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선생은 31일 한신대 오산캠퍼스에서 열린 한국기독교학회 제55차 정기학술대회 주제강연에서 「예수의 천국과 수운의 시천주―탈종교시대, K복음 영성의 원형을 찾아서」를 발표했다.
탈종교 시대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교세 감소에 대한 대응을 넘어 종교의 근원과 한국인의 정신사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제시한 '시천주(侍天主)'와 한국 불교의 원효 사상을 토대로 한국적 복음 영성의 원형을 탐색하자는 제안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31일 한신대 오산캠퍼스에서 열린 한국기독교학회 제55차 정기학술대회 주제강연에서 「예수의 천국과 수운의 시천주-탈종교시대, K복음 영성의 원형을 찾아서」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서구에서 유입된 신앙 체계를 전달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의 종교·철학 전통과 대화하며 신앙의 근원적 의미를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발표에 대한 논찬은 양현혜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김학철 연세대 교수가 맡았다. 김 교수는 갑작스러운 빙모상으로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작성한 논찬문을 이상철 박사가 대독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이들 논찬자들은 도올 선생이 한국 기독교에 제기한 비판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학의 시천주와 기독교 신앙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초월과 내재의 관계,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유산을 더욱 균형 있게 살펴야 한다고 제안했다.
"종교는 제도나 신앙에 갇힐 수 없다"
도올 선생은 강연에서 먼저 '종교'라는 개념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짚었다. 오늘날 종교를 뜻하는 한자어 '종교(宗敎)'는 근대에 서양의 'religio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반화됐지만, 본래는 불교 문헌에서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특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제도적 소속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금강경 강해』에서 제시했던 세 가지 명제를 다시 제시했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며, 종교의 주제가 반드시 신일 필요는 없고, 종교는 제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종교를 특정한 교리와 조직의 틀에 한정하기보다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탈종교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 이어졌다. 도올 선생은 종교 인구의 감소 자체보다 종교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무관심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봤다.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종교가 인간의 정신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사회에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개화기에 문명과 문화의 자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신사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고유한 정신적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앙의 이름으로 비합리성을 정당화하거나 교세 확장을 종교의 핵심 목표로 삼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효의 일심과 수운의 시천주...한국적 영성의 원형 찾기
도올 선생은 한국적 종교 영성의 계보를 원효의 일심(一心) 사상과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에서 찾았다. 그는 서구적 종교 이해가 신과 인간을 분리하고 외부의 신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한국의 전통 사상에는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는 흐름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동학의 시천주는 인간이 하늘을 몸과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로, 인간과 세계가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관점을 담고 있다고 봤다. 도올 선생은 이를 단순히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과 신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급진적인 평등주의로 해석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표현이 수운의 원래 용어가 아니라 후대에 정식화된 개념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동학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대의 교리적 표현만을 반복하기보다 수운의 원전으로 돌아가 '시천주'가 지닌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올 선생은 원효의 일심 사상과 동학의 시천주를 서구적 신앙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인간과 세계의 근원을 외부에서만 찾기보다 인간의 내면과 관계적 존재성 속에서 발견하는 영성이 한국적 복음의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서구의 신학적 언어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역사와 사상적 전통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봤다. 'K복음 영성'의 모색은 단순히 한국적인 형식을 덧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사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이라는 취지다.
양현혜 교수 "한국 정신사에 기여할 고유한 신학 고민해야"
▲양현혜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도올 선생이 한국 기독교에 제기한 비판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학의 시천주와 기독교 신앙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초월과 내재의 관계,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유산을 더욱 균형 있게 살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양현혜 교수는 논찬에서 도올 선생의 발표가 한국 전통 사상과 개신교를 거시적인 시야에서 비교하고, 개신교 내부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신앙의 모습을 외부자의 관점에서 성찰하게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양 교수는 특히 한국 기독교가 한국인의 정신사에 어떤 고유한 기여를 했는지, 한국의 전통 사상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지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한국 기독교가 사회 계몽과 민주화, 민중신학의 형성 등에 기여한 역사적 유산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일부 기독교 집단의 극단적인 정치 세력화는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다시 질문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 교수는 도올 선생의 문제 제기를 단순히 서구 기독교와 한국적 영성을 대립시키는 구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개신교 신앙의 중요한 특징은 초월적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그 관계가 인간의 삶과 책임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긴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루터의 칭의론과 성화, 자유와 책임, 본회퍼의 '값싼 은혜'와 '고귀한 은혜'를 언급하며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이웃을 위한 책임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며, 복음은 현실의 권력과 억압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역할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서구에서 유입된 신앙 구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성장주의와 대형 교회 중심주의, 기복신앙과 무속적 심성의 결합, 냉전 반공주의와 신앙의 정치화 등은 한국적 토양에서 형성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한국적 영성의 가능성뿐 아니라 그 전통의 그늘도 함께 성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양 교수는 수운의 시천주를 이해하는 데서도 초월과 내재의 관계를 더 깊이 살펴야 한다고 봤다. 수운의 체험은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한 사건만이 아니라, 하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계시의 사건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적 복음 영성의 가능성을 초월을 제거한 내재에서 찾기보다, 인간 안에 거하면서도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의 역동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학철 교수 "수운의 시천주는 각성만이 아니라 계시의 서사"
▲김학철 교수가 갑작스러운 빙모상으로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작성한 논찬문을 이상철 박사가 대독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김학철 교수 역시 논찬문을 통해 도올 선생이 한국 기독교에 던진 비판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발표의 핵심 구도인 '대타적 순종'과 '대자적 각성'의 구분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도올 선생은 원효와 수운을 자각적 각성의 전통에, 바울과 루돌프 오토·칼 바르트를 외부의 초월적 신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는 전통에 배치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수운의 원전을 살펴보면 시천주 체험을 단순히 인간 내면의 깨달음으로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수운의 『동경대전』 등에 나타난 체험 서사에는 하늘님이 자신을 상제라고 밝히고, 수운에게 말을 건네며, 가르침과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김 교수는 이러한 구조가 성서의 모세와 이사야, 예레미야 등에게 나타나는 소명과 계시의 서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운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신과 하나임을 깨달았다는 의미로만 읽기보다, 하늘님이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 안에 거할 것을 선언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봤다. 이를 '내재를 선언하는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김 교수는 원효의 깨달음과 수운의 체험이 모두 내재의 차원을 보여주지만, 그 내재에 이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원효의 깨달음이 마음의 전환을 중심으로 설명된다면, 수운의 체험은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사명을 부여하는 초월자의 계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할 때 동학의 시천주와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대립적인 유형으로 나누기보다, 초월과 내재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중심으로 비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기독교 전통 안에도 초월과 내재를 함께 사유하려는 풍부한 신학적 자원이 있다고 강조했다. 마태복음의 '임마누엘' 사상, 동방교회의 신화(神化) 전통,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폴 틸리히와 칼 라너 등의 신학은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인간의 삶 안에 현존한다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 복음 영성을 탐색할 때 서구 기독교를 외재적 초월만을 강조하는 전통으로 단순화하기보다, 기독교 내부의 다양한 신학적 자원과 한국의 종교 전통이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독교 비판은 필요하지만 역사적 균형도 중요
김 교수는 도올 선생이 한국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인용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문헌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표현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작에 그대로 등장하는 문장이 아니며, 후대에 정형화된 표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원래 문맥을 고려하면 이를 기독교 신앙이 이성 일반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와 안셀무스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등 기독교 지성사의 전통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도 균형 있는 평가를 요청했다. 초기 선교사와 기독교 공동체가 한글 보급과 교육, 의료, 민권 운동 등에 기여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1운동과 민주화 운동, 민중신학의 형성 등도 한국 기독교가 남긴 중요한 유산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공헌이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상쇄하는 것은 아니다. 김 교수는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교파주의와 보수적 신학의 한계, 교회의 정치·사회적 참여를 제한한 측면 등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이 아니라, 공헌과 한계를 함께 살펴 역사적 현실을 균형 있게 이해하는 일이다.
탈종교 시대, 한국적 영성과 기독교 신앙의 대화 과제
이번 주제강연과 논찬은 탈종교 시대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질문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드러냈다. 도올 선생은 한국의 전통 사상과 동학의 시천주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근원을 다시 묻고, 한국인의 정신사에 뿌리내린 복음 영성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양현혜 교수와 김학철 교수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공감하면서도, 초월과 내재의 관계를 단순화하지 않고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전통과 한국적 종교 사상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논찬자들의 문제 제기는 한국적 복음 영성을 서구 신학의 대체물이나 전통 사상의 단순한 재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역사와 종교 전통에서 고유한 질문을 발견하되, 그 질문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비판적으로 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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