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사상 연구자 고 박재순 박사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재순 박사가 지난 20일 오후 5시 34분 별세했다. 향년 76세.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8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2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경미 이화여대 교수와 딸 박예람 씨가 있다.
박재순 박사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신대 연구교수와 성공회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 회장과 재단법인 씨알 상임이사, 씨알사상연구소장 등을 맡으며 한국 근현대 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접점을 탐구해 왔다.
함석헌과의 만남, 씨알사상 연구의 출발점
박 박사의 사상적 여정에서 중요한 출발점은 대학 시절 만난 함석헌이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부터 함석헌에게 배우며 씨알사상을 연구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함석헌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석헌에게 영향을 준 다석 류영모와 오산학교의 역사, 더 나아가 도산 안창호까지 연구의 지평을 넓혀갔다.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은 한국 기독교와 한국 근현대 사상을 서구의 신학적 틀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한국의 역사와 삶 속에서 형성된 사상적 계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와 이승훈, 다석 류영모, 함석헌을 하나의 사상적 흐름으로 연결하면서 이들의 사상을 '생명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했다.
민중신학과 씨알사상을 잇다
박 박사는 민중신학의 문제의식을 씨알사상과 연결해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그의 저서 『열린 사회를 위한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의 주요 개념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한국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책이다. 또한 씨알사상과 민중신학, 서구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 신학의 독자적인 사상적 토대를 찾으려 했다.
그에게 신학은 추상적인 교리 체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 속에서 인간과 생명의 문제를 묻는 작업이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그의 저술 전반에서 이어졌다.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등은 그의 신학적 관심이 민중, 생명, 공동체, 평화의 문제로 확장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산·다석·함석헌을 '생명철학'으로 연결
박 박사의 후기 연구에서 특히 주목받은 작업은 도산 안창호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2021년 출간한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에서 도산 안창호와 이승훈, 다석 류영모, 함석헌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를 조명했다.
박 박사는 이들을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낸 사상가들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사상을 '생명철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책은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연속성을 비롯해 민주·통일·평화의 문제까지 폭넓게 다룬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도산과 함석헌의 사상 사이에 깊은 연결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서 이승훈과 류영모의 영향을 받았고, 오산학교가 도산 안창호의 교육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박 박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 생명철학의 흐름을 찾아내고, 이를 오늘의 신학과 철학적 과제로 연결하고자 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도 고난 감내
박 박사의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도 깊게 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를 안고 살아온 그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신군부 시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1980년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이 넘는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주화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아 유공자로 표창받기도 했다.
그가 평생 천착했던 '생명'과 '주체'의 문제는 단순한 학문적 관심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고난과 역사적 현실에 대한 성찰이 그의 신학과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를 향한 질문
박재순 박사의 연구는 한국 기독교가 서구에서 전해진 신학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역사와 삶 속에서 어떻게 자기 언어와 사상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동시에 다석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을 조명했고, 나아가 도산 안창호의 사상까지 연결하며 한국적 생명철학의 계보를 탐구했다.
세계철학자대회에서 류영모와 함석헌 철학 발표회를 주관하고, 한일철학대회에서 씨알철학과 공공철학의 대화를 주관하는 등 한국의 씨알사상을 국내외 학계에 알리는 작업에도 힘썼다.
주요 저서로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인성교육의 철학과 방법』, 『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등이 있다.
박재순 박사가 남긴 질문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도 여전히 남는다.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생명과 민중, 인간의 주체성과 공동체, 평화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신앙 안에서 연결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다석과 함석헌, 그리고 도산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를 탐구했던 박재순 박사의 삶은 이 질문을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남긴 채 마무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