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위안부 피해자 앞에 고개 숙인 일본 성서학자 무라오카 다카미쓰 별세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촉구해 온 성서학자 무라오카 다카미쓰(村岡崇光) 네덜란드 레이던대 명예교수가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무라오카 교수는 지난해 12월 25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10일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88번째 생일을 맞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성경 히브리어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평가받는 그는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행동으로 책임을 실천한 지식인으로도 주목받아 왔다.

2015년 5월 27일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요집회에 참석해 길원옥 할머니 등 피해자들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뜻을 밝혔다. 당시 그는 "일본 국민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희생자의 상처를 악화시키는 정부의 태도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발표했다.

그가 역사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된 계기는 2000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가 됐던 네덜란드인 교사의 일기를 번역·출간하면서부터였다. '넬과 아이들에게 키스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일기에서 일본군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 표현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과 화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룬 저서를 잇달아 펴냈다.

2003년 레이던대에서 정년 퇴임한 뒤에는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 제국주의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여러 나라 대학과 신학교에서 매년 무보수로 강의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일본이 지닌 '영적인 빚'을 갚는 과정으로 여겼으며, 그 여정을 2016년 회고록 '나의 비아 돌로로사: 아시아에서의 일본 제국주의 흔적을 따라서'에 담았다.

193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교육대(현 쓰쿠바대)를 졸업하고 예루살렘 히브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 맨체스터대, 호주 멜버른대를 거쳐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네덜란드 레이던대에서 히브리어와 이스라엘 고대사를 가르쳤다.

대표 저서인 '성경 히브리어 문법'과 '70인역 성경 그리스어-영어 사전'은 전 세계 성서학자들이 참고하는 권위 있는 연구서로 꼽힌다. 2017년에는 영국학사원으로부터 성서학 분야 최고 권위의 버킷상을 수상했다.

무라오카 교수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일본 사회의 역사 수정주의 흐름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하며, 과거의 죄를 올바르게 인정하고 책임지는 태도가 진정한 애국이라고 강조해 왔다. 또한 한일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 국왕의 명확한 사과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현준 기자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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