는 국화꽃으로부터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먹구름 속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이것들은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공교롭게도 모두 '울고' 있다. 이 울음소리들이 국화꽃을 피웠다고 본다면, 필히 이 소리들은 국화가 꽃을 피우기까지 내면에서 토해낸 소리의 반향일 것이다. 그 소리들이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상황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서리가 내리던 날 불면의 밤을 보냈던 기억도 환기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국화꽃에서 "내 누님"의 모습을 본다.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은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의 울음과 불면의 밤과 같은 "젊음의 뒤안길"로부터 "인제는 돌아[온]" 형상을 띠고 있다. 청각적 정보가 시각화되었다. 거울이 화자의 눈이라면, 그 눈에 인생은 젊은 시절의 울음이 현재의 원숙함을 이루어내는 과정으로 비친다. 그 꽃이 "한 송이"로서 대표성을 암시하듯이 "국화 옆에서" 그가 성찰하는 인생의 의미도 그러하다.
시인(1915-2000)은 이 시의 해설에서 국화꽃과 누님의 연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美)의 영상 ...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정일(靜逸)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 그는 화자를 통해서 울음 없는 성장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성찰을 들려준 셈이다. 화자가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는데]" 불면의 밤을 보낸 것도 "노오란 네 꽃잎"을 피우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밤은 이제 "아쉬움에 가슴 조이[는]" 순간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을 "그립[다]"고 여기며, 무서리같이 만물의 생장을 멈추게 만드는 힘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도 "노오란 네 꽃잎이 피[기를]" 기대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40대"라는 시간은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나이가 그보다 많건 적건 누구든 풍상을 이겨내고 원숙한 식견을 갖게 된 시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시인은 인생을 성찰할 대상으로서 왜 하필 국화를 선택했고, 거기에누님의 영상을 입힌 이유는 무엇인가? 국화는 예로부터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칭하며 절개 있는 선비의 표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가부장적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남성중심적 표상에다 "내 누님"의 모습을 씌웠으니 이것은 무슨 세계관의 변장인가? 아마도 이러한 시상(詩想)은 고통과 성장의 변증법적 과정이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인생의 원리임을 알려주려는 의도 때문일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소쩍새의 전설 같은 불운, 천둥과 같은 급작스러운 사태의 공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가슴 조이[며]" 운명이라 체념해야 했던 기억이 없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봄에 울었고 여름에도 울었다. 하지만 이제는 "노오란 네 꽃잎"을 피우게 되었다. 그 꽃잎은 인생이 원숙해지는 과정에 대한 대유(代喩)이다. 이 때문에 "내 누님"이라는 시어는 혈연적 친근감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유대감까지 암시한다. 그 친근함 속에서 소쩍새의 전설에 실린 슬픈 사연과 기가 질리게 만드는 천둥소리의 파괴적 힘과 불면의 밤에 엄습하는 조바심이 모두 녹아버린다. 그만한 원숙함을 내비치는 "내 누님같이 생긴 [그] 꽃"이 "내" 옆에 피었다.
신앙의 세계에도 겨울이 오기 전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며 울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시간이 개입한다. 믿음의 꽃을 피우는 과정에 우리는 태생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가해진 상처와 열등감 그리고 원한의 격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억울한 기억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로 인해 자신에게 가했던 압박들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해야 한다. 그리고 왜 나만 천둥 치는 벌판에 버려졌는지도 그분께 물어야 한다. 때로는 무서리같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밤잠을 설치면서 구원을 갈망하는 몸부림을 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울[어야]" 한다. 괴롭기는 해도 이렇게 '우는' 것이 우리가 과거의 죄로부터 "인제는 돌아와" 회개하는 일이다. 그것이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행동과 습관을 고치게 한다. 이로써 신앙이 원숙해진다. 과거의 기억과 삿된 습관을 고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 꽃이 핀다면 우리 안에는 "정일한 ... 미의 영상"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고의 과정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이사야 41:10). 그 과정 중에 우리는 고아처럼 내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고통을 이겨내도록 계획되어 있다. 결국, "내 누님" 옆에서 회한과 설움조차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혼자서 상처와 원한을 견디면서 (물론, 모두 이겨내지 못하면서) "가슴 조이던" 기억을 환기하는 비감스러운 원숙함과는 다르다. 그분과 함께 이룬 원숙함은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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