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대부분의 크리스천에게 '기독교 생활공동체'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단이나 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다일공동체처럼 도시 속에서 봉사하는 공동체에 대해서는 '앞치마 두르고 밥 퍼주는 거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하며 호의적일 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들어가야 하는 공동체라면?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한국 기독교공동체운동의 대부, 사랑방공동체. '한국교회에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고,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1984년 4월 정태일 목사(63)가 사람 없이, 돈 없이, 변변한 건물 없이 창립했다.
▲자전거와 아이들, 단층주택이 보이는 '사랑방공동체'의 소경 ⓒ이지수 기자 |
사실 정 목사는 탄탄대로가 보장돼 있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교회 중 하나인 새문안교회, 당시 개척교회였던 정릉제일교회, 부자들이 가장 많이 간다는 소망교회 등 다양한 교회에서 교역자로 활동했고, 장신대 등으로 출강도 수십 년째다.
그러나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한국교회가 그를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하다. "1984년이 한국교회 100주년이었습니다. 이 때에 맞추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 너무나도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사랑방교회였다.
사랑방교회가 부속기관으로 있는 사랑방공동체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무림리에 위치해 있다. 총 2932평의 넓은 땅에 20여 채의 아담한 건물이 있고, 50여 명이 거주한다. 주일이면 300여 성도들이 서울 등 각지에서 몰려든다.
이 '작은 나라'에는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먼저, 교회가 있다. 새벽기도회, 주일예배 등이 열리는 곳으로서 공동체의 중심이다. 또 교육기관이 있다. 유아원 개념인 재롱이학교부터 유치원(꾸러기학교), 초등학교(어린이학교), 중고등학교(멋쟁이학교)까지 있어, 모든 필수 교육 연령대 커버가 가능하다. 또 마을에 거주하는 성도들을 위한 주택 몇 채와 텃밭, 사육장 등이 띄엄띄엄 그러나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공동체인 '사랑방공동체'의 대표 정태일 목사 ⓒ이지수 기자 |
이달 19일부터는 한국의 이름 있는 기독교공동체들이 여기서 모임을 가지는데, 이 모임은 사랑방공동체를배우는 성격도 띄고 있다. 사랑방공동체가 '대표' 격인 셈이다. 정태일 대표도 "기독교공동체 순회탐방을 한다고요? 그렇다면 여기 처음 오기를 정말 잘 했습니다"라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올해로 125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발붙일 곳 없는 듯 보인다. 25년 전, 5명도 안 되는 모임 가운데 그 구호를 씨앗 심고 이제야 싹 틔우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 정태일 목사, 그를 만나 사랑방공동체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사랑방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의 얘기 속에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면면이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났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론은 한국교회의 '좌절'이 아니라 '희망'이었기에, 그의 긴 얘기를 기사로 엮어 본다.
무더운 여름날, 무림리 사랑방공동체의 시원한 나무 그늘 밑과 그보다 좀 더 시원했던 정 목사의 자택 거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한국교회 100주년 맞춰 창립한 이유 있다"
"공동체적 교회 통해 한국교회에 선교 2세기 열고자"
들어오는 길은 시골이었는데, 막상 와 보니 지상낙원이다. 들어와서 살고 싶을 정도인데.
오는 사람들은 다 그런 말을 한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다르다.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기 전 스터디를 만들어 1년 동안 우리 공동체를 연구했다는 사람도 있다. 한 번 왔다 가는 것과 정말로 정착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공동체를 '왜' 만드신 건가.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위해서. 한국교회가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것 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만 가시적으로 제시된 것이 없었다. 그냥 '굴러가고' 있었다. 한국교회 100주년에 맞춰 창립한 것은 한국교회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새문안교회, 소망교회 등 많은 교회에서 사역했는데 사실 준비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간 것이었다. 모든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한국교회가 '하늘나라의 이 땅 위 모델로서의 교회'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다. 교리와 직분에 집착함으로 비본질화 되고,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안타까웠다. 피 흘리며 순교하기까지 한국교회의 터를 닦은 선교사들을 생각할 때, 100년 만에 이토록 큰 부흥발전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생각할 때, '이대로 갈 수 없다'는 각성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내가 평생 몸담을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1984년 교회를 세우면서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 선교의 2세기를 열 수 있기를' 기도했다.
준비과정이 꽤 치밀하셨다. 사람은 많이 모였었나?
일부러 안 모았다. 그럼 다른 곳과 같아지니까. 창립정신이 '3無' 였는데, 사람, 건물, 돈 없이 시작하자는 거였다. 사람 모아놓고 시작하면 교회를 세운 취지가 사람에 의해 제한된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니 이 교회를 책임져주시리라 믿으며 돈 없이 시작했다. 도움 주겠다는 곳이 있었지만 뿌리 치고 애들 반지 팔아가며 교회를 세웠다. 나와 아내 포함 3~4명을 창립멤버로 교회 겸 집 겸한 곳에서 창립예배 드렸다.
그 때의 결단이 있었기에 지금의 사랑방공동체가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두려움을 수반하는 결단이었을 것 같다.
그렇지. 이런 교회가 가능한가를 고민했다. 우리 공동체에서 지금도 하고 있는 '성서연구 모임'을 2년간 시험 운영해보기로 하고 4그룹을 운영했는데 1년 반 만에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교회를 세웠다.
‘3無 원칙’ 중 ‘돈 없이 시작한다’가 있다. 25년이 지금, 영세하지 않아 다행이다.
▲전원지역에 교회 세운 것을 기념하며 만든 비석. 비석에는 '도심지의 선교관은 도심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전원지역의 교회는 도시인들이 자연 속에서 경건생활을 하기 위한 것인데, 이 두 장소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도심지에서 모든 생활을 함께 하고 매월 한 번씩 자연 속에서 예배 드린다. 의의 약속에 따라 이곳에 자연 예배당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정태일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일인가 분별하느라 뭘 하나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원하시는 일이라고 결론 나면 무조건 시작하고 본다"고 말했다. ⓒ이지수 기자 |
우리는 그것을 ‘믿음의 역사’라고 한다. 우리는 뭘 하나 하는 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린다.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일인가?’를 분별하느라 그러는데, ‘원하시는 일이다’고 결론 나면 무조건 시작하고 본다. 돈은 거기 맞춰서 메꿔 나가는 거다. 학교 지은 것도 다 믿음의 역사이지. 돈이 먼저 들어가면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이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우리 교인들 안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다’는 고백이 있다.
사실 나도 속상한 게 많다. 총회(교단)에서 뭔가를 평가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으니까. 또 땅과 건물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 있지만, 그것을 위해 ‘돈을 모으자’고 할 수 없는 딜레마도 있고. 그래도 돈을 우선시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코이노니아적 교회의 중요성"
다시 물어보자. 공동체를 왜 만드신 것인가?
한국교회가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교회의 본질은 뭔가? ‘코이노니아’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히 ‘교제’로서의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성령 안에서 이루는 공동체적인 삶’이 바로 코이노니아다.
문제는 이 코이노니아가 한국교회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보여지는 살아있는 메시지가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메시지가 되어버렸다. 코이노니아가 살아있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크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작게 보아, 개인에 있어서도 코이노니아적 교회의 존재는 중요하다. 직장을 잃고, 건강을 잃은 문제가 직장을 얻고 다시 건강해진다고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내가 하나님나라에 가 보면’ 해결된다.
사회에도 코이노니아적 교회가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노사갈등, 이념갈등 등 수많은 갈등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 교회가 ‘그렇게 살지 말고 우리처럼 살아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교회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하기가 힘들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듯, 하나님나라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노인과 어린아이, 건강한 자와 약한 자가 다 어울려 산다. 예수 때문에 가능하다.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고 뭐냔 말이지. 같이 살면 되는데 내가 살겠다고 남을 죽이려 하니 갈등한다. 한국의 교회가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가서 전하는 게 50%라면, 나머지 50%는 왔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뭔가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공동체 운동은 세계교회사적 흐름이었다"
사랑방공동체 이후로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개척자들 등 많은 공동체가 생겨났다. ‘공동체 운동’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생겨난 것 같은데.
▲사랑방공동체 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방과 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지수 기자 |
사실 이 흐름은 세계적인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93년 WCC 제5차 세계대회의 주제가 ‘신앙과 생활과 증거(선교)로부터 코이노니아를 지향하여’였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다음에 ‘공산주의가 무너졌는데 왜 평화가 안 오는가’를 고민하며 가진 모임이었다. ‘신앙으로부터’는 기복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선교로부터’라는 것은 밖으로 나가는 선교 방법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 때까지는 다 나가서 전하기만 했지, ‘와서 보라’는 게 없었다. 밖으로 나가고 안으로는 싸우고 그랬었다.
공동체운동은 이러한 세계교회사의 하나의 흐름 속에서 태동한 것이라고 본다. 사랑방공동체는 그 흐름 속에 먼저 들어간 것일 뿐이다. 그 이후 한국교회에 공동체운동이 좍 일어났지.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