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 1:4-8, 디모데전서 4:9-13, 누가복음 7:11-16
설교문
오늘 우리는 청년주일을 맞아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드립니다. 청년주일은 단순히 젊은 사람들을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날만도 아닙니다. 청년주일은 하나님께서 청년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를 함께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흔히 청년을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더 해야 하고, 경험을 더 쌓아야 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때가 되면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서에서 청년은 "언젠가 쓰일 사람"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청년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실 때 가장 먼저 부르시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펼쳐 보면 하나님은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젊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 두려움과 질문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청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존재입니다.
사무엘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제사장 엘리 곁에서 성전을 돌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세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제야 엘리가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부르시거든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마침내 사무엘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장면은 신앙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신앙은 모든 답을 알고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청년기는 질문이 많은 시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러한 질문은 혼란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리 만무합니다. 세상은 확신 있는 사람만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보다 듣고자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청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답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인생의 방향을 바꿉니다.
둘째로, 청년은 부족함 속에서도 부름을 받는 존재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1:5). 그러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 얼마나 솔직한 고백입니까. 그는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경험도 없었으며,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오늘의 청년들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제 실력이 부족합니다." "남들보다 뒤처졌습니다." "미래가 불안합니다."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7-8). 이 말씀은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뒤에 그 사람을 빚어 가십니다.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도 주저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출애굽기 4:10, 새번역)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사사기 6:15, 새번역). 천사가 마리아에게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누가복음 1:31, 새번역)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완성도가 아니라 우리의 응답입니다.
셋째로, 청년은 꿈과 이상을 보는 존재입니다. 구약성서의 선지자 요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요엘 2:28).
그러므로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즈요노트'(חֶזְיֹנוֹת)입니다. "환상들", "비전들", "계시들"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동사 '하자'(חָזָה)에서 유래했는데, 그 기본 의미는 "보다"입니다. 하지만 이 동사는 단순히 눈으로 사물을 보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미래를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찰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개인적인 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미래의 모습,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과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젊은이들은 현실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세상을 미리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내다보고, 그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청년은 그 미래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청년들에게 현실에 적응하라고 말합니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청년은 단지 생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됩니다. 전쟁 없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 착취 없는 세상,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는 공동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됩니다.
넷째로, 청년은 "나중에 중요한 사람이 될 사람"이 아니라 지금 중요하고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청년은 공동체의 현재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을 이어 갈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디모데전서 4:12-13). 이 말씀은 청년에게는 자신감을 주고, 기성세대에게는 책임을 요구합니다.
청년은 "나중에 중요한 사람이 될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가정과 사회와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청년을 주변에 머물게 하지 말고 중심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청년의 질문을 듣고, 청년의 언어를 존중하며, 청년과 함께 내일이 아니라 오늘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세워 가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렇듯 청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존재입니다. 부족함 속에서도 부름을 받는 존재입니다. 꿈과 이상을 보는 존재입니다. "나중에 중요한 사람이 될 사람"이 아니라 지금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년들이 지금 아픕니다. 지금 외롭습니다. 지금 너무 힘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라는 단어는 설렘보다 외로움과 불안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N포 세대", "취업 절벽", "고립된 청년"과 같은 단어들이 우리 청년들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실로 오늘의 청년들은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불안정한 일자리, 높은 주거비, 치열한 경쟁, 관계의 단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래서 열심히 살아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도 뜻이 있습니까?" "제가 정말 필요한 사람입니까?" "저를 통해서도 무엇인가 하실 수 있습니까?"
청년들을 꽃에 비유한다면, 어느 꽃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저는 청년들을 수선화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선화는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봄꽃입니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땅을 뚫고 올라와 맑고 밝은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수선화는 오래전부터 새로운 시작과 희망, 부활과 갱신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겨울을 견디어 낸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수선화는 청년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청년은 생명력을 품고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에는 세상을 새롭게 할 힘과 꿈이 자라고 있습니다. 차가운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고자 애쓰는 청년의 모습은 꼭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수선화와 같습니다.
신앙적으로 수선화는 하나님께서 죽음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생명을 준비하시고, 마침내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하신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시간, 기다림과 방황의 순간조차도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성장의 과정이 됩니다. 그래서 수선화는 청년들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지금 네가 아직 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너를 자라게 하고 계신다. 때가 되면 너는 반드시 너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심으신 한 송이 수선화처럼 희망의 계절을 가장 먼저 알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외롭고 힘들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때론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느 시인이 수선화 앞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라 /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정호승, 「수선화에게」)
꽃을 바라보십시오.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도 방황하지 않습니다. 꽃은 꽃을 피우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피어난 그대로 열심히 삽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수선화와 같은 이런 청년들을 새벽 이슬과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시편 110편 3절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팔레스티나의 광야와 같은 기후에서 '새벽 이슬'은 생존을 위한 생명수입니다. 메마른 광야에 생명이 살 수 있는 이유는 낮과 밤의 기온 차이로 생긴 이슬 때문입니다. 이슬은 비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수분이 밤의 냉기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람이 잔잔하고 하늘이 맑은 밤일수록 이슬이 많이 맺힙니다. 그래서 새벽녘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어둠과 침묵의 시간을 지나 탄생한 작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성서는 우리의 청년이 바로 이 새벽 이슬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메마른 시대에 우리 청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생명수와 같습니다. 보십시오. 성서가 그리는 청년은 단순히 나이가 젊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슬로 적셔져 있고,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현재가 지금 메마른 광야와 같을지라도 여러분은 그곳을 푸른 에덴으로 바꿀 새벽 이슬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청년들에게 성서는 몇 가지 중요한 권면의 말씀을 전합니다. 먼저 전도서 12장 1~2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또 어느 시편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편 37:4-6).
다른 시편 기자는 이렇게 청년들에게 권면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편 119:9-10). 이 말씀들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청년주일은 청년들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의 말씀은 모든 세대가 함께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기성세대는 청년에게 조언만 하기보다 경청해야 합니다. 평가하기보다 신뢰해야 합니다. 통제하기보다 동행해야 합니다. 기다리게 하기보다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청년을 동역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시편 110:3)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실패한 세대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세대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세대이며, 꿈과 이상(비전)을 보도록 부름을 받은 세대입니다.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14).
청년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은 아직 덜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비전을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공동체의 현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도록 부르신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예레미야 1:5).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레미야처럼 "나는 아이입니다"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담대히 응답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종이 듣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 이슬과 같은 우리 청년들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세상을 변혁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