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동행

2026년 6월 28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28:10-15, 로마서 8:24-26, 누가복음 24:13-17

설교문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를 떠올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프로스트 자신이 평생 아끼고 자신의 시집 첫머리에 자주 실었던 시는 따로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 「목장에 가는 길(The Pasture)」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샘터를 치우러 가네. / 낙엽을 긁어내고 / 물이 맑아지는 것만 잠시 지켜보고 올 걸세.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자네도 함께 가세." 그리고 다음 연에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어린 송아지를 데려오러 가네. / 어미 곁에 서서 울고 있는 어린 녀석을.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자네도 함께 가세."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마지막 한 줄입니다. "자네도 함께 가세(You come too)." 흥미롭게도, 이 시에는 웅대한 풍경도, 극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샘터를 치우러 가는 일, 송아지를 데려오는 일처럼 지극히 평범한 농부의 일상입니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말합니다. "혼자 다녀와도 되지만, 함께 가면 더 좋지 않겠는가."

샘터에는 낙엽과 이끼가 쌓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맑은 샘물도 흐려집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주기적으로 샘터를 돌보아야 합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마음속 샘에도 낙엽이 쌓입니다. 미움, 후회, 상처, 지친 기억 등, 이것들을 조금씩 걷어 내지 않으면 영혼의 샘은 흐려집니다. 그런데 프로스트는 혼자 가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네도 함께 가세(You come too)." 상처를 치유하는 일, 삶을 정돈하는 일, 다시 맑아지는 물을 기다리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연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송아지는 어미 곁에서 서툴게 울고 있습니다. 프로스트는 그 송아지를 데려오러 갑니다. 거기에도 마지막은 같습니다. "You come too(자네도 함께 가세)." 약한 존재를 돌보는 일, 새 생명을 보살피는 일, 어린 것을 품어 주는 일들 역시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프로스트의 위대함은 거대한 이상보다 작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의 시는 화려한 선언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자" 혹은 "위대한 일을 하자" 대신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샘터를 치우러 가네. 어린 송아지를 데려오러 가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자네도 함께 가세." 이는 명령이 아닙니다. 강요도 아닙니다. 그저 곁을 내어주는 초대입니다.

사실 「목장에 가는 길」은 초대의 시입니다. "내가 가는 길에 함께 가세."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결혼은 "함께 가세"입니다. 우정은 "함께 가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함께 가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함께 가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결국 그 부르심의 중심에는 "함께 가자"는 초대가 있었습니다.

구약성서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성서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간적인 동행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왕이나 영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남편을 잃은 두 과부, 그것도 늙은 시어머니와 젊은 이방인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바로 그들의 동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갑니다.

기근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났던 나오미의 가족은 모압 땅으로 이주합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남겨진 사람은 세 명의 과부였습니다.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 젊은 며느리 오르바, 그리고 젊은 며느리 룻. 당시 과부는 오늘날의 의미와는 달랐습니다. 생계를 책임질 남성 보호자가 없는 여인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연약한 위치에 놓였습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풍족하게 나갔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며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따라오지 말아라. 너희는 너희 집으로 돌아가거라." 사실 나오미의 말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가면 고생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오르바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달랐습니다. 성서는 아주 짧게 기록합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기 1:14) 히브리어에는 '굳게 달라붙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룻의 고백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에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는 결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습니다."(룻기 1:16-17)

이 말은 단순한 효심이 아닙니다. 혈연을 넘어선 언약입니다. 조건 없는 동행의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은 룻만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둘은 서로를 살립니다. 젊은 룻은 들에 나가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먹여 살립니다. 하지만 늙은 나오미도 룻을 위해 살아갑니다. 보아스를 만나도록 길을 열어 주고, 삶의 지혜를 나누어 주며, 절망한 룻에게 미래를 보여 줍니다. 젊음은 늙음을 부양하고, 늙음은 젊음을 인도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손이 되고, 나오미는 룻의 눈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동행이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를 고향 주민들이 반기자 나오미가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주시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쓰디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놀랍게도 나오미의 절망에 억지 희망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힘내세요"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룻이 조용히 곁을 지킵니다. 말보다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설명보다 동행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은 룻이라는 사람을 통해 나오미를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룻기의 결말을 잘 압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가 되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가 됩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과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러나 룻기의 가장 큰 축복은 보아스가 아닙니다. 룻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나오미였고, 나오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십니다. 돈을 주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주십니다. 미래를 열어 주시기 전에 먼저 동행자를 주십니다.

이제 성서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을 기록합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고 양육하였다."(룻기 4:16) 한때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라고 슬피 울던 여인이 이제는 손주 아기를 품에 안고 웃습니다. 잃어버린 인생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통해 두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동행은 다윗의 집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룻기의 가장 위대한 기적은 홍해가 갈라진 것 같은 기적이 아닙니다. 한 늙은 여인과 한 젊은 여인이 상실의 길 한복판에서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얘야, 내가 네 손을 놓지 않으마. 우리 함께 집으로 가자." 이것이 룻기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었던 슬픔을, 둘이 함께 걸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하시는 초대입니다. "혼자 가지 말아라. 함께 가자."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곁에 서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는 분입니다.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아름다운 동행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주 짧지만 매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 5:24) 성서는 에녹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업적도, 어떤 성과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실제로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고, 에녹은 그 곁을 따라 걸었습니다. 어쩌면 믿음의 삶이란 특별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지의 지도를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불확실했습니다. 기근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는 길을 다 알려 줄 수는 없지만, 내가 함께 가겠다." 믿음은 모든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함께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하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치던 야곱은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듭니다. 꿈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창세기 28:15) 그때 야곱은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20년 후 다시 벧엘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서 전체의 기다림은 결국 한 이름으로 응답받습니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응답받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구름 위에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시고, 우리의 식탁에 앉으시고, 우리의 길을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원문의 뜻은 "내 뒤에서 함께 걸으라" 입니다. 예수님은 "가서 공부하라", "가서 성공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와 함께 가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십자가 이후 절망에 빠진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설교부터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걸어 주셨습니다. 먼저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탁에서 떡을 떼실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주님은 절망의 길에도 함께 걸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을 떠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 즉 옆에서 돕는 이, 함께 걷는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멀리 계신 힘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에녹과 함께 걸으셨던 하나님, 아브라함과 광야를 지나셨던 하나님, 하란 광야에서 야곱에게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엠마오 길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가자. 길을 다 보여 줄 수는 없지만, 함께 가자. 짐을 다 없애 줄 수는 없지만, 함께 지자. 눈물을 다 막아 줄 수는 없지만, 함께 울자. 그리고 마침내 집에 이를 때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교우 여러분, 어쩌면 성서 전체는 하나님의 이 한마디를 길게 풀어 쓴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혼자 가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고 믿음이란, 하나님을 앞세워 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걸으시는 걸음에 맞추어 하루하루 함께 걸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동행인지도 모릅니다.

40년 전, 저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던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공동 기도문으로 함께 읽었습니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하나님도 종종 외로워서 우신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기다립니다. 사랑은 찾아갑니다. 그리고 함께 울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도,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신 것도, 성령을 보내 주신 것도, 결국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혼자 가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걸어 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앞서 걸어가시며, 때로는 옆에서, 때로는 뒤에서 밀어주시며, 때때로 우리를 품에 안고 걸어가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외롭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울어도 괜찮습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우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십니다. "혼자 가지 말아라. 우리 함께 가자."

로버트 프로스트의 '동행 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나는 샘터를 치우러 가네. / 낙엽을 긁어내고 / 물이 맑아지는 것만 잠시 지켜보고 올 걸세.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자네도 함께 가세(You come too). // 어린 송아지를 데려오러 가네. / 어미 곁에 서서 울고 있는 어린 녀석을.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자네도 함께 가세(You come too)."

기도합시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우리를 향하여 "혼자 가지 말아라. 함께 가자"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언제나 평탄하지는 않겠지만, 걸어가는 모든 길에서 주님이 앞서 걸으시고, 우리 곁에서 손을 잡아 주시며, 때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십시오. 우리의 길이 우리를 향하여 열리게 하시고,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주게 하시며, 은혜의 햇살이 우리의 얼굴을 비추게 해주십시오. 삶에 내리는 비마저도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는 은혜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에게 "함께 가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룻이 나오미에게 그러했듯이, 엠마오 길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외로운 이들의 곁을 함께 걸어가는 아름다운 동행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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