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장 1-8절)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8절)
(요한 3:1-8
행 1:8)
사람이 자기의 주인이 되려는 그 근본을 바라다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욕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님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원죄의 본능은 이 욕심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이 욕심이 자꾸만 하나님을 내 중심에서 밀어냅니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해야 내 삶의 자리에서 이 욕심을 몰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를 부인할 수 있을까?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깨끗이 인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도록 허락할 것인가?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욕심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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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묘한 것은 이 욕심은 가치에 연결되어 있다 말입니다. 욕심은 우리가 버리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가치가 변해야합니다. 개를 보세요. 굶주린 개 앞에 닭다리와 금시계를 갖다 놓아보세요. 열이면 열, 하나같이 닭다리를 물고 뛰지, 금시계를 물고 뛰는 녀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가 다 최영 장군의 수제자라서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겨서 그러는 것일까? 아닙니다. “개는 금시계가 더 좋다, 금시계가 닭발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개도 가치를 알아서 금시계가 닭다리보다 더 좋은 것을 알게 될 때에는, 모두 금시계를 물고 뛰지 닭다리를 물고 뛰는 개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바꾸어져야만 욕심을 버릴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욕심은 결심이나 깨달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올시다. 연구하고 노력한다고 될 문제도 아닙니다. 가치관이 바꾸어져야합니다.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본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면 가치관은 확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 세상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니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로 바울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지식도, 부도, 출세도 배설물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