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제한적 경험]
저는 20대 후반기부터 40대말까지 25년 가까이 미국에서 소수자로 살았다.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 핵심 영역 중의 하나인 민중성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경험이 되는 주변 소수자로서는 깊은 현실적 체험을 갖고 있지만, 복음의 틀로서의 한국문화 특히 전통제의라는 또 하나의 핵심 영역에 있어서는 오히려 현실적 체험의 한계가 있다.
저는 종교학자도 아니고 전통 제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목사로서 이웃종교와의 대화에 노력하고 있고 성서의 전승 그리고 기독교 또한 다양한 문화적 전통 속에 있다고 하는 열려진 신앙 이해를 갖고 있는 목사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현재 남한의 교회들 가운데서는 국악찬송가를 발행하고 국악 찬양단인 예향을 15년동안 발전시켜오면서 한국적 전통을 발굴해내고 이를 교회 내에 접목시켜온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굳이 또 다른 장점이 되는 개인적인 이유를 찾아본다면 기독교는 가톨릭을 포함해서 선교역사의 짧음으로 아직까지는 한국인들에게 외래종교 곧 서양종교라는 인식을 지을 수가 없고 예배에 참여해보면 그 인상은 곧 현실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현재 남한이 받아들이고 있는 서양 기독교의 다양성을 누구 못지않게 실제로 접해 본 한국목사로서 서양 기독교의 문화적 전승을 비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문화적으로도 애써 찾아보고자 노력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설 때가 많았고,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시에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한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나 스스로 나의 한국전통문화와 기독교의 접목은 매우 제한적이다.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위에는 개량 한복이고 아래는 서양 바지이다. 이는 평소의 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부려 입고 왔다. 물론 지금은 위아래 한복을 입지만, 평소에는 넥타이를 매기 싫어하여 위에는 한복이 좋고 바지는 한복이 끝을 졸라매는 졸라매기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느낌상 불편함을 갖고 있어 이렇게 짬뽕 혹은 퓨전형의 옷을 입고 다닌다. 이는 이것도 저것도 함께 라는 이중문화의 다양성의 혜택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체성 상실의 부정형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상징적으로 오늘의 내가 맡은 제목이 기독교제의와 한국 제의전통과의 만남이라는 제목에는 부합할 수 있는 모습일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인의 입장에서 본 남한 기독교의 위기]
우선 오늘의 주제에 맞춰 전통문화적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을 얘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서울대 종교학과 정진홍교수는 “선교 백주년을 맞는 한국의 기독교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아직도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상을 운위할 수 있는 어떠한 전승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슬픈 현실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는 경험 내용이지를 못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한국문화에서 예수는 인식의 내용일 필요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대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한국인의 예수체험] 다산글방 1990. 74쪽)
이어지는 글에서 정교수는 한국 기독교를 원시종교의 제이론에 따라 예수상의 모습을 토테미즘(하나의 집단에 의해 신성시되는 동식물 또는 자연물), 타부, 마나(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힘)로 설명한다. “교회는 예수 토템의 기치를 휘두르며 세상-다른 토템-과 스스로를 구분하는 열심 속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신학은 교회와 신도들을 질책하는 오만한 자리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타부화 시켰으며, 신도들은 제각기의 삶의 자리에서 부적처럼 지녀진 예수의 상을 그려 놓은 것에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른 모습들의 예수는 그렇게 복합적으로 한국 교회에 나타났다. 따라서 하나의 전승으로 정립될 수 있는 어떤 이미지도 기독교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위의 책 76쪽)
따라서 “(예수상이) 어떻게 기독교의 경험내용으로 수용되는 살아 있는 종교상징으로 부활할 수 있고, 아울러 문화가 스스로를 갱신하는 계기를 발견하는 살아 있는 종교상징으로 인식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기독교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이른바 계시가 수용되는 인간적인 상황, 곧 문화에 대한 성숙한 눈을 한국기독교가 (눈을) 뜨기 전에는 아직 요원한 일에 속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성 또한 새롭다.”
이미 17년 전에 말해진 정교수의 기독교비판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할뿐더러 8,90년대의 토착화 신학 혹은 문화신학의 노력들이 더욱 퇴보한 오늘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면 몇 해 전 영국의 맨체스터대 연구팀이 1세기 유대인의 두개골을 이용하고 당시의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얼굴 모습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예수의 얼굴을 추정한 그림이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림을 보면 예수는 뭉툭한 코에 짙은 갈색 피부,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백인의 예수상과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 흑인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백인이고 국적은 유대가 아닌 미국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인가? 7,80년대에는 우리 문화를 배경으로 삿갓을 쓴 예수상이 상당히 수용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은 선진화라는 단어에 맞물린 서구화 운동으로 인해 점점 더 반전통문화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는 남한 기독교 전체의 커다란 위기이다.
[한국 예배 전통에 스며든 외래문화]
그런 의미에서 향린교회의 전통문화 수용과 접목의 노력은 한 개교회의 특수목회로 남아있어서는 안되고 좀 더 넓고 깊게 확산되어야 한다. 향린교회는 87년 6월 항쟁의 국민운동본부가 형성될 만큼 지난 50여년의 교회 역사는 사회적 실천에 앞장 서는 진보교회로서 잘 알려져 있고 동시에 국악예배를 통한 전통문화 수용에 앞장 서왔다. 15년 전 교회개혁에 대한 실천들을 발표하면서 예향국악단을 창설하고 국악찬송가를 발행하였다. 복음과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관계이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복음을 담는 그릇은 시대와 이를 받아들이는 구성원들의 문화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교회 안에서 기타를 치는 일로 찬반이 많았다. 많은 목사님들이 어떻게 세상 악기인 기타를 교회 안에서 칠 수 있느냐고 해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타는 말할 것도 없고, 드럼까지 성전 안에 두고 있다. 그런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피아노나 올갠도 처음부터 교회가 만든 종교용 악기가 아니라 본래는 세속 악기였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전통악기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를 위시한 많은 민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전통문화에 접목한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내고 있다. 그들의 예배에는 전통 춤과 전통 악기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서구일변도로 되어 있어 기타나 드럼을 예배에 사용하면서도 장구나 징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에는 한 가족이 처음 저희 예배에 참여했다가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를 듣자말자 절간에 온줄 알고 기겁을 해서 나간 적이 있다. 왜 다 함께 묵도합시다. 하면서 땡! 하는 탁상 종은 당연시 여기면서 우리의 고유 악기인 징소리에는 기겁을 하는 것일까? 사실, 탁상에 있는 종을 치는 교회는 제가 아는 한 한국교회밖에 없고 이는 일제의 군국주의와 일본세속식전의 영향이다. 또 결혼예식이나 성찬예식 할 때 하얀 장갑을 끼는 것 또한 일제의 영향이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식들 가운데는 실상은 성서와 전혀 관련 없는 외국의 문화적 전통이 들어 있다. 자기 것을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부심이 없는 사람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보혈’ 혹은 ‘피’에 관련한 찬송들이 많다. 실상 이런 찬송들은 모두 19세기 말 미국에서의 천막 부흥운동 때에 자주 불려 지던 노래들이다. 미국에서 10년 넘어 함께 동역했던 헨리페리목사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은 프린스톤신학대학과 예일대학을 나온 교회사 교수이자 3대째 장로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런데 그런 노래는 처음 들어본다고 한다. 이런 노래들은 일부 교회에서 한때 부흥성가로 불려지다가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어 사라진 노래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남한의 교회에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세계 교회의 흐름으로 보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변화에 더딘지 그리고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알 수 있다.
더 심각한 예는 기독교 장례식장에서 어김없이 들려지는 찬송가 중에‘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이다. 아마 장례곡 선호도 1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 찬송으로 버젓이 부르는 교회는 남한교회뿐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더군다나 장례식에서 즐겨 사용하는 교회 또한 남한교회뿐이다. 이 노래는 아일랜드 민요로 지금도 아일랜드 선술집에 가면 맥주 몇 잔 먹고 거나하게 취하면 그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이다. 오랫동안 영국식민지로 살았던 그들의 슬픈 가락이 우리 한국 사람의 정서에 딱 들어맞아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외국의 민요를 예배의 찬송가로 사용하면서도 우리의 민요는 거부하고 있다. 만약 예배 중 찬송가로 아리랑을 부른다면 어찌 될까? 그러나 실제로 미국장로교 찬송가에는 ‘아리랑’이 들어가 있고 미국교회들이 한국 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릴 때에는 이 노래(찬송)도 부른다. 그렇다면 애국가는 어떠할까? 물론 단연코 거부할 것이다. 예배시에 국가를 부르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 그런데 우리 찬송가에는 독일과 영국의 국가가 들어가 있다. 가끔 목사님들 모이는 곳에 한복을 입고 가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은 우리 문화의 병든 모습이다.
[서구로부터의 탈피, 성서의 융합문화에로의 복귀]
지금까지 서구선교신학은 서구문명권 밖에 있는 문화는 이방문화요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았다. 특별히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저등한 것으로 여겼고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 찬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래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시켰고, 전통음악이나 풍습을 멀리하였다. 그로인해 지금도 명절 때만 되면 조상제사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많은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제사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공동체의 일치와 화평을 위해 제사에 참여할 것인가? 이를 조화롭게 만드는 제3의 길은 없는 것인가?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를 포함한 모든 행위 예식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절까지도 우상숭배로 간주하였다. 절은 한마디로 어른에 대한 공경심의 한 표현이고 예절이었다. 매일 아침 자녀들이 위 어르신들에게 절을 하면서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그게 우상숭배인 것은 아닌 것이지요. 악수만 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의 절이 우상숭배로 보였을 것이고 반대로 어른에게 반갑다고 손을 내미는 저들의 행위는 예의도 모르는 상놈들의 짓거리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파수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수용도 중요한 것입니다.
향린교회에서 2년 전에 예배의 말미에 한번 굿을 도입하여 보았지만 한번으로 그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굿을 비롯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배라는 말을 순수한 우리말로 바꾼다면 어떤 말이 적절할 것인가? 본래 예배라는 한자말은 예의범절을 다하여 절을 한다는 유교와 불교의 배경을 갖고 만들어진 말이다. 예배의 순수 우리말을 굳이 찾자면 ‘굿’이고 기도의 우리말은 ‘비나리’이다. 나는 내가 믿는 하느님이 서구문화를 통해서 보다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화를 통해 당신을 만나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한신대 실천신학 명예교수인 박근원박사는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하늘님 제사는 유교전통의 제사와도 다르고 기복과 치유 위주의 민간신앙의 제의와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민간신앙과도 다른 성격의 것이다. 지난해 동안의 하늘님의 보호에 감사하고 미래의 평안을 간구하는 소위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면서 천지신명께 드리는 축제였다. ... 한국 민속학의 연구결과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무속과 엉켜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없는 성격의 민족적 제사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원시 ’하나님 예배‘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이 우리 조상들의 하늘님 제사의 대표적인 것들이었고 이런 축제들의 유산이 그리스도교 예배와의 접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이런 축제유산이 오늘까지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 마을공동체의 축제인 도당굿이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위기가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조 500년 동안에 이 축제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우리의 민족축제 전승과 관련된 큰 비극은 19세기말 조선조의 개화파와 일제 침략집단과의 야합, 그리고 이 개화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개신교 선교에서 비롯되었다. 명분은 우리 사회에서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를 쓸어낸다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서낭당을 불태우고 당굿을 금지시켰다. 일제는 식민정책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모든 축제를 못하게 하였다....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회 역시 식민주의 개화 이데올로기를 등에 없고 당굿의 장소였던 성황당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교회당을 세웠다. 그 사례도 수백 개나 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징적인 의미이다.
민족적인 축제의 장소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자리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리 겨레의 하늘님(당굿)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해서 우리 민족의 축제를 계승하고 보전할 수 있을 때에는 그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제의민족 전승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극히 변두리에서 병 고침과 기복주의와 같은 무속적인 기능만 수용했기 때문에 그만 의미를 잃고 말았다. (박근원 미발행 원고 ‘한국가락 찬송으로 드리는 예배’)
사회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실현의 최고 단계를 자아실현의 단계라고 보고 있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근본적인 마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전통을 회복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우리 민족이 자아실현의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한국과 유대의 지정학적 동일성으로의 융합문화적 전통]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일반적 의미에서 굿이라고 하면 으레 토속신앙이 떠오르고 그리하여 푸닥거리 또는 무꾸리와 굿을 혼돈하기도 한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하는 굿이란 집안에 병자가 있을 때, 울긋불긋한 원초적 색깔의 이상야릇한 옷과 모자를 쓰고 장구소리와 꽹가리 소리에 맞춰 칼춤을 추는 모습니다.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교나 교회에서는 이를 빨리 버려야할 저속한 토속문화로 치부하였다. 물론 해방 이후의 굿은 일제의 영향으로 어떤 민중해방적인 요소를 완전히 삭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백기완선생의 정의에 의하면 굿이란 원래 똑같이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모여서는 논의 끝에 아픔을 강요하는 압제에 대한 공통의 쟁점을 확인 집약 하고, 그것을 쟁취할 알기(주체)를 바로 세우며, 마침내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온 과정을 굿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박하게 이야기하면, 굿이란 민중이 주도하는 민주적인 모임이었으며 다시 이야기하면 반봉건 혁명의 세계, 그 염원을 창조하는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민중의 염원의 세계를 실제적인 사회구성체의 문제로 환원시켜 생각했을 때 뚜렷이 부각시킬 모형이 애매했던 것은, 당시의 반봉건 운동의 한계,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요인으로 보아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굿을 모인 굿하는 사람들은, 그네들 굿의 최종 목표 그 염원의 세계를 극적으로 재창조하며, 갖은 풍물과 재비들을 앞세우고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가 굿쟁이가 되어 한바탕 밟아대고 제치고 휘저었던 것이다. (백기완 [민족과 굿] 민족과 굿, 학민사 1987 9쪽)
민중적 쟁점의 굿거리는 필연적으로 그 내용이 봉건체제 및 그 지배계층에 대하여 적대하게 되고 따라서 봉건적 여러 가치에 대립하게 됨으로써 봉건 지배계층은 끊임없이 우리 민중의 굿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먼저 민중적 쟁점과 굿거리와의 연결을 차단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민중굿의 비정치화, 요샛말로 하면 연희적 성격만 남기는 순수성에로의 굿의 퇴화공작이다. 특히 일제하에서 이러한 민중적 쟁점은 철저하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점에서 서양선교사들의 눈에 굿은 미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기완선생의 굿의 정의 혹은 불합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주역으로서의 굿, 곧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굿이 본래 우리 고대사회에서 하나의 마을공동체를 하나로 엮어가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때, 굿의 이러한 성격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악에도 아악과 향악이라는 두 계층의 음악이 있다. 아악의 연주는 음악연주의 감상만을 하게 되어 청중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향악은 청중의 참여를 전제로 한 음악이다. 사실, 지금의 향린교회의 전통음악은 형식적으로 본다면 아악과 향악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떤 종교이든 처음 시작부터 경전과 예배의 형식이 제의가 만들어진 경우라는 것은 없다. 몰몬경과 같이 아예 계시를 받아 나무 밑에서 주었다고 주장하는 극히 소수의 경우를 빼면 모든 종교적 경전은 창시자의 처음 말씀에 제자들의 얘기가 덧붙여지고 해석되어서 만들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의 또한 시대와 역사를 통해 이룩되는 어떤 한 공동체의 문화적 산물이지 절대적인 것은 없다.
우리는 성서를 단지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민족종교의 결산물로 보는 견해가 많고 이는 어느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땅의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강대국들의(이집트, 페르시아, 바벨론, 알렉산더대왕, 로마 등) 지배를 받아왔기에 그들의 종교적 전통은 혈족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이라는 기본 단위를 고수하려는 매우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나아갔지만, 동시에 문화적으로 그들은 탈민족적인 개념을 통해 세계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에서 신앙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은 언제나 이중문화의 다양한 삶을 살았고, 요나서에서와 같이 이방민족의 구원을 얘기하고 있고, 성왕으로 일컬어지는 다윗왕의 족보에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이방여인들이 4명이나 끼어있다. 성서 또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로 씌어지고 전승되어 왔다. 지금도 유대인들만큼 세계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민족도 드물다. 유대인들은 외래의 문화나 종교제의를 자기 안으로 이를 창조적으로 소화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예 창조설화의 7일은 바벨론 문화배경)
우리 또한 그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고 그러한 창조적 문화적 힘을 갖고 있다. 맞는 예인지 모르겠지만, 이어령교수는 “한국 문화는 푸전문화, 즉 섞는 문화가 발달했다. 김치의 발표식은 화식과 생식의 중간정도로 양쪽의 장점을 다 갖고 있다. 주택 역시 마루의 남방식과 온돌의 북방식이 섞여 있는게 특징이다. 의복도 쉽게 벗을 수 잇는 남방식 저고리와 대남처럼 묶어야 하는 북방식이 혼재해 있다. 반도라는 지정학적 요소가 한국을 문화의 완충지대로 만들었다. 바로 솔류션과 융합이 이루어지는 곳이 반도인 것이다.”(한겨레 2007년 4월 6일 25쪽) 따라서 이러한 동일한 지정학적 위치 속에서 형성된 창조적 융합문화로서의 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와 한반도 안에서 형성된 전통제의와의 만남은 어쩌면 보다 쉽게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생활방식에 있어 이런 융합의 문화 그리고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 등에 의해 서구기독교사상과 한국전통사상과의 접목이 계속 시도되었지만, 제의적인 의미에서 이런 접목의 시도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톨릭은 제사형식에 있어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것도 매우 제한된 한계 안에서의 개방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인 제의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과 기독교의 제의라고 하는 것도 너무나도 다양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기독교의 제의는 구약성서에 기초한 초기 유목문화와 후기 정착문화로서의 유대민족의 문화적 양식이 들어가 있고,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여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예배 제의에 들어와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연결되어 있다. 특히 현재 기독교의 경우 크게 구교(가톨릭)와 신교로 나누이는데, 구교 또한 크게 서방기독교와 동방기독교로 나뉘어져 제의에 큰 차이가 있는데 이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문화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고, 신교 또한 성공회(영국) 감리교(영국) 장로교(네델란드 스코트랜드) 루터교(독일) 침례교(미국) 등 교단으로 나누이고 이 교단들 또한 예배 형식에 있어 많은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또한 예배 형식에 있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에 뿌리를 두고 우리에게 맞게 만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의 전통제의가 심겨 있는 민속신앙의 사상적인 장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민속신앙의 사상적 장점]
첫째 민속신앙은 어떠한 신조도 교리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조직화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도 결코 신앙행위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으며 따라서 신앙행위가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지도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위대한 인간평등사상(홍익인간, 대동사상)이며 제사장은 민중의 봉사자이지 절대로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민중중심의 사상(백성이 하늘, 인내천 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바로 제사장격인 무당이 신앙의식 수행 때만 민중의 우위적 자리에 있었으나 평상생활에서는 민중의 종복이 되게 하였다. 무당은 굿을 하고 제를 지낼 때 무서운 존재였다. 마을의 제일 큰 어른도 무당 앞에서는 쩔쩔매며 그 명령에 절대복종. 그러나 일단 굿이나 제사가 끝나면 무당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조롱을 당하면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도련님’ ‘아가씨’하며 섬기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의 조직으로 사회의 지배체제로 존재한다.
둘째로 우리의 민속신앙은 여타 민족의 신앙처럼 자연으로부터의 차별화로 시작합니다만 결국에는 자연으로 합일되는 사상을 구현했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차별화하여 우월성을 획득하고자하여 더 힘이 강하게 여겨진 자연형태를 신봉했지만 절대로 자연을 지배하거나 착취, 파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국은 스스로도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 삶이 끝나고 목숨이 떨어지면 우리는 ‘돌아간다’고 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심하게 갖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함께 지내던 가족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 산 사람과 떠나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년 정도 죽은 사람의 음식을 같이 차려드렸다. 3년이 지나면 서서히 인간사회로부터 자연으로 귀화되기 때문에 매일 함께 먹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일 년에 한번 차려드렸다.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상은 그 자연을 지배하거나 파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벽에 못 하나 박을 때도 이른바 방위를 본다고 무당을 찾아가서 물은 연후에 시행하고 땅을 파거나 나무를 벨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도록 그 이념을 제공하고 있고 천국이라는 내세관을 통해 민중을 호도하고 있다.
셋째, 우리 민속신앙은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사상에 기초한다. 인간의 의식이 개발되면서 자연과의 차별화를 시도할 때 자연 중에서 가장 두려운 대상은 역시 하늘이었다. 그래서 어느 민족이나 거의 모든 신앙형태의 최고의 대상은 하늘이었다. 이 하늘을 의인화해서 그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자가 지배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민속신앙에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인 하늘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압 착취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인간 자체가 된 본질이라는 사상에 기초한다. 이 하늘이 인간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우리 민족이 한울님(桓因)의 자손이라는 시조개념을 낳게 되었고 다시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뿌리 깊은 인본주의 민중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기독교의 신 야훼도 하느님(또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놓고 우리 민속신앙의 하느님사상과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기독교의 신 야훼는 인간을 창조한 절대유일신이라는 점이며 또 인간은 절대로 신과 대적할 수 없는 야훼의 피조물이라는 사상인데 반하여 민속신앙의 하늘은 우리가 태어난 자리이며 우리가 돌아갈 자리인 바로 (하늘이 곧)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상이다. 자연합일사상적인 면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죽음을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죽으면 곧 절대 무변의 하늘로 환원된다고 믿었다.
나는 여기서 인류가 지난 세기 그리고 특히 오늘날 세계 분쟁의 근저에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종교분쟁이 있는데, 바로 이 세 종교가 모두 절대 유일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경쟁과 폭력을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 종교의 절대유일신 개념을 보다 종교의 교리나 제도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류 문화적으로 폭넓게 그 개념을 넓혀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다원주의적인 신앙형태일수도 있겠지만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적으로 보는 견해는 너무나 원시주의적인 신앙형태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 혹은 우리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이다. 절대유일신의 나라는 대체로 그 자국 안에서의 정의개념은 강하다. 그러나 자기만의 경계를 짓고 밖의 그룹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그래서 신을 대신한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하고 있다. 반면 인도의 다신적인 종교사회에서 정의개념은 매우 약하지만 평화개념은 매우 강하여 다른 신앙인이라고 하여 차별하거나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결론으로 이러한 민속신앙을 장점을 잘 키워내어 현재 서구화 일변도로 가속화되어가는 남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문화적 열등성을 극복해내고 다른 종교나 문화의 장점을 잘 수용하여 새로운 민족종교 혹은 민족정신으로 되살아나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민속신앙이 사는 길이지만 이는 동시에 이제 백이십년 넉넉잡아 이백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민속신앙의 복의 개념이 너무 개인화 물질화되어 있어 이는 불교와 유교 도교 기독교 모두를 타락시키는 기본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천박한 시장자본주의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제 종교가 말하는 복의 개념을 어떻게 민족 공동체적으로 회복시키는가 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