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전파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였는데 교회가 그 대신 등장하게 되었다”(알프레드 로이지).
이 짧은 한마디는 매우 시사적이다.
먼저, 우리는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수없이 반복되는데 “교회”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두 번 언급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바울서신에서는 교회라는 표현이 거듭 나오는데, 수십 년 뒤에 기록된 복음서에서는 교회라는 표현이 거의 전무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교회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그리고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은 서로의 관심사가 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사로서 각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 개척교회들을 신앙공동체로 육성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으면서 서서히 제도화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탁월한 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교회 안에서 제도적 요소가 공동체적 요소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적 요소는 언제나 그 우위성을 유지해야 한다.... 공동체적 요소는 언제나 적절한 제도적 표현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바울도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제도적 표현”으로서의 교회 사이에서 무척 고민했음을 우리는 그의 여러 서신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바울에 비해 훨씬 더 래디컬(radical)하다. 그들은 교회라는 틀은 세상 한복판에서 주로 민중과 함께했던 예수운동을 담는 그릇으로는 너무 적다고 판단했다. 바울 당시 이미 제도화로 치닫던 교회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가일층 제도화되어 “하나님 나라라는 혁명적 이념의 운반체”(보프)가 되기에는 너무 폐쇄적이고 현실에 안주하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복음서 저자들은 “교회”라는 표현을 애써 자제했다. 그 대신 구전 전승, 즉 민중들의 기억 속에 전해지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가급적 교리가 아닌 이야기로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바울서신과 복음서, 바울과 예수, 교회와 하나님 나라, 바울의 교회운동과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대비시켜 보는 것은 뜻깊다. 특히 주로 바울서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그 대비는 중요한 의미를 띤다.
아니다! 어쩌면 바울도 복음서 저자들 못지 않게 래디컬했는지 모른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처형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을 전하겠노라고 고백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즉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분량”을 채워야 할 예수운동체로 이해했다. 바울은 그 자신이 몸소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뿐만 아니라 예수의 다정한 벗이었던 세상의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인간적 권리를 회복하는 일에도 발벗고 나섰다. 바울서신에 대한 최고의 주석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바울의 생애 그 자체다.
그렇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몸”이다. 예수 안에서, 예수정신으로 살아가는 예수의 몸들, 예수의 분신들의 친교와 교육과 봉사의 공동체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예수를 대신하여 예수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하나 둘 이루어 가야 할 예수운동체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과 참모습을 입증해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또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확실하다. 이것은 메시아가 스스로, 또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교회는 남을 위한 존재, 곧 세계를 위한 존재다. 남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주는 것이 교회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 애쓸 때, 그런 교회는 벌써 자기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호켄다이크).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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