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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틸리히]Paul Tillich의 문화신학: ‘궁극적 관심’을 중심으로


                                                       김경재(한신대, 신학)

 


[1] 들어가는 말


20세기의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Paul Tillich(1886-1965)의  문화신학 틀 안에서 대중에게도 널리 회자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그의 독특한 종교적 실재체험의 현상학적 개념을 고찰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주제를 보다 명료하게 밝혀보기 위해서는 세가지 단계를 밟아야 한다. 첫째는 위 주제가 탄생하는 배경으로서 틸리히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간략하게나마 고찰하겠다. 둘째는 1920년대에 청년학자로서 베르린 칸트철학학회에서 발표한(1919년 4월16일) 그의  학자로서의 데뷔 강연이랄 수 있는 “문화신학의 이념에 대하여” 논문에서 첨 모습을 드러낸 그의 문화신학의 개념이 1920년대 전후 격동하던 유럽사회의 정치․사회․문화의 근저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출산된 일종의 포스트모던적 사상임을 음미해야 하겠다. 셋째로 그러한  예비적 고찰 후에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이 함의하는 바의 다양한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2] ‘경계 선상에 선’ 폴 틸리히의 ‘삶의 자리’


틸리히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살필 필요는 없겠다. 그는 자신의 실존적 삶과 자신의 생애가 짊어지고 감내해야 했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해 “경계선 위의 상황에서”( On the boundary situation)라는 어휘를  상징적으로 즐겨 썼다. 사실 그렇다.

 틸리히는 부르죠아적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여 붕괴되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국가사회주의와 러시아 볼쉐비키 혁명기에  감수성 깊은 그의 청년 시기를 지냈다.  ‘인간의 자유’를 담보한다는 명분아래 현실적으로 노동자와 노동과정과 인간의 사회적 삶 전과정을 상품화시키고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적 삶의 존재방식을 틸리히는 저항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평등과 정의’이름으로 등장하는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광기적 집단주의의 허구를 거부하고, 청년 틸리히는 아직 동트지 않은 카이로스적 신률적 사회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면서 1920년대 ‘종교사회주의운동’에 몰입하였다.

 만약 틸리히가 힛틀러 정권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교수직에서 해임당한 후  미국 신대륙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로 옮겨 정착하지 않고, 그대로 유럽 지성사회 속에서 그의 생애를  학문활동으로 보냈더라면, 2차대전이후 냉전체제 전후,  맑스․레닌적 사회주의 이념운동과 그리스도교적인 자유주의 이념운동 경계선상에 서서, 프랑크푸르트 비판철학의 대부로서 보다  창조적인 ‘정치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틸리히는 1차대전을 전쟁터에서 한 군목으로 겪으면서(1914.10-1918.8), 사병들이 죽어가는 참호 속에서  니체의 책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유럽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몸으로 느꼈다. 본래의 ‘갈릴리 복음’의 모습과는 관계없이 서구역사 1900동안 형성되어 왔고 특히 지난 300년간 근세 서구사회의 이념적 틀이었던 이성적․합리적 세계관, 진보적․낙관적 역사관, 인격적․초월적 신관, 관념론적․의식(意識)의 철학,  인간의 내재적 종교성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 등등 그 모든 것의 붕괴를 철저하게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20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 하는 포스트모던니즘의 큰 물줄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틸리히의 사상사적 삶의 자리는 크게보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니즘의 ‘경계선상에 선’ 사람으로서 그의 고뇌와 열망을 정직하고 용기있게 신학적 장르에서 펼쳐간 사람이었다. 틸리히의  신학형성의 사상사적 배경은 고전철학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 어거스틴- 야곱뵈메-마틴루터-슈라이에르맛허-니체- 쉘링으로 이어져 오는 존재신비주의와 의지의 철학 계열이 있다. 그러나 보다 가깝게는  키엘케골의 실존주의-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의심의 해석학- 칼 융과 루돌프 오토의 비합리적 ‘성스러운 것’(Das Heilige)의 심층심리학-표현주의 미술화풍의 상징예술- 베르그송과 떼이야르샤르뎅의 진화론적 생의 철학- 멀치아 엘리아데와 불교 선승들과의 만남에서 얻은 종교신학등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이라는 화두의 사상적 메트릭스요 직간접적인 삶의 자리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틸리히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살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만 틸리히 또한 시대의 아들로서  그의 종교사상은 구체적인 그의 시대의 ‘삶의자리’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의 문화신학이론과 ‘궁극적 관심’이라는 화두 또한 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틸리히는 ‘경계선 상에서’ 사유하고 증언하고 행동한 사람이었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험론과 합리론, 존재우위의 플라톤철학과 생성 우위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계시, 아퀴나스와 마이스터 엑하르트, 초월과 내재, 종교와 문학예술, 기독교와 불교, 신학과 종교학, 로고스적 형태성과 파토스적 역동성, 자유와 운명(destiny)등등 그 경계선상에서, 그 양자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중성적 야합이거나 양비 양시론적 타협이 아닌 역설적 통전을 추구했던 신학자였다.    


[3]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에서 종교와 문화의 관계


우리의 주제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이 말하려는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문화신학’(Theology of Culture)을 지탱하는 두가지 기본명제를 기억해야 한다.

그 두가지 중 제1명제는  틸리히가  인간의 정신적․영적 삶 속에서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요.  제2 명제는 첫명제의 자연스런 논리적 연장 이지만 ‘종교’와 ‘문화’와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제1명제: “종교란 인간 정신적 삶의 한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정신적 삶의 제반기능들 속의 깊이의 차원이다”1) (Religion is not a special function of man's spiritual life, but it is  the dimension of depth in all of its functions)


위의 짧은 명제는 폴 틸리히가 자신의  문화신학 이론을 펼쳐나가는 기본 출발점이다. 이 명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종교’에 대한 세가지 부류의 잘못된 접근태도를 비판하고 틸리히가 새로운 종교이해의 접근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통속적 세가지 종교에 대한 접근태도는 전통적인 초자연주의 종교이해, 자연주의적 종교이해, 기능주의적 종교이해를 말한다.

 초자연주의적 종교이해 태도는 기본적으로 종교란 일상적 삶의 차원과는 직접관계가 없는 초자연적 ‘신적 실재들’이나 초경험적 신비체험에 관련되는 것이며, 초이성적 특수계시에 근거하거나 일상적 ‘분별지’상태를 넘어선 참지헤(프라쥬나) 상태의 일거리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죄, 죽음, 사후세계, 천국, 극락왕생, 환생, 심령술, 신유치료등에 일차적 관심을 갖는다. 그야말로 종교를 정신적 삶의  한 ‘특수기능’을 감당하는 영역이라고 본다.

 자연주의적 종교이해는 종교를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박고있는 ‘종교성’의 자연스런 발로라고 파악하는 심리학적․인본주의적 종교이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종교인’(Homo Religius)이라고 본다. 굳이 초월적 계시나 초이성적인 탈아상태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정신적 삶 속에 ‘진․선․미’라는 세가지 범주의 삶의 경험이 있듯이 거기에 추가하여 ‘성(聖)’의 영역이라는 별다른 차원이 필요한 것이며, 그 ‘성스러움’의 영역과 체험은 매우 독특하고 비일상적인 것이기에 ‘종교’는 삶의 한 특수 기능을 담당하고 포괄하기 위해 요청된다는 입장이다.

 기능주의적 종교이해는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의 존재여부나 그 진위성 여부를 떠나서, 인간 사회 속에서 종교가 기능하는 현실적인 기능을 주목하는 종교사회학적 접근태도이다. 종교는 한 사회 속에서 순기능과 역기능을 모두 노출 시키는 양가적 사회현상이라고 본다. 종교는 집단적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적 행위를   절제, 양보, 자기헌신, 자기희생등의 덕목을 가르침으로서 사회정화기능과 사회적 윤리를 고양시키는 순기능을 갖든지, 맑스의 종교비판처럼 인간을 근원적으로 소외시키는 ‘아편’같은 상부구조를 이룬다고 본다. 이 경우에도 종교는 이간 정신적 삶의 사회적 현상에서 나타난 한 특수기능으로 파악된다.

 폴 틸리히는 위와 같은 종교이해를 모두 비판하고, 종교란 인간이 정신적 삶을 수행하고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창조하고 자기초월하려는 모든 형태의 정신적 삶의 한 복판 속에서 경험하는 ‘깊이의 차원’이라고 본다. ‘깊이의 차원’ 이란 ‘높이의 차원’에 대비되는 공간적 은유이다. 신학, 종교학, 종교심리학, 종교사회학등 전문적인 학문분야가 있지만, 종교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그 근저를 묻고, 뿌리를 밝히며, 전공학문의 ‘원리의 원리’ 곧 그 이론과 체험의 존재론적 근거를 추구할 때 부딪히는 인간정신의 ‘자기초월의 경험’이 일어나는 곳에 종교는 숨쉬고 살아있다. 그러므로 틸리히의 종교이해는 매우 현상학적 접근태도를 견지한다고 보여진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드, 싸르트르가 종교를 부정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종교가 부정되거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들의 그 진지한 ‘비판정신’과 ‘의심의 해석학’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틸리히가 볼 때는 매우 ‘종교적’인 것이다. 그들 모두가 기존의 ‘궁극적인 것’일 수 없는 것들이 ‘궁극적인 자리’를 점유하고 인간의 삶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분노, 비판,폭로, 저항등을 통해 ‘거룩한 분노’를 발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은 기존의 어떤 형태의 종교적 양식을 거절 할 뿐이지, 그 무엇인가의 진실과 리얼리티를 증언하려는 열망으로 가득차있다. 그들의 그 열망은 제도적 종교나 일상성에 가리워져 있는 삶의  ‘깊이의 차원’을 문득 드러내 보인다.

  틸리히에 의하면 모든 존재하는것들, 특히 생명 있는 것들은 동일하게 세가지 운동을 한다. 자기를 둘러싸면서 자기를 구성하는 것들로 부터 자기자신을 구별하고 자기자신이  구체적 존재자로서 개별성을 확보하려는 중심지향적인 ‘생명의 자기통전운동’(self-integration movement of life)이 첫째운동이다.

  이 ‘자기통전운동’이 없으면 존재자들은 미분화된 존재의 바다 속으로 환원되어버리고 구체적 ‘존재자’는 물처럼 쏟아져지고 썩은 여름 과일처럼 그 조직체가 풀어져 버린다. 뭇생명체들 중에서 ‘자기통전’이 가장 영글어진 형태로 나타난 것을 ‘인간 인격성 체험’이라 부르고 모든 도덕성의 기점이 된다. 양심의 가책인란 인격의 자기통전성이 깨어지는 아픔이요 설음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실천이성으로서의 인간의 도덕감이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다가오는 것은 타계적 유일신이 내려준 십계명을 어긴 반규범적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의 자기통전 운동’의 결과물로서 형성된 고유하고 존엄한  인격의 통전성을 스스로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들의 둘째운동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창출하려는 ‘생명의 자기창조운동’(self-creation movemet of life)이다. 뭇 생명체들중 인간 생명차원에 이르러 이 ‘생명의 자기창조운동’은 문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존재하는 것들의 셋째운동은 동일한 것의 반복동작이 아니라, 비약하려는 ‘생명의 자기초월운동’(self-transcendence movement)이다. 뭇생명체들중 인간생명단계에 이르러 이 ‘생명의 자기초월운동’은  종교현상으로 나타난다.2)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의 다야한 삶의 양태들은 결국 틸리히의 조직신학적 범주로 말하면 ‘생명의 자기통전’, ‘생명의 자기창조’, ‘생명의 자기초월’ 운동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꿈틀거림인데, 그 모든 운동의 깊이의 차원이 ‘종교’의 지성소이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란 삶의 특수기능이 아니고 모든 정신적 삶기능의 깊이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제2명제: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3)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의 입장을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위의 명제는 그의 문화신학 담론의 기초에 놓여진 둘째명제이다. 명제라기보다는, 비유컨대 그 두가지 명제는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이라는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두 기둥과 같아서, 만약 그 두기둥이 무너지면 틸리히의 문화신학은 지탱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 둘째 명제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학적  명제이다. 왜냐하면, 인간사회가 근현대처럼 점점 더 세속화(secularization) 되어가고, 종교는 삶의 변두리 문제로 밀려나거나 개인의 내면적 사적 관심거리로 치부되어가고, 현실을 지배하는 힘은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부의 힘과 성적욕망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그의 문화신학 둘째명제는 종교가 사회의 모든 부문을 총체적으로 영향끼쳤던 중세사회에 대한 노스탈쟈 같이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명제는 종교에 대한 틸리히의 첫째명제를 생각한다면 그런 오해는 금방 살아진다. 한 사회의 삶의 축이 성전이나 마을중심의 교회당이 되거나, 불법승 (佛法僧)삼보(三寶)에 귀의하는 축적된 종교전통과 종교적 상징체계와 종교제도를 중심으로 영위되는 그런 의미의 중세적 종교사회의 실현을 염두에 두고 하는 제2명제가 아니다. 설혹 모든 교회당이나 법당이 살아지고, 기존의 종교제도나 상징체계나 성직 질서나 신학이론이 실질 가치를 상실한 유가증권처럼 휴지처럼 폐기처분 될지라도, 종교가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정신적 삶의 제반 영역의 ‘깊이의 차원’으로 이해되는 한, 여전히 모든 인간문화활동의 실체(substance)는 종교이고, 그 ‘실체’가 유형․무형의 형식과 형태로 표출되고 나타난 것이 ‘문화’라는 것이다.

 위 둘째명제에서 ‘실체’(substance)라는 철학적 개념은 좀더 평이한 말로서 얼, 정신, 혼, 알짬, 궁극적 관심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형식’(form)이라는 어휘도 양태(mode), 형태, 드러난 모습, 구현된 결과, 게슈탈트(Gestalt)라는 의미와 멀지 않을 것이다. 특정시기 특정 공간의 인간집단을 지배하는 문화적 ‘실체’는 고려조나 조선조의 경우처럼 단일종교로서 불교나 유교가 지향하는바 처럼 매우 정신적이고 관념적이고 윤리적일수도 있으나, 20세기 사회에서처럼 다중심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감각적이고, 다원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다. 한 문화공동체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관심’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거기에 상응하는 법률․정치제도, 과학․기술의 발달, 경제생활의 생산소비패턴과 금융제도, 문예활동과 대학의 아카데미즘의 형태가 영향을 받게 된다.

 줄여말하면, 틸리히의 문화신학 지론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밑 바탕에는 그 시대 문화를 형성해가며 삶을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궁극적 관심’이 때로는 은폐된 형태로, 때로는 지극히 세속적 형태로, 때로는 마성적으로 왜곡되고 굴절된 형태로, 때로는 지극히 반종교적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러한 궁극적․준궁극적  관심들은 문화의 ‘실체’로서 그 사회의 삶의 질과 내용을 결정짓는다.

 만약 마르쿠제가 말하는바 대로 현대 산업사회, 후기산업사회, 혹은 정보화사회가 평면적이고도 일차원적 인간집단을 양산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근현대사회가 삶의 능률성, 실용성, 편의성, 합리성, 감각적 욕망충족성을 문화활동의 가치지향성으로 삼기 때문에 나타난 당연한 결과이다. 거기엔 삶의 숭고함, 자기초월 체험, 정신의 승화, 자유로운 희열, 만유동체의 우주적 일체감,  영성의 고양감 같은 것이 없거나 지극히 미약하다. 삶은 파편화되고, 소외감에 시달리며, 집단과 조직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의 메카니즘에 예속된 ‘하찮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시달린다.

  틸리히의 문화신학 지론에 의하면,  현대는 무종교 시대가 아니라 각자가 은밀한 개인의 자기종교를 무의식적으로 갖는 다종교 시대이다. 한 문명사회를 통제하는 제도적 권위적 종교는 살아진 대신,  다양한 유사종교적 운동들(pseudo-religious movements)이 발호하는 시대이다. 유사종교들은 국가․민족․인종주의, 맑시즘․주체사상․반공주의, 과학주의․경제제일주의, 팍스 아메리카․세계화등 거대한 유사종교형태들이 있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작은 ‘유사종교들’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준긍극적 관심’ 들로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 자기종교임을 모른체  살아간다. 건강과 미모, 아무도 모르는 단둘만의 연애, 핵가족단위의 행복한 가정, 돈과 스포츠와 섹스, 출세를 보장하는 엘리트코스 자녀교육, 사이버세계의 가상현실에 몰입과 자기외화 및 전자기적 몸으로서의 자기확장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집단적 힘과 매력과 보람을 갖고 등장하는 다양한 집단적 형태의 유사종교들과 개인들의 사사로운  ‘준궁극저 관심’들이 인간의 자기실현을 담보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기만하고  절망과 죽음과 자기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

 이제 틸리히의 문화신학 틀 안에서 현대인들의 ‘명목적 종교’가 아닌 ‘실질적 종교’인 ‘궁극적 관심’의 허와 실을 분석하고, ‘궁극적 관심’의 진정성과 그 특성이 무엇인지 성찰해 볼 차례가 되었다.

 


[4] ‘궁극적 관심’의 분석

 


폴 틸리히는 그가 서거하기 2년전인 1963년 봄, 산타바바라 켈리포니아대학교 켐퍼스에서 각각 전공이 다른 18명의 대학원 학생들과 의미깊은 세미나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세미나의 중심화두는 ‘궁극적 관심’이었다.4) 틸리히의 주저 「조직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저작물 속에 나타는 그의 문화신학의 기초개념인 ‘궁극적 관심’이란 무엇인가 아래의 몇가지 현상학적인 특성을 분석 정리하면서 이해해 보려고 한다.

 


(1) ‘궁극적 관심’은 히브리적 영성의 문화신학적 표현이다.

 이미 지식인 사회에서 대중화된  ‘궁극적 관심’이라는 표현구는, 특히 현대인이나 동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에서 삶을 누려온 지성인들에게는,  성공적인 ‘표현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궁극적관심’은 ‘궁극적’(ultimate)이라는 단어와 ‘관심’(concern) 이라는 두 개 단어로 구성되었다.

  우선 일상 생활인에게나  “공(空)과 무(無)의 존재론‘에 친숙해온 동아시아  문화권 지성인에게, 그리고 특히 무제약적 심각성을 요청하거나 절대적인 것을 요청하는 일체의 것에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포스트모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젊은  세대에게 ’궁극적‘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정신적  압박감, 권위적인 냄세, 형이상학적인 본질주의, 배타적 경직성등등의 어감을 풍기는 경우가 있다.  ‘관심’이라는 단어는 다분히 관계론적․심리학적 개념으로 들려서 종교를 말하기엔 다소 경박하거나 가치중립적  어휘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틸리히는 “종교란 궁극적 관심이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라고 말한다. 그는 대화가운데서 ‘궁극적 관심’이란 히브리인들이 모세종교의 쉠마라고 말하고 예수가  모든 율법과 예언자 가르침의 총괄적 요체라고 말하는 것 곧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는 히브리적 경건과 영성의 핵심요체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는 그 마음의 태도, 전인적 인간존재의 의지지향성과 진지하고 성실한 마음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궁극적’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라고  했다.

 ‘관심’은 이미 관심하는자와 관심되는 것과의 ‘주객구조의 틀’을 전제하는 듯이 들리기 때문에,  ‘주객구조’의 분별지(分別智) 상태를 초극하여 무념․무상․무아 상태를 깨달음의 필요조건이라고 경험하는 불교적 해탈체험에서 본다면 ‘관심’이라는 어휘가  맘에 걸리는 것이다. 물론 폴 틸리히는 그리스도교 종교사 속에 면면이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의  ‘부정의 길’ (via negativa)의 중요성을 깊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을 통하여 ‘부정신학’과 ‘적극신학’을 양자택일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신앙에서 중요한 신앙대상에 대한 신뢰, 고백, 헌신, 경외등도 모두 ‘관심’의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2) ‘궁극적 관심’은 실존적 체험과 무한한 열정을 동반하는 ‘존재에로의 용기’(courage to        be)이다.

 


틸리히가 말하려는 ‘궁극적 관심’은 키에케고르가 말하는 ‘무한한 열정’(infinite passion)을 연상하게 하는 열정과 진지성이 동반된 매우 실존적 체험의 성격을 지닌다.  살아 숨쉬는 역동적 신앙은 ‘축적된 종교전통’의 결과물인 종교적 상징체계, 교리적 명제, 정교한 전례(典禮)의식등을 상투적으로 수용, 동의, 참여하는 행위와 다르다.

 ‘궁극적 관심’은  나의 생명이  ‘존재냐 비존재이냐’(to be or not to be)가 결정되는 중요한 일에 관여함을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 ‘존재인가 비존재인가’의 물음은 실존적 의미에서이지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이나 생물학적 의미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무의미한 존재 곧 의미상실의  삶이 되느냐, 혹시 생물학적으로는 생존박탈 경우가 될는지 모르지만, 실존적으로는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영원히 사는 존재긍정, 존재실현, 존재향유의 삶이 되는냐 못되느냐의 문제이다. 예들면, 자기에게 상속될 천문학적 부와 명예를  몰수당하고 심지어 생명위협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순수한 연인들 상호간의 진솔한 사랑의 열정 속에서, 그리고  독재정권의 사악한 위선에 맞선 4.19나 5.18 민주혁명 때, 청년열사의 ‘정의와 진실’을 요청하는 꺼버릴 수 없는 열정 속에서, 우리는 죽음보다 강한 ‘궁극적 관심’의 무한한 열정을 본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사랑’이, 민주열사에게서 ‘정의’가 단순한 당위적 윤리덕목 으로서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그들의 ‘궁극적 관심’이 되면서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랐을 때, 그들은 알든 모르던 가장 ‘종교적’ 인 것이다. 그들은 몸은 죽었으나  ‘존재’를 잃지않고 ‘본래적 인간’으로서의  생명영글음에 도달했기에 비존재인 죽음이 그들을 건드리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나, 같은 시간 같은 시대 속에서 살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한 지식인 언론인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살았으나 실은 죽은자 ‘비존재’가 되었다.

 


(3) 개인적, 공동체적 삶에서 일상사의 모든 소재가 ‘궁극적 관심’의 실재가 될 수 있으나, 악마화(demonization)와 속화(profanization) 위험을 견뎌내고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자기초월을 경험하게 할 때만 ‘궁극적 관심’의 실재로서 그 진위성이 판명된다.

 


틸리히의 문화신학에서 ‘종교적 소재’는 반드시 제도적, 전통적 종교범주에 속하거나 관련된 것만이 아니다. 도리혀 제도적 종교가 속화되거나 악마화 되었을 때, 인간삶의 자기통전운동, 자기창조운동, 그리고 자기초월운동은 ‘진정한 궁극적 관심’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추구한다. 문명사회가 실존적 의미차원에서 공허감을 안겨주고  일차원적 존재방식만을 강요할 때, 인간은 무엇인가  ‘무조건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를  담지한 듯한 실재에 끌리고 거기에 몰입한다. 그런 실재는 대게 힘과 의미, 가치나 삶의 보람, 사명감과 긍지를 부분적으로 제공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배타적 광신주의, 경제성장제일주의, 조국근대화 경제건설제일주의, 제3세계 독립운동등은 언제나 유사종교적 열정(pseudo-religious passion)을 추종자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런 관심은 ‘준긍극적 관심’일 수는 있으나 진정한 궁극적 관심이 되지 못하기에 마침네 악마화, 속화를 거치게 되고, 인간의 곤궁과 소외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예들면 자식사랑의 지극한 모성애,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 잊을 수 없는 전우애와 동문애, 고향사랑의 향토애, 예술에 대한 사랑, 몸담고 있는 기업체의 사업번창, 전공하는 학문 학파 이론에의 절대적 참여등은 어느경우에 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처럼 생각되고 그렇게 살아 갈수 있다. 그러나, 그런 관심들은 진지하고 중요하고 가치있는 ‘준궁극적 관심들’ 일수는 있어도 ‘궁극적 관심’이 될 수 없다. 세월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면 ‘궁극성’을 상실해버리는 것들이며, 더 나아가서 진정한 인간의 자아실현과 자아성취를 저해하는 부정적 힘과 마성적(demonic) 속성을 노정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치들이 종교적 범주의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것이기에 ‘궁극적 관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이 그것들을 통해 ‘궁극적인 것’이 현현(顯現)되는 매개체로서 기능하도록 자신의 투명성과 자기부정 정신을 견지하지 못하고,  곧바로 자기자신을 절대화하는 우상화의 길을 내디딤으로서 마침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기 때문이다. 

 


(4) ‘궁극적 관심’은 자기초월운동을 하는 인간정신의 적극적 참여행위이면서 동시에 궁극적 관심에 붙잡히는 ‘피동적, 수동적 측면’을 내포한 역설적인 ‘신율적 체험’이다.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 의 분석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것은 인간정신이 주체적으로 찾고,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전유하면서  자기를 그 ‘궁극적 관심’에 일치시키고 귀의하는 능동적 의지의 지향과 주체적 자의식이 행위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혀 그와는 반대로 ‘궁극적 관심’에 의해 붙잡히는 경험이요 주어지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는 경험이라는 역설적 성격을 지닌다.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신비체험의 네가지 특성으로서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 이지적 특성(noetic quality), 일시성(transiency), 그리고 수동성(passivity)을 언급한바 있다.5)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의 성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할 때, ‘궁극적 관심’은 홀연히 인간의 정신적 삶을 사로잡아 거기에로 몰입하게 하거나, ‘수용적․책임적․관여’(commitment)를 하도록  인간의 전 실존과 인격을 추동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낯설고 강제적인 타율적(heteronomous)것도 아니고, 인간 이성의 자율적(autonomous)인 주체적․합리적 쟁취행위도 아니다. 자율과 타율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반대일치’의 경험 안에서 통전될 때, 인간에게 진정한 신율적 체험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틸리히가 말하는 ‘신율적’이란 개념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신이 내려준 신적 계율같은 것이 아니라(그것은 타율적인 계명이다),  이성의   합리적 구조가 파괴당하지 않으면서 이성의  깊이, 존재의 깊이 차원 곧 초월과 통전되는 경험이다. 이 때 인간 정신은 지복감정, 희열과 자유로운 해방감정, 유한실존의 모호성이  돌파되는 창조적 통전경험을 갖는다. 존재지반과 분리되었던 실존이 그것과 화해되는 경험과 동시에 치유의 감정을  맛본다. 진정한 ‘궁극적 관심’ 인간 실존으로 하여금 ‘지금․여기’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신율적 상태에로 고양되는 체험을 가져다 준다. 시간적으로는 카이로스 의식으로 팽배하게 하고, 심리적으로는 역설적 진리체험 가운데서   분열된 소외감정이 치유되는 기쁨을 향유하기도 한다.

 


(5)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은 종교적 상징이나 신학적, 종교적 언설로서 만이 아니라, 시각예술과 시 ,문학, 연극등에 의해 더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현대인들에게 회피할 수 없는 인간의 곤궁성과 ‘궁극적 관심’을 제시  할 수 있다. 진정한 ‘궁극적 관심’만이 인간실존의 ‘모호성’(ambiguity)을 잠정적으로 극복한다.

 


틸리히의 문화신학이 20세기전반기에 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예술장르와 문학에서 관심을 지속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틸리히 자신이 자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말하려는 상징적 진리 내용, 특히 ‘궁극적 관심’으로서 인간의 실존의 곤궁, 신비, 그 창조적 돌파를 시도하는 ‘존재에로의 용기’등을 문학적 장르에서 성공적으로 시도한 작가로서 T.S. 엘리오트를 언급하고 있다.  한국 ‘문학과 종교 학회’ 회원이신 이준학의 여러논문들 속에서 T.S 엘리엇의 문학작품세계와  P. 틸리히의  문화신학 특히 ‘궁극적 관심’과의 비교연구에 관한 여러 가지 연구 논문들은, 본인이 엘리엇의 문학분야는 문외한 이기에 논외로 하더라도, 틸리히의 신학내용에 대한 영문학자의 심층적 이해는 단순한 학제간의 연구를 넘어  생산적인 세계적 수준의 지적산물이라고 평가된다.6)

 이준학은 T.S엘리엇의 시와 시극 속에 흐르는 ‘궁극적 관심’의 본질적 성격을 두가지 점에서 지적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지고(至高) 한 것에 도달하려기 위한  모든 노력의 단계에서 고통은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절실한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와 사랑과 고통을 통해 인간실존이 자신의 곤궁성을 초극하려는 비극적인 성실성이라고 보았다.7)

 틸리히는 인간 실존상황의 곤궁성 또는 소외현상을 모호성으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호성’이란 불분명하게 흐릿하다는 의미보다는 인간실존이 처한 존재양식의 중층적 이중성의 불안의식과 갈등상황을 말한다. 그 이중성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방식으로서 ‘개체화와 참여’(individualization and participation), '형태성과 역동성‘(form and dynamics), 그리고 ’자유와 운명‘(freedom and destiny)이라는 이중구조의 비통전성에서 부터 온다. 인간실존은 본질과 실존, 무한의식과 유한의식, 원죄의식과 원축복의식, 존재부정의 겸허와 존재고양의 휴브리스, 그 양자의 긴장 갈등 속에 있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존재의 기본구조는 인간 실존상황에서는 항상 어느 한쪽을 성취하려하면 다른 한 쪽이 희생되거나 약화된다. 거기에서부터  실존적 삶의 모호성은 발생되고 있다. 존재의 존재론적 원리는 자아개체의 완전한 실현과 사회적 연대성 및 공동체성의 성취가 동시적이고 상호공속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현실사회에서 그리고 개인 실존적 삶 속에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갈등구조 속에서 시달린다.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이든지  법․제도․ 조직, 도덕율, 관습법 따위의 질서틀지우는 형식이 요청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곧바로 생명의 창조적 역동성과 창발적 자유를 억압하는 억압기제로서 작동한다.  인간실존은  무한한 자유와 단절없는 자기실현을 원하지만, 삶은 역사적 제약과 고난과 죽음등 운명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동시에 운명적 제약없는 자유는 공허하고 추상적이다.

 위와 같은 실존적 인간상황을 틸리히는 소외현상,  삶의 모호성이라 부른다. 이 삶의 모호성 속에서도 ‘궁극적 관심’에 붙잡히는 때, 먹구름사이로 맑고 청명한 하늘과 햇빛을 보듯이 인간은 모호성이 극복되는 ‘존재의 은총체험’, ‘새로운 존재체험’을 일시적이지만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종교는 구원체험, 은총의 현존체험이라 부른다.


(6) ‘궁극적 관심’의 존재론적 가능성과 현실성은 인간실존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자체’이신 자기존재의 원근거와 원능력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 속에 청초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 신비로운 ‘무제약적 포괄자’가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초월경험’을 하도록 자기를 내어주며 존재에로 불러내는 인간의 동반적 유인자 이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에 인간이 사로잡힐 때, 분열된 자아는 통전되고, 상처난 마음은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소외되고 분렬된 것을 ‘재결합시키고 치유하는 존재의 능력’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신을 가장 비상징적으로 언표하면 ‘존재자체’라고 말하지만,  가장 깊은 상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틸리히의 문화신학의 원리나 구조적 틀은 철저하게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관철되어 있지만, 그 내용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가톨릭의  상징주의와 상례전 주의에 깊이 가 닿는다. 그래서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학’은 20세기 가톨릭신학의 대표적 사상가인 칼 라너(Karl Rahner)의 ‘초월론적 경험신학’과 깊은 공명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틸리히의 문화신학에 있어서 이 ‘궁극적인 것’, ‘무제약적인 것’, 또는 ‘무조건적인 신비’는 존재라는 피라밑의 맨 꼭대기 정상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 피라밑의 맨 밑바닥에도 있고, 피라밑 몸체 구성체 한 가운데 ‘없이계신 하느님’(유영모)으로 현존하는 우리 ‘존재의 지반, 존재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틸리히의 문화신학 구조틀 안에서 ‘궁극적 관심’이 중세 가부장적 존재위계질서의 흔적, 포스트모던시대엔 걸맞지 않는 권위주의적 종교, 다중심․다양성․차이를 용납하지 않고 통일성을 지향하는 문화제국주의 종교관이 아닌가  오해하기도 하지만, ‘궁극적 관심’‘의 문화신학은 모든 시대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인간을 “자유하고 사랑하는 가운데서 자기초월을 경험하게 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2003. 7.3. 대전 충남대 강연)


자료출처: 김경재 교수의 숨밭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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