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큰 일 - 요한 14:11-12
오늘 본문은 예수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요한 13:1)을 직감하고, 다시 말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일종의 유언인 셈이다.
유언이 뭔가? 짧고도 의미 심장한 말이다. 이제는 눈을 감는 자신의 뒤를 이어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말이다. 유언에는 과장과 거짓과 꾸밈이 없다. 진실과 애정이 담겨 있을 뿐이다.
본문을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 이것을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있는 사람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의 삼위일체다. 아버지가 예수 안에 있으니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아버지와 예수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예수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믿음이요, 요한복음의 “실천적” 삼위일체 신학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다.
사실 이 점을 요한복음은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한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5:19),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5:30),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성취하라고 맡겨 주신 일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가 된다”(5:36).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6:38),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6:57),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10:38),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5).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분명하다. 예수가 아버지의 힘으로 살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한몸을 이루어 하나님나라 운동에 헌신한 것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수의 힘으로 살아 예수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주체적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잠재적 힘 곧 새 역사창조 능력에 대한 예수 혹은 요한공동체의 전폭적인 지지요 신뢰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운동으로의 이 초대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의 부름이기도 하다. 역사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 부름에 몸으로 응답한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힘입어 지금까지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믿음과 행동, 고백과 실천은 하나라는 걸 뼈아픈 반성 속에 기억해야 한다. “나는 예수가 이룬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은 신자의 주제넘은 교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참된 신자의 본분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 한국교회의 대다수 신자들이 믿는 예수는 우리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도 이미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 그분이 이미 다 이루신 그것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되는 예수가 아닌가. “정통” 신학과 교리에서는 예수와 인간의 협력과 연대에 “신인(神人) 협력설”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처단하고 있지 않는가.
2. "벗”을 위하여 - 요한 15:13
“밀알 하나”의 비유는 복음서들 가운데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된다(요한 12:24). 따라서 이 비유는 요한 공동체의 신학을 담고 있는 독특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비유는 예수의 임박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 비유가 예수가 직접 한 말씀인지, 아니면 요한 공동체가 예수의 입을 빌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 공동체의 이해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볼 때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 하나”에 빗대고 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식으로 섣불리 신학적 과장법을 들이대기보다는 생활 주변의 평범한 소재에 빗대어 예수의 죽음을 소박하고 알기 쉽게 풀이하는 쪽을 택했던 데서 요한 공동체의 담백한 멋이 극적으로 표출된다.
저 유명한 “포도나무”의 비유의 후반부를 이루고 있는 대목 또한 요한 공동체의 소박한 멋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의 죽음이 “벗”을 위한 죽음으로 이해된다. 벗을 “대신해” 죽는 게 아니라 벗을 참으로 사랑하기에 그 벗을 “위해” 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게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고 요한 공동체는 고백하고 있다.
“벗”이 무엇인가? 벗들 사이에는 위-아래가 없다.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교만한 우월감도 없다. 벗들은 동등한 수평적 관계 속에 있다. 설령 객관적으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인간적으로 자랑하고 내세울 게 많다고 해도 벗들 사이의 친밀한 우정은 그 모든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기 이익을 따지기는커녕 늘 상대방에게 뭔가 더 줄 게 없어 안달하는 끝없는 자기 비움의 아름다운 사랑이 바로 벗들의 우정이다.
“밀알 하나”,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깊은 우정의 결과물로서의 예수의 죽음!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죽음의 큰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심지어 모독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진리란 사실 평범 속에 있다. 과장되고 현란한 수사학으로 치장된 진리는 십중팔구 거짓으로 밝혀진다는 걸 우리는 삶의 체험으로 알고 있다. 설령 진리를 그런 식으로 포장하는 데에 그 무슨 검은 속셈이 없다고 해도, 그런 진리는 추상적 관념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거창한 신학과 교리를 끌어들여 해석하면, 의도했든 안 했든 그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실제는 상당 부분 왜곡되거나 상실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오늘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학과 교리로 덧칠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요한 공동체의 해석이야말로 가장 실천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대속”(代贖)이라는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대속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을 믿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처럼 예수의 죽음을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밀알 하나”의 죽음으로 해석하면, 우리도 예수처럼 살고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벗”을 그저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벗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벗을 위해” 죽은 예수. 초월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적 사랑이 넘치는 예수. 그래서 그 사랑에 감동되어 우리도 예수처럼 살려고 애쓰는 데에 신앙 생활의 멋과 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주제넘은 교만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마냥 크게 해석해서 예수를 우리의 다정한 “벗”이 아닌, 우리가 감히 닮아갈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 모시는 게 참된 신자의 미덕일까?
3. 종의 신앙, 벗의 신앙 - 요한 15:12-15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예수에 “관한” 온갖 이론과 해석들이 날로 세련되고 정교한 신학과 교리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다. 그러한 신학과 교리들 중의 더러는 “정통”이라는 화려한 꼬리표를 달고 교회와 교인들의 삶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사실 오늘 이 땅의 교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신학과 교리의 색안경을 통과한 예수이해다. 신학과 교리라는 것도 예수와 성서를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갖게 마련이지만, 주로 근본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선교 초기부터 아주 짙게 받은 이 땅의 교회들은 “이것만이 정통이고 저것은 이단”이라는 식의 편협한 예수이해에서 지금까지 헤어날 줄 모른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지식과 교리를 많이 모은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을 낳지는 못한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체적 결단과 실존적 예수체험에서 나온다. 남들이 예수를 믿고 생각하는 대로 나도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자세로는 마음으로 예수를 닮아가고 몸으로 예수를 따르는 참된 예수신앙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성숙한 신자라면 그 무슨 신학이나 교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의 예수,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고 체험한 예수를 당당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주체적인 고백이 없이 “예수는 인류를 원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보혈을 흘리도록 태초부터 각본이 짜여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은 껍데기만의 죽은 신앙고백이다.
이런 신앙고백은 우리를 제도교회의 충실한 교인, 즉 예수를 신격화된 종교적 대상으로 떠받드는 명목상의 신자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손발 걷어붙이고 예수를 따라 살게 하지는 못한다.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이 세상을 구원할 신성을 느끼고 날로 예수를 닮아 가는 인생을 살기로 결단하는 예수의 참된 제자는 만들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처럼 흠도 많고 죄도 많은 인간들이 예수의 벗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귀하고 신나는 말씀인가.
그런데 예수의 벗이 되는 데에는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엄숙한 과제가 뒤따른다. 한마디로 “내가 벗인 너희를 죽기까지 사랑했듯이 너희도 벗을 위해 그리 살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길은 두 갈래! 예수의 종된 믿음을 가질 것인가, 예수의 벗된 믿음을 가질 것인가. 예수의 종으로서 십자가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예수의 벗으로서 예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마가 8:34) 생명사랑 민중사랑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 양자택일 앞에 “적당히”라는 단어는 설 자리가 없다.
오늘 본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한 말씀인데, 본문 바로 앞의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요한 15:1)이라는 말씀이 눈길을 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는 것, 즉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유언의 진의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기쁨이며 행복이라는 뜻이 된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믿음의 길이 대체 뭐길래 예수는 우리의 여린 가슴에 이렇듯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 걸까?
하지만 내 주변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따라 숱한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기쁨 그득히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나도 그 믿음의 대열에 서고 싶어진다. 예수의 벗된 믿음에까지 자라나고 싶다.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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