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큰 믿음

2009년 9월 20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이사야서 49:1-4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아멘.


로마서 9:9-13
그 약속의 말씀은 “내년에 내가 다시 올 때쯤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한 것과 같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5:21-28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아멘.


오늘 예수께서 하나님나라 말씀을 전파하시면서 그 방식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가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여인이 귀신 들린 딸 아이를 데리고 예수를 찾아가는 장면인데 찾아 가서 예수께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결국 고쳐주셨지만 고쳐주시는 과정이 저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인데 같은 본문의 마가복음에 보면 가나안 출신의 한 여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인’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명칭은 ‘시리아, 케네시아’라고 합니다. 유럽의 지도를 보면 침략하고 침략당하고 회복하고, 지도가 하도 바뀌어서 중동의 지도가 보기 굉장히 힘듭니다. 앗수리아, 바빌론, 희랍, 로마, 페니키아, 마케도니아,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오는데 시대마다 침략하고 당하고 이런 역사입니다.


가나안 땅 출신의 여인이 예수께 찾아왔는데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한테는 일종의 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과 이스라엘은 사이가 아주 나쁩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출신의 여인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가나안이 지금은 페니키아라는 지역의 부속이 되었고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자기 족속을 잃은 것도 힘들지만 남의 나라 부속이 된 것도 힘듭니다.


이 사람이 자율과 적대 관계에 있는 예수라 이름하는 유대인을 찾아옵니다. 딸이 하나 밖에 없는데 귀신이 들렸답니다. 말이 좋아서 귀신들렸지 정신 나간 미친 딸을 가진 여인입니다. 어머니 심정은, 유태인이든 가나안사람이든 누가 됐든지 어떤 의사든지 내 딸만 살릴 수 있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당연한 심정입니다. 딸만 살릴 수 있다면.


그런데 이 딸이 보통 상처가 났으면 의사를 찾아가겠는데 귀신들렸답니다. 귀신들리면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일상생활을 못 하고, 비정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같은 물건을 보아도 비정상적으로 사고하고 하늘을 향해서도 땅을 향해서도 귀신들리면 정상인이 아닙니다. 정상인이 아닌 귀한 딸, 가슴에 품어 안은 이 딸은 하나님이 여인에게 주신 정말 힘들게 안아야 할 십자가입니다. 귀신 들린 딸을 가슴에 안고, 십자가를 끌어안고 “하나님, 나한테는 부활이 없습니까? 십자가가 마지막입니까? 귀신 들린 딸과 살아야만 합니까? 이 아이를 낫게 해 주십시오. 낫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귀신만 나가면 됩니다. 나가면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이 심정 가지고 예수한테 왔습니다.


예수님은 들은 척 만 척 하십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하도 간구하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적당히 기도해가지고 고쳐서 보내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너무나 차갑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잃어버린 자를 위해서 왔지 너 같은 이방여인을 위해서 온 게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렇게 박절하게 한 여인을 비참하게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짓밟던, 쫓아내던, 딸만 살릴 수 있으면 무슨 행동도, 무슨 치욕도, 인권유린도, 인격모독도 다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살려주십시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예수께서는 이랬을 겁니다. “그래, 나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신분이 높고 정통파인 당시의 이름을 부른다고 움직일 것 같으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이 또 너무 처절합니다. “자녀들이 빵을 먹는데 자녀들이 먹는 빵을 유대백성들끼리 먹는 하나님의 축복을 개에게 줄 수 없다.” 이방 여인을 ‘개’랍니다.


‘개에게는 빵을 줄 수 없다.’ 지금이라면 난리가 날 말이지만 당시 풍속에서 보면, 선민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 전부를 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 여인은 개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별로 상심이 안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여인이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개도 빵을 먹다가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잖습니까?” 집요합니다. 예수의 짓밟는 것도 집요하고 여기에 저항하면서 딸을 살리고 싶어하는 욕구도 집요합니다.


결국 예수께서 포기하십니다. 포기하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가 보아라. 네 딸이 나았다.” 그 순간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나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진실된 믿음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하는 아주 간절한 말 중에 ‘개도 자녀들이 빵을 먹다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는 말을 다시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선택받은 모든 신도들에게 임하는 걸 압니다. 그러나 비참한 한 인간에게도 남겨진 몫은 있잖습니까? 그 잘나고 수많은 건강한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도 있지만 남들이 눈 여겨 보지도 않는 정말 비참한, 천박한, 천한, 남들의 발끝에 짓밟힌 한 피조물에게도 남겨진 부스러기 같은 몫은 있잖습니까? 그 몫을 저는 차지할 수 없습니까? 우리 딸은 그 몫이라도 받으면 되겠는데 불쌍한 여인에게, 여인의 자식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당신, 아담의 후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선민의 대표자여, 하나님의 아들이여, 인자여, 신자여, 왜 나한테 안 줍니까?’


예수의 대답은 “네 믿음이 크도다.”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태인인 예수는 유태인에게 하나님의 축복만 준 게 아니라 적대관계에 있는 이방인에게도 천민인 이방인에게도 개 취급당하는 이방인에게도 축복을 주셨는데 그 축복은 “네 믿음 때문에 나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여인을 해결했습니다. 믿음이 하늘을 움직였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유태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초월합니다. 믿음은 크면 클수록 막힌 담을 헙니다. 믿음은 적대감을 뛰어넘습니다. 믿음은 유태인이건 이방인이건 정상인이건 미친 사람이건 인간이 만든 모든 경계를 뚫고 해결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오늘의 상황에서 보면, 우리 교회는 에큐메니칼 교회입니다. 믿음이란, 에큐메니칼 운동, 에큐메니칼 정신의 기본입니다. 믿음은 뛰어넘습니다. 담도, 철사줄도, 많은 것을 뛰어넘고 간격을 뛰어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유태인에게 복음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그렇게 예수는 뛰어넘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뛰어넘읍시다.


이 여인의 믿음은 귀신이 나갈 정도로 뛰어넘었습니다. 귀신이 무엇입니까? 귀신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보지 못했지만 귀신 생각만 해도 징그럽습니다. 귀신은 이 여자 아이를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상을 깼습니다. 귀신의 역할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는 것이 귀신입니다. 귀신한테는 하나님처럼 거룩함이 없습니다. 귀신한테는 하나님처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귀신 나가라는 말은, 귀신 나간 자리에 하나님이 있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모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모시면 평안합니다. 하나님 모시면 기쁩니다. 하나님 모시면 귀신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려고 하지만 하나님 모시면 우리가 몰린 죽음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구원에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슴에 끌어안은 엄마는 귀신이 나감으로 인해서 부활을, 아이의 부활을 자기 자신의 고통에서 부활을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주십니다. 귀신이 나가야 하나님이 그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는데 모든 신이 거룩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보면, 구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맞습니다. 하늘에서 거룩하십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이제는 바꿉시다. 그 분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도대체 하나님 이름을 왜 바꿉니까? 하늘에 있는 거룩하신 분의 이름은 거룩, 거룩은 제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거룩을 갖습니까? 거룩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여인과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 죄악과 소외와 아픔 속에 고통하는 우리들을 구하시기 위해서는 하늘의 거룩한 자로만 머물 수 없습니다. 하늘이 아무리 거룩한들 이 세상이 썩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거룩한 자가 썩기로 했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세상에 오기로 했습니다. 빛이신 분이 어둠속에 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오셔서 귀신을 몰아내고 병을 고치시고 부활도 일으키고 사람도 살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베풀었더니 믿음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짓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하늘에 있는 거룩함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진실된 사랑입니다.


사탄은 사랑이 없습니다. 사탄에게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사탄이 언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일이 있습니까? 사탄은 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없습니다. 죽지 않기 때문에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죽음도 부활도 없는 사탄은 하늘에 올라가지도 못하지만 하늘에 올라간들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위를 향하여 믿습니다. 진실되고 희생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아래를 향하여 믿습니다. 하늘과 땅의 화해, 하늘과 땅의 만남이 예수그리스도라 하는 이분에게 응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하늘이요, 땅이요, 거룩함이요, 사랑이요,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분한테 오면 귀신이 사라진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실 때 단 한가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 예수를 믿으면, 아니, 더 크게 모든 경계와 우리가 그어 낸 적을 뛰어넘어서 믿으면 귀신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립니다. 귀신이 물러가고 땅 속에서 사랑이 움터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배우십시오.


‘하늘이 열림’을 ‘에큐메니칼’이라 하고 ‘땅이 솟아남’을 ‘에큐메니칼’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 것이 ‘에큐메니칼 복음’입니다. 야곱이 선택 받은 일, 이사야가 만백성에게서 회개하라고 외치라고 선택받은 일, 중요한 것은 믿으면, 큰 믿음이면 하늘이 열립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큰 믿음이면 사랑의 새싹들이 움터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실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따라가십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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