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년 7월 10일에 출생한 존 칼빈의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한국장로교계에서 있었다. 칼빈은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보다 약 20년 후에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고, 그들의 운동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그들의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자유사상과 운동들이 혼란스럽게 일어나있었던 흐름들을 이끌어 하나의 새로운 강력한 신학운동으로 지향한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그가 형성한 교회를 루터의 개혁을 더 발전시켰다는 의미로 reformed church, 즉 개혁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찍이 스코틀랜드에서 국교로 설립된 장로교회가 미국을 거쳐 온 것이다.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세계에서도 가장 클 뿐더러 한국의 개신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단이다. 그러나 이 장로교회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분열되어 있고 따라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칼빈의 탄신 500주년을 기하여 한국장로교회의 자아비판과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이 때 한국장로교회는 칼빈의 신학사상과 신앙을 다시 검토하여 한국장로교회가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본고에서는 한국장로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칼빈의 신학사상 몇가지를 지적하여 보고자 한다.
1. 칼빈의 신학이 장로교회의 신학이지만 그는 장로교파를 만든 사람은 아니다. 그가 제네바교회의 목사와 제네바시 당국에서 파송한 장로로써 교회의 최고 지도기관인 당회를 조직했으나 그는 성서에 있는 초대교회의 장로직을 그대로 모방하였을 뿐이다. 천주교에도 장로라는 최고 직분이 있었다. 이처럼 교회에 장로직분이 있다고 해서 장로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개혁한 교회를 reformed church(개혁교회)라고 명칭하였다. 칼빈은 교회의 제도는 반드시 장로제도로 할 필요는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된다면 '감독' 제도라도 무방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장로를 통한 제네바시 당국의 간섭을 제지하기 위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인들은 칼빈이 장로교 제도를 만들었거나 장로교 제도만이 최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2. 한국의 장로교인들은 칼빈을 위대한 교리제정자, 곧 교리를 만든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의 교리라고 생각하는 신학사상을 만세불가변의 것인양 생각하고 그를 엄격한 교리주의자로 오인하여, 그의 교리라는 것을 가지고 그동안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 부끄럽게 되었다. 칼빈은 소위 교리를 만들어 선포한 일이 없고, 다만 성서에서 언급된 신앙문제들(예정이나 은혜, 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을 해석하고 설명하였을 뿐인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들을 칼빈주의 교회라고 부르고 교리 논쟁을 일삼았다.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가 성만찬신학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여 개신교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루터와 쯔빙글리에게 서신을 보내어 중재를 시도했다. 그의 노력은 실패하여 개신교의 일치와 연합정신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삼위일체이론으로 이단시된 셀베투스를 제네바시 당국자들과 지도자들이 처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을 때 칼빈은 그의 이론에 오류가 있었지만 교리문제로 그를 처형시키는 일을 기피하였으나 부득이 그를 정죄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종교재판을 열어서 신교도들을 사형하는 끔찍한 일을 원치 않았다.
한국장로교계는 해방 후 장로교계의 신학사상의 차이를 가지고 이단으로 몰고 서로 정죄하고 분열한 것을 오늘에 와서 시정하려니 실로 민망한 일이다. 과거의 교회분열의 투사들과 교리주의자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의 기질이 아직 한국장로교회 안에 남아있는 듯하다.
3. 신학논쟁과 분열의 가장 큰 이슈는 칼빈의 성서관이었다. 칼빈이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란 의미로 「받아쓰기」(dictation)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그는 성서의 문자적 무오를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현존하는 많은 성서사본들 중에 당시에 그가 사용한 사본성서에서 야곱을 따라 애굽에 내려간 그의 가족 수에 관한 창세기와 사도행전 기록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두 기록 중 어느 하나는 오류란 말이다.
고로 1566년 스위스 개혁교회가 채택한 제2 스위스신앙고백과 1648년의 웨스트민스터고백에서도 성서는 영감으로 쓰였다고 했지 소위 축자(逐字)영감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1675년에 나온 스위스 제네바의 신앙고백에서 구약성서의 자음과 모음이 다 영감으로 쓰인 것이라고는 말했지만 문자상의 무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그동안 장로교계에서는 성서의 축자영감과 문자무오론이 득세하여 분쟁의 이유가 되었다. 신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으로서 틀림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다고 말하는 것인데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
4. 선택의 교리와 예정교리가 장로교회 안의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1648년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만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도 채용하고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진술된대로 하나님의 예지와 무관한 '무조건적 예정'과 멸망받을 사람들도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론'을 교리로 삼았다. 바울이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들을 미리 정하셔서 구원받게 하셨다고 했는데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예지와 상관 없었다고 말하였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1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되게 예정하셨다고 말했는데 칼빈은 그 점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장로교회의 헌장처럼 생각하고 이 고백서에서 진솔한 무조건적 예정과 이중예정론을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이 점에서 분명히 성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정론과 다르게 주장하였으나 그의 직계지도자인 제네바 개혁교회 지도자 불링거(Bullinger)가 발표한 제2 스위스신앙고백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셨고 그 밖의 사람들은 포기(reprobate) 하셨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예정된 사람들도 좁은 문을 통하여 구원받도록 노력해야 하고, 누가 예정되고 안 될 것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지 말라고 말하였다. 또 1675년의 스위스고백(소위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에서도 구원받을 사람만을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그 밖의 사람들은 '포기'하셨다고 말하였을 뿐, 멸망할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있는대로 이중예정과 예지로 인하지 않은 무조건적 예정론을 신봉하고 있다. 이 점에서 칼빈이 비성서적 예정론을 발설한 책임을 져야하며, 한국장로교회의 칼빈주의자들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
칼빈을 본받아야 할 것도 있다. 칼빈은 매 주일 성찬식을 갖다가 나중에는 최소 매월 한 번은 꼭 성만찬의식을 시행하였는데 오늘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그것을 소홀히 하고 있다. 칼빈은 제네바시가 거룩한 도시가 되기 위하여 교회기강을 엄격하게 하였으나 오늘 한국장로교회는 교회기강이 해이해 있고, 또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빈곤타파와 생활개선을 위해서 각방으로 노력했는데, 한국장로교회는 교회 자체의 부유와 비대를 위해 주력하였다.
우리는 칼빈에게서 배울 것과 무조건 추종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한국장로교회 안에는 칼빈의 예정교리가 장로교회의 대표적 교리라고 보거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성싶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분열을 야기시킨 가장 큰 신학은 예정신학인 것을 다 아는 바이다. 장로교회 안에서도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칼빈이 하나님의 예지를 제외시킨 '무조건적 예정'과 일부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고 일부 사람은 영멸을 각각 구별해서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론' 대신, 예지예정과 구원받을 사람만의 예정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론을 채택한다.
칼빈이 영국성공회(국교)와의 연합과 일치를 열망하여 교신한 바 있었지만 실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계의 일치와 연합 실현에 실패한 원인은 칼빈의 예정신학 때문이었다. 영국성공회 헌장에서는 예지예정이나 이중예정이 아닌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이나 장로교회와 연합전선을 펴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항할 수 없었다. 장로교계 안에서도 이 문제가 분열의 이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