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참 정신은 우상으로부터 자유정신
10월은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되새기는 달이다. 종교개혁의 참 정신이 무엇일가? 흔히 개신교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신학생들처럼 신학이라는 학문의 물을 조금 맛본 사람들은 흔히 종교개혁의 세가지 모토를 머리에 떠올린다. 오직 성경만,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이라는 세가지 표어가 그것이다. 그런데 매우 역설이지만, 세 가지 표어 앞에 ‘오직’이라는 강조 형용사를 붙임으로 해서, 종교개혁의 참 신앙이 도리어 실종되는 아이러니와 위기를 본다. 빛이 너무 강하면 그림자도 그만큼 진하게 생기는 이치 때문일까?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관습적으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모토로서 반복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갈파한다면 우상으로부터의 자유정신이다. 우상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답게 예배하고 경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되찾자는 운동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역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인지라 어떻게 해서든지 우상을 만들려 하고, 우상을 섬기면서 만족하려는 자기기만적인 존재다. 물론 원시시대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신적영물이든 이념이든 가치이든 종교교리이든, 그런 것들을 하나님처럼 절대화하고 섬기면서 그 우상들에게 충성하고 아부하고 자기 이익도 적당히 취해가는 짓거리를 말한다.
루터, 칼빈, 멜랑히톤, 쯔빙글리등 종교개혁의 제1세대들이 당시에 싸웠던 우상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신하는 교황권이었고, 성경에서 솟구쳐나오는 복음진리를 대신하려는 스콜라신학이었고, 십자가의 대속은혜와 성령의 은사들을 무효화시키는 공로신앙 체계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개혁당시 금빛으로 도금한 금관의 예수만 있었을 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는 ‘가신관 쓴 예수’가 교회의 장식물로서만 벽면에 걸려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공의, 사랑, 평화가 실종되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배반한 개신교의 교권과 교리주의
그렇다면, 종교개혁운동 이후, 기독교 교회사는 참다운 복음만을 증언하는 교회로서 충실했던가? 잠시동안 그런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개신교의 역사는 제2의 종교개혁을 필요로할 만큼 ‘프로테스탄트의 기본원리’를 배반해온 역사였다. 성경을 재발견한 것은 정당했으나 성경문자주의에 떨어짐으로서 성경을 절대화하는 ‘성경책 우상화’라는 위험수위에 까지 이르렀다. 중세기 교황권을 비판하고 나온 프로테스탄트가 중세교권보다도 더 지독한 교권주의로 무장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오직 믿음만의 원리를 강조해온 개신교는 ‘성령충만, 선교열정’을 구원의 조건인양 내세우고 있다. 스콜라신학을 비판하고 복음을 재발견한 개신교신학자들은 스콜라신학보다 더 굳어지고 생명력없는 근본주의 신학강령으로 무장한 십자군단이 되었다.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 오직 믿음만(sola fide), 오직 은총만(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의 삼대표어가 문제가 되고 말았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오직 만'이라는 절대적 표현은 하나님 자신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그 말을 붙이니 '경전절대 책종교'가 되고, 믿음에 그 말을 붙이니 '행함없는 말많은 신자'가 양산되었고, 은총에 그 말을 붙이니 '싸구려 은총'이 남발하게 되었다. 제1세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오늘에 다시 되살아 나타난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종교개혁정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도리어 철저하게 종교개혁정신에 반대되는 반종교개혁적 종교집단이라고 평할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제3바벨론포로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을 담고 있는 문서들 중에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론서(論書)가 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잡혀가 고역과 모멸을 당한사실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잃고 이교적 문명안에서 변질되었던 것을 비유로 표현하여, 중세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루터가 비판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잘못된 중세스콜라 교리신학 특히 세례와 성만찬 이외 다섯가지나 더 많은 의식들을 세크라멘트(聖禮)로 선포하고 번집한 성례주의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의 ‘생수와 생명의 떡’에 접근을 막는 영적 포로기를 지내게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20-21세기 세계그리스도교 특히 미국과 한국의 주류 기독교세력은 ‘제3 바벨론 포로시대’를 살고있지 않는지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야 하겠다.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은 비판을 위한 비판, 억지소리로 교회를 훼손하는 안티기독교 신학자의 잠꼬대정도로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100년 이후 쯤 우리의 후손들이 20-21세기 주류 개신교 교회들의 신앙과 신학이 참으로 복음적이었고, 생명력이 차고 넘쳤으며,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훌륭히 감당한 세대였다고 평가할가?
흐르는 역사의 강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위상이 총체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중세기가 모두 ‘어두운 암흑시대’였던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영적으로 위대한 시대였던 면도 있다. 그러나, 근세가 동트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서 뒤돌아 볼 때, 중세기 그리스도교를 지탱했던 교황중심의 교권과 스콜라신학이 공헌만이 아니라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이 보인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이후, 성인이 된 서구중산계층이 이루었던 19세기 위대한 선교역사와 자유주의 신학의 업적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1차대전을 겪고나서 보이게 되었다. 백인서구중심 문화제국주의와 인본주의와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정치에 예속된 기독교였음이 보였던 것이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뉴라이트 운동이, 훌륭한 지도력을 지닌 기독교 성직자들의 지도력을 인정하더라도, 시대를 휩쓸고 있는 세속적 자본주의 물결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한 ‘제3바벨론포로’ 시대였다고 평가 할 것이다. 아직도 냉전논리와 반공논리와 색깔론으로 사고체계가 굳어진 교회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큰 선장들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무한 성장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수량적 실증주의를 복음의 표징이라고 강변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기독교국가의 실현이 곧 하나님나라라고 동일시하는 현대판 젤롯당이 많다. 한국 기독교는 ‘친미, 반공, 자본주의적 성공’이라는 제3바벨론시대를 살고 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