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출 12:21-28, 요일 1:1-4, 요 20:24-29)
설교문
[73년의 세월 앞에 서서]
오늘 우리는 교회 창립 73주년 기념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73년의 역사를 만들어 오신 신앙의 선배들과 여기 계신 여러분께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 시대의 교회가 절망에 빠진 이들을 제대로 품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선배들은 새로운 구원의 방주를 함께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생활공동체를 지향한 신앙인들이 모여서 향린교회를 세웠습니다. 1층 향우실 맞은편 벽에 향린의 초기 모습을 잘 나타내는 사진들을 붙여 놓았는데, 그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신앙공동체가 이어져 온 것은 결코 사람의 힘만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 우리를 붙드셨고, 쓰셨고, 이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여는 찬송처럼 "이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이고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 깊은 은혜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지난 73년을 돌아보면 참 많은 사역들을 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료선교, 도시산업선교, 평화통일 선교, 인권 선교, 생태 환경 선교, 교회 개혁 선교, 분가 선교 등, 이 모든 것을 한 교회가 감당해 왔습니다. 우리의 이런 사역들이 우리 사회 안팎에, 그리고 한국 개신교계에 적잖은 선한 영향력을 끼쳐 온 것에 대해 한편으로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책임감을 안겨줍니다.
어제 김지목 목사님, 홍영진 장로님과 함께 모란공원에 가서 박영숙 권사님 13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박영숙 살림터"와 "한국여성재단"을 비롯해 각계 각처에서 활동하는 여성 단체 대표와 실무자들도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우리 향린교회에 고마워하시며 "우리 같은 사람들의 피난처요 보루"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에선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립 73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해야 하는 것은 바로 지난 세월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창립 73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영광과 성과에 머물러 안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세월을 터전 삼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새롭게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동양의 고전 《주역(周易)》에는 세상이 변하는 이치를 가리켜 '궁변통구(窮變通久)'라고 합니다. "막히면 바뀌어야 하고, 바뀌어야 소통의 길이 열리며, 소통의 길이 열려야 오래 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周易』 「繫辭傳」 下)는 뜻입니다. 73년의 역사도 제도화의 타성에 갇혀 막히면 길을 잃습니다. 73년의 향린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있는 고인 물은 무엇이며, 지금 우리가 새롭게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향린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오늘 저는 함께 읽은 세 본문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해보려고 합니다.
[네 손으로 양을 잡으라]
출애굽기 12장에서 모세는 히브리 백성 장로들을 모두 불러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들과 함께 먹을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여, 유월절 제물로 잡으십시오." 그리고 우슬초 묶음을 구하여다가 그릇에 받아 놓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은 애굽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하고 웅장한 열 가지 이적 중 마지막 이적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재앙을 행하시면서, 왜 히브리 백성들에게 직접 양이나 염소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이 유월절 예식을 신앙의 백성들과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지킬 규례로 만든 것일까요? 이전의 재앙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다 하실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히브리 백성이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백성이 잡아야 했던 그 양은 평범한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양, 특히 숫양은 애굽에서 창조신으로 섬겨지던 짐승이었습니다. 창조신 크눔(Khnum)은 나일강의 신이자 우주, 생명, 물, 죽은 자들의 수호신인데,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창조하고, 심지어 다른 신들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이었습니다. 태양신 라(Ra)의 저녁 발현 형태이자 제3의 형상으로 알려진 이 크눔 신의 머리는 언제나 숫양이나 염소였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400년 동안 그 신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이 장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짐승을 직접 손으로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 의례가 아니었습니다. 이웃 이집트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겠다." 이것은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자리였습니다. 용기를 요구하는 믿음, 위험을 감수하는 손이 필요했습니다.
출애굽 이전 히브리 백성들은 400년 동안 역사의 대상(object)에 머물렀습니다. 그저 명령받는 자, 늘 당하는 자였습니다. 히브리 백성은 오랫동안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해야 했고, 맞아도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밤, 그들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대신해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들이 직접 손을 내밀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그 손을 내미는 순간, 노예로 끌려가던 손이, 자유를 향해 움직이는 손이 된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강제 노동'과 '거룩한 예배'는 모두 '아보다(avodah)'라는 단어를 씁니다. 지난 400년 동안 히브리인들의 삶은 바로를 위한 비참한 '노동의 아보다'였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밤, 하나님은 그 예식을 통해 그들의 삶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실천의 아보다'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양을 잡고, 피를 바르고, 허리를 동여매고 서둘러 먹는 그 모든 위험한 행위가 바로 역사의 주체(subject)로 서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노예의 노동을 자유인의 예배로 바꾸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신학의 결정적 전환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되, 인간이 그 구원의 행위자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일을 이루시지만, 인간을 그 구원의 자리에서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해방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사랑의 흔적이 있는 자리에서만]
요한복음서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라고 말하자, 도마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우리는 오랫동안 도마를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도 의심 많은 사람을 "doubting Thomas"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오래된 편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는 새롭고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주목했다면, 요한복음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도자인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하는 물음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장들이 즐비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자기만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불렀고, 니고데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이라 했으며, 베드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한 유대인 남자로 알았다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이르게 되고,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에서 도마만이-오직 도마만이-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고백합니다.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예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인데, 바로 그 핵심 고백을 도마가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뿐만 아니라 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직접 부른 사람은 단 한 사람 도마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진정 무슨 뜻이었을까요? 도마는 왜 예수님의 손바닥 못 자국을 만지고 피와 물을 쏟으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야겠다고 말한 것일까요? 90년경 요한공동체는 유대 회당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로마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점점 조직화되고, 제도화되고, 경직되어 갔습니다. 예수 운동의 신선하고 세찬 바람은 시들어가고, 예수님의 놀라운 평등의 밥상공동체는 고린도 교회의 사건 이후 점점 형식화되어 갔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상황을 향해 말합니다. 경직된 제도와 조직 속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기는 어렵다고.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자유로운 영의 바람을 강조하였고, 경직된 성찬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어 주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도마가 보고 싶었던 것은 화려한 기적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일서는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지다'의 헬라어 '프셀라파오(ψηλαφάω)'는 어둠 속에서 상처를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를 계승하는 요한계 신앙공동체는 듣고 보고 만졌다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만졌다는 것은 바로 도마가 했던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도마의 그 말 속에는, 바로 이런 심정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더듬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했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곧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측은한 마음이 도마의 손끝에 있었습니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픈 상처- 사랑하기 때문에 입으실 수밖에 없었던 상처, 물과 피를 쏟은 옆구리-를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고통의 깊이를 만진 손에서 비로소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것은 구름 위의 관념이 아닙니다. 핏자국 선명한 상처를 직접 어루만진 손끝에서 터져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만나는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의 상처, 사랑의 흔적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도마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이자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국가의 공식 기념식이 열리고 제도가 정비되었지만, 그것만으로 5.18 정신의 진정한 부활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박해 속에서 제도화되고 경직되어 가던 요한공동체처럼, 오늘의 기념일이 형식화된 예전과 활자 속에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집어넣었듯, 우리는 오늘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광주의 상처와 유가족들의 무너진 마음과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앞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제도화된 기억 너머, 고통의 흔적을 직접 만지는 '촉각의 신앙'은 역사를 부활시킵니다. 향린교회의 73년 역시 그러했습니다. 관념 속에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전쟁 이후 이 땅의 백성들이 모두 겪어야 했던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아픔을 껴안고, 노동 현장의 손을 잡고, 군사독재에 맞서 거리에 나서고, 세월호 앞에서 함께 울고, 이태원 참사에 가슴을 치며,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몸으로 만진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숭고한 상처의 흔적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두 가지 거대한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첫째는 역시 기후재앙입니다. 봄인데 여름처럼 뜨거운 이 날씨가 그 신호입니다. 올해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를 벌써부터 걱정해야 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과학자들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까지 높아졌다고 경고합니다. 봄이 봄답지 않고, 여름이 점점 더 길고 뜨거워지는 현실을 우리는 몸소 겪고 있습니다. 기후재앙은 모두에게 오지만 그 고통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가장 깊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오래도록 외쳐온 정의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애굽의 문명이 노예의 노동과 착취 위에 세워졌듯이, 오늘의 소비 문명도 자연의 착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의 신을 자기들 손으로 잡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온 소비의 구조에 직접 손을 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기적으로 대신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 있는 동역자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누려온 소비의 방식, 편리함에 길들여진 습관, 자연을 함부로 써 온 삶의 구조에 이제는 직접 손을 대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두려운 손으로 그 짐승을 잡았을 때 자유가 시작되었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비 구조에 직접 손을 얹는 그 불편한 순간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유월절의 밤입니다.
둘째는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이 몰고 올 사회 양극화입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는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을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이라는 개념으로 불렀습니다. AI는 화려한 인터페이스(화면)는 가질 수 있어도, 고통으로 일그러진 '타자의 얼굴'은 가질 수 없습니다. AI는 사물은 물론 사람의 얼굴을 인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에 담긴 눈물의 사연과 무게를 함께 져 줄 수는 없습니다. AI는 고통의 데이터를 분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 곁에 앉아 "지금 얼마나 힘드십니까?" 하고 다정하게 물으며 공감하면서 함께 울 수는 없습니다. AI는 효율을 계산하지만, 사랑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알고리즘에 종속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는 사랑의 도구로서 AI를 사용할 때, 우리는 이 기술 문명 시대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설 수 있습니다.
도마가 내민 손은 데이터를 확인하는 손이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이었습니다. AI가 계산할 수 없는 그 자리,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몸으로 앉아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모양입니다.
기후재앙 앞에서, 인공지능이 가져올 문명사적 변혁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문명의 발전이 과연 인간 정신의 성숙을 가져왔는가?"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향린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는 바로 이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향린의 대표적 십자가는 예배실 정면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및 자기 십자가이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다짐입니다. 향린의 순례길에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인 통일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섯째 마당인 국악 예배에도 십자가 상징이 들어 있고, 일곱째 마당에도 향린의 엠블럼 속 십자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향린교회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로 나갑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를 제대로 지기 위해서 저는 우리가 두 가지를 매우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연과학적 합리성과 그동안 자연과학자들이 발견해 온 통찰의 구조입니다. 매우 깊은 지성적 회심과 노력 없이는 진정한 영성의 바다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래된 책 하나를 꺼내서 볼 마음이 있습니다. 버나드 로너간 교수의 『통찰』이라는 책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의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세계화된 오늘날, 동서양의 모든 종교 전통의 지혜와 문화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흐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더 깊고 넓게 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와 신학뿐 아니라 동서양의 지혜, 인문학과 자연과학에도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하나의 문명권 안에만 머물러서는 오늘 인류가 마주한 문제를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동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훨씬 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지난 오천년의 역사 속에서 밖으로부터 전해진 불교와 유교를 우리 역사 속에서 소화해 내고, 그것으로 정치·사회·경제 각 영역에서 문명을 일군 경험이 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그리스도교까지 받아들였습니다. 인류 정신의 수레바퀴를 굴려 온 위대한 스승들의 지혜를 우리가 잘 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가치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인류의 지혜와 연대하면서 이 세계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향린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입니다.
경계 너머로 손을 내미는 것은 신앙을 잃는 일이 아닙니다. 도마가 상처에 손을 넣었을 때 비로소 더 깊은 고백에 이르렀듯이, 우리가 다른 전통의 지혜에 겸손히 손을 내밀 때, 우리의 신앙은 오히려 더 넓고 깊어질 것입니다.
유월절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은 자녀들이 묻는 대목입니다. "이 예식이 무엇을 뜻합니까?" 신앙은 다음 세대가 물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살아 있습니다. 설명되지 않는 신앙, 삶으로 전해지지 않는 신앙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금 져야 할 십자가 중 하나는, 다음 세대에게 향린의 신앙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73년의 자부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역의 지혜처럼, 막힌 곳을 뚫어내는 '변(變)'이 있어야 다음 세대로 '통(通)'하고 역사 속에서 '구(久)', 즉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자부심이 오늘 기후위기와 AI 시대의 고통을 치유하는 살아 있는 언어로, 살아 있는 실천으로 변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유월절 밤, 히브리 부모들이 두려운 손으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은 자녀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자녀가 '이 예식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 손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세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향린의 73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과제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유월절 밤 히브리 백성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온 애굽이 그 짐승을 신으로 섬기는 가운데, 직접 그 짐승을 잡아 피를 바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손을 내민 자들에게 자유가 왔습니다. 도마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경직된 공동체, 제도화된 교회 속에서 "나는 그 상처를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자리였겠습니까? 그러나 그 손을 내밀어 못 자국에 넣었을 때, 그의 입에서 그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 고백은 관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만진 손에서 나왔습니다. 사랑 때문에 생겨난 흔적에 직접 손을 대어 본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향린교회 73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픔의 현장에 직접 손을 대어 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재의 현장에서, 노동자의 투쟁 현장에서, 세월호 앞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손을 대어 본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이어왔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새로운 상처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기후재앙으로 고통받는 생명의 자리, AI 시대에 밀려나고 소외되는 이들의 자리, 여전히 아물지 않은 분단의 자리, 그리고 종교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함께 배워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들 앞에서 다시 손을 내미는 공동체가 될 때, 향린은 또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향린이 앞으로 져야 할 십자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짐이기 전에 사랑의 무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함께 그 사랑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다짐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난 73년의 역사처럼 앞으로도 향린을 붙드시고, 쓰시고, 이끄실 줄 믿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길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예수의 몸과 맘,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입니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생명의 숨결로 사십시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문 밖으로, 낮은 자리로,
새 하늘 새 땅으로 나아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