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일어나 화해(和解)의 대로(大路)를 열어라!
시편 84:5-6; 마태 5:9; 에베소 4:5-6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실천신대 석좌교수)
도입(導入)
금년도 우리 총회의 “총회주제”는 <교회를 향한 시대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분명, 우리 교회가 새로워져야 하겠다는 강력한 하나의 의지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교회여(3), 일어나(3)/ 화해의(3) 대로를(3)/ 열어라(3)!”라는 3박자 명령문 형식으로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이 외침을 “총회주제”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하여 특별한 자의식(自意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교회”를 향한 사회의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향한 사회의 비판은 더욱 심각하다고 하겠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가 그만큼 세계구원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역할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부러워할 정도로 양적 급성장을 이룩하였음에도, 사회에 대한 교회의 위상과 영향력은 오히려 심각할 정도로 크게 추락한 이 기현상(奇現象)에 대하여는 오히려 스스로 놀라는 이즈음이다. 또 마침, 교회개혁의 대표적인 기수(旗手)였고 “장로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John Calvin) 선생의 탄생 500주년(1509. 7. 10 탄생)과도 맞물린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 주제의 선택은 분명히 이 시대를 위한 매우 다급하고도 절박한 과제를 감히 우리 총회 산하의 교회가 떠맡겠다는 결단의 행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총회의 이 주제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에 대하여 과연 어떤 응답의 결단을 보여야 하는가?
1. “교회”의 본질(本質: nature) 요약(要約)
우리의 총회주제가 매우 이례적이게도 이렇게 “교회여, 일어나라!”라고 하면서 “교회”를 특별히 지목하여 “부름”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마치, 타락한 최초의 인류인 아담을 향하여 그의 소재를 이미 다 잘 알고 계시면서도 야훼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아예카”)라고 “인간의 그 자기 소외(自己疏外, self-alienation)의 현실”과 그 “실종(失踪)된 양심”을 일깨우시는 물음을 물어 오셨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네 교회를 향하여서도 또한 우리의 “총회주제”는 그 매우 당연한 “자기 정체성”(identity)을 오히려 상실(喪失), 왜곡(歪曲)하고 있는 우리네 교회의 그 <자기 소외(自己疏外)의 현실>을 깨우치며 그 극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선 우리는, 이미 상당한 연구결과를 통하여 정의(定義)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자기반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서의 여러 가지 진술들을 통하여 볼 때, <교회>(“카할”qahal/“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에 대한 정의(定義)를 간명하게 한 문장으로 압축, 서술한다면, <교회는 ①그 “머리”(κεφαλή)이신 우리 주님(εἷς κύριος) 그리스도(ὁ χριστός)께서 ②자신의 특별한 목적(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류구원)을 이루려고 특별히 불러내신바, 그의 “몸”(σϖμα; 肢體)들이 ③그의 부르심에 따라 “머리”와 “몸”의 유기적 통일(organic unity)관계를 이 땅에 구현(具現)하고 실천(實踐: διακονία→διασπορ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cf. 출 19:3-6; 마 16:16-19)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칼빈(깔벵; John Calvin, 1509-1564) 선생도 또한 교회를 정의할 때, 세 가지 요소, 즉 ①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유일한 주님의 성육(成肉)이신 “주의 말씀”이 선포되고(오직 그의 영광!), ②주님의 “지체”(肢體)들이 그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成肉)에 복종하고 ③체계적인 훈련(discipline: 말씀에의 복종, 성만찬 참여, 조직적 사회활동 등등)을 통하여 ⓐ교회 안(δικονία)과 ⓑ교회 밖(διασποαά) 모두에서 자기구원을 위한 “성육”(成肉: incarnation)하는 삶을 살되, 인간 소외의 극복(가난한 자, 어린이, 노약자 등등의 인간 소외 극복)을 위한 사회구원을 활발하고도 광범위하게 구현해가는(extension of incarnation) 유기적 통합체(organic wholeness)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이처럼 간단히 요약되는 정의(定義)는, 비록 각 요소에 대한 보완설명이 필요하겠지만, 대체로 이 세 요소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정의(定義)를 기본적으로는 포괄, 요약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서적 맥락에서 살피면,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의 기본핵심은 ①“그리스도를 머리(ἡ κεφαλή)로 하는 그리스도의 지체(τό σϖμα)들의 유기적 통일체이다”(엡 1:23; 골 1:18)는 전제(前提) 위에서, ②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말씀(ὁ λόγος)으로 이 인간 역사 안에 성육(成肉: incarnation)하셨듯이 ③교회도 또한 그 머리(κεφαλή)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로서 이 인간 역사 속에 “말씀의 육화”(肉化 )를 구현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을 것이다.(cf. J. G Davies, "Church," in A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ed. by A. Richards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9, Pp. 64-66)
그러나 우리네의 현실 교회는 이러한 기본 본분을 철저히 역행(逆行)해 왔다. 기독교가 로마를 거쳐 구미(歐美)세계를 장악하면서는 이러한 <“머리”와 “지체” 사이의 자기 소외(自己疏外)>라는 범죄적 일탈(逸脫)을 범하기 시작한 후, 그 일탈의 도(度)를 끝도 없이 벗어나 가다가 마침내는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어찌하여야 할까?!
2. 교회의 자기 소외(自己疏外) 양상(樣相)들
교회의 “자기 소외”(自己疏外)는, 비록 여러 가지 다른 시도를 통해서도 점검해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의 총회주제에 좀 더 빨리 접근한다는 의미에서, 위에서 정의(定義)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정의(定義)”를 중심으로 하여 다음 두 가지의 관점에서 그 문제점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1)그 무엇보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머리(ἡ κεφαλὴ τῇς ἐκκλησίας)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그 절대적 대 전제(大 前提)가 놀랍게도 오늘의 교회에서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머리”(“케팔레”)라는 “은유”(metaphor)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당 성서 본문들이 본래 말하려고 하였던 것과는 전혀 달리, 천국문과 지옥문을 여닫는 열쇠/권세를 쥐고 있는 그 어떤 “권력”을 표상(表象)하는 것으로서 오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만의 자료라고 널리 알려진 매우 특수한 성격의 교회론 본문인 마태 16:18-19에 대한 아전인수적인 성서해석의 이와 같은 오류는 마치 천국 문을 여닫는 열쇠를 문자대로 베드로라는 한 개인이 받았고 또 그 권세를 받은 “베드로”의 뒤를 로마교황이 계승하였으니, <로마교황은 천국출입권을 가진 자다.>라고 문자적으로 믿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거짓 신앙을 낳게 하여 무려 1000년 세월(서력기원 3세기로부터 20세기 중엽인 1963년에 있은 제2 바티칸 회의에 이르기까지의 세월) 동안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로부터 교황으로 바꿔치기한 신앙적 비극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격의 "성서해석의 오류"라는 <치명적 마술>에 편승한 개신교 교회들도 또한 “교황무오(Papal infallibility)의 오류”에 맞먹는 “교회교리 지상주의”라는, 이른 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또 그 “교회”에게 천국과 음부의 문을 여닫는 열쇠가 주어졌으므로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회주의적인 교조신앙에 많은 신도로 하여금 목을 매게 하는 치명적 악(惡)을 또한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치명적 오류가 “성년 된 세대”라고 자처하는 20-21세기에도 여전히 그 기세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수세기에 걸친 종교회의의 인내를 통하여 마침내 1960년대에 일궈낸 제2 바티칸 공의회의 힘겨운 대결실인 가톨릭의 “사제단 행정협력체제”(collegiality relationship) 수립을 탄생시켰고 그리고 피나는 종교개혁의 수고와 그 이후의 개신교회들의 순교적 에큐메니즘 운동이 있었음에도, “교회의 머리”는 아직도, 아니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속적 교회교권에로 옮겨져 가고 있다는데 근본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메시아의 대속적인 수난을 예고한 그 “그리스도”(마 16:21; 막 8:31; 눅 9:22)에 대한 신앙고백(마 16:16; 막 8:29; 눅 9:20)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에도, 대속주(代贖主)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주권이란 결단코 베드로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교황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감독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목사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주교회의나 감독회의나 당회에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교회교리나 기독교적 이념이나 “교회 그 자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고난받고 대속의 죽음을 죽은 후,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신 그 그리스도에게만 그 주권이 있을 뿐, 그러므로, 그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의 몸이 되어야만 비로소 우리가 음부의 권세를 이겨낼 수 있음에도, 오늘의 교회에서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인의 자리에서부터 밀려나 있고 “수난의 종, 메시아의 비밀”(마 16:20; 막 8:30; 눅 9:20)은 여전히 우리의 무지몽매함 속에 매장되어 있다는 그것이 오늘 교회의 현주소요 오늘 교회의 가장 심각한 자기 소외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아야만 비로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성서의 호소는 기원전 8세기의 구약 예언자들로부터 이미 피를 토하듯 쏟아져 나왔었던 것이다.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벧엘 성소로도 가지 말고 길갈 성소로도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 성소로도 달려가지 말라. 다만 나 야훼만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라고 하셨다.”(암 5:4-6)라고 아모스 예언자는 절규하였던 것이다. 예언자 호세아도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번제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 6:6)라고 외쳤으며 “소도 그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을 알건마는 내 백성은 내가 자기의 주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나를 예배하기 위하여 나의 전을 찾아온다지만 … 너희는 다만 나의 성전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3, 11-12)라고 외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에 들어와서 즉 1960년대의 제2 바티칸 가톨릭 공의회에서는 충격적이게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까지 말하였고 아주 최근의 개신교 세계에서는 “과연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최근 오강남 교수(캐나다 McMaster 대학교 종교학 교수)는『예수는 없다』(서울: 현암사, 2001)라는 책을 써내어 오늘의 교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아주 최근에는 한완상 교수가 수난의 종 갈릴리의 역사적 예수의 체취와 숨결이 사라진 현재의 한국교회를 한마디로『예수 없는 예수교회』(서울: 김영사, 2008. 12.1)라고 힐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교회에 들어와 보니 예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예수 신앙공동체의 안인데도 정작 예수님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죄스러운 인간들이 천국 입장권과 음부의 권세를 모두 장악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신의 실재를 인정하는지는 몰라도(theoretic theism) 신의 실재를 삶으로 믿는 자는 적어도 교회 상석에서는 찾을 수 없더라는 것이다. 단지, 신약성서 디도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하는”(딛 1:16a; cf. 시 14 & 시 53) “가증하고 완고한”(딛 1:16b) 실천적 무신론자들(實踐的 無神論者들,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데카르트[Renέ Descartes, 1596-1650]가 말하는 practical atheists)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현실교회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안면 몰수하고 온몸을 다 기울여 <전교인 총동원 주일 캠페인> 및 <복음의 세계화>라는 복음선교의 미명(美名)아래, 온 세계를 기독교 제국화(帝國 化)하는 데에만 심혈을 쏟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회가 <디도서>를 읽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디도서를 천 번 만 번 읽고 외운다 해도 디도서를 <바르게 해석하고 구원의 길을 애타게 증언하는 자>가 오늘의 교회에는 극히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교회는 <회개> 대신에 다들 오늘 교회의 자기모순을 이렇게 변명한다. 교회현실이 이렇게 잘못된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외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기”(invisible) 때문에(그 불가시성[不可視性]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들 말한다. 아마, 그러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다(출 33:20)는 이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은 신학의 최대 숙제이며 신앙인의 최대의 스칸달론(τὸ σκάνδαλο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인 성서 전체의 일관된 증언을 잘 지켜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말씀으로의 성육”(成肉=道[言]成人身; incarnation)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떠한 가시적 신상(visible image)으로도 결코 자신을 나타내지(보이시지) 않으신다. 만일 거기에 눈에 보이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상일 뿐이라고 성서는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구약 고대 전승자료(JNE; 출 19-34, 특히 출 33:20)로부터 시작하여 신명기(신 6의 쉐마와 신 5:22,24,26,28 참조), 사제 신학자(P), 그리고 신명기적 역사가(dtr; 신 4:12,15; 왕상 19:11-12)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언자들의 신학(암 8:11-12,13-14), 제의(祭儀) 신학(시 12:6[7]; 19:7-10,14[8-11,15]; 56:10[11]; 119:57,81,105) 그리고 비제의(非 祭儀)신학(전 12:13)까지를 포함하여 예수님의 로기아(logia: ipsissima verba, cf. 요 1:14; 14:8-10))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다 “한 목소리로” 증언한 것이다. 결국, 오늘 교회의 근본 문제점은 그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이신 “말씀”(=visible God)을 실천하며 사는 것(“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sacrament의 생활화)이 그 중심에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이다. 실로, 아모스의 예언(암 8:11-14)이 오늘에 적중되었다고 하겠다. 즉 “그날이 오면, 밥이 없어서 배고프거나 물이 없어서 목마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이 없어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다.”
(2)둘째, 교회의 “머리”와 “몸”의 유기적 통일관계(organic unity)의 단절현상이 오늘 교회의 정체성을 깨뜨리는 그 결정적인 요소라고 지적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몸”(σϖμα)이 그 “머리”(κεφαλή)를 <따라가지 않는> 기현상(奇現象)이 오늘 교회의 결정적인 “자기 소외”(自己疏外)의 현상으로 지적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기현상(奇現象)은 몸(=교회)의 지체(肢體)들(=그리스도인들)인 팔, 다리, 오장육부, 등등의 몸의 각 기관(器官)들이 머리(=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또는 그 지시를 무시하고 거역할 때, 우리의 몸(=교회)은 반드시 대혼란의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교회의 이러한 자기모순의 기현상은, 놀랍게도, 그 무슨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생긴 부패현상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 아주 초기부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제자 베드로의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9 cf. 눅 9:20; 마 16:16)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베드로 개인(Roman Catholic) 또는 그의 고백(告白, 개신교)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또 그 “교회”에게 음부(지옥)와 천국(하늘)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열쇠/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그 당시, 그 약속에 대한 제자 “베드로”의 즉각적인 “오해의 반응”이 나왔을 그때, 이미 나타났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무엇보다 이 본문이 가진 “공관복음서의 공통된 문맥”이 이구동성으로 동일하게 증언한 사실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이 <교회설립 약속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베드로를 비롯한 당시 제자들의 이해와 후대 기독교의 해석에 치명적인 오해(誤解)가 있었다는 그 사실(事實) 안에 이미! 있었다,
이른바, 지옥문들(地獄門; πύλαι ᾅδου “퓰라이 하두”= 마 16:18c의 “음부의 권세”[개역] 또는 “죽음의 門들”[새번역])과 천국문들(天國門, κλεϊδας τῇς βασιλείας τϖν οὐρανϖν=마 16:19a)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열쇠)를 이 “지상교회”가 쥐고 있다는 교회주의적인 해석과 교권주의자들이 내린 아전인수적인 성서해석,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오해와 왜곡된 성서해석을 근거하여 그 권세를 “베드로”라는 한 개인이나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교조)에게(sola fide?) 음부(지옥)와 천국의 문을 여닫는 권세가 전적으로 넘겨졌다고 해석한 그 엄청난 성서해석학적 오류(誤謬)가 생겨나면서부터 이미(!!) <교회의 근본적 자기 소외 현상>이 이미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 오류는 기독교(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역사 전반에 걸쳐 무한히 그리고 다양하게 확대되어 나갔었다는 사실이다.
<교회설립 약속>에 관해서 기록한 문제의 이 본문(마 16:18-19=신학적 동기를 가진 마태[마태 공동체]의 의도적 추가본문)은, 분명히, 현대 주석가들의 자세한 분석적 해석들(W. Wrede로부터 시작하여 D. Cullmann, V. Taylor, E. Lohmeyer, T. A. Burkill, H. J. Ebelling, E. Haechen, G. Strecker, U. Luz, E. Schweizer, et al. 그러나 W. F. Albright와 C. S. Mann의 마태복음 주석[1979년도 판 P. 197]은 이와는 다소 다른 접근을 한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라도 그 본문의 앞뒤 문맥(context)만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하였더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쉽게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와 후대의 인간들이 범한 “세속적인”(교권주의적인 그리고 헤게모니 편향적인, 즉 하나님 나라의 상석[上席, 예수님의 좌우의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이냐 라는 매우 속된 다툼[cf. 막 9:33-35; 마 18:1; 눅 9:46; 22:24]이 불러 온) 욕망에서 비롯한 엄청난 아전인수의 해석학적 오류를 남기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주의”라는 치명적으로 잘못된 교회관이 생겨났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기독교신앙의 엄청난 자기 소외 현상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 본문(마 16:18-19)과 그 가까운 문맥(마 16:13-28; 막 8:27-9:1a; 눅 9:18-27)과 좀 더 넓은 문맥(마 16:13-28; 막 8:27-9:1a; 눅 9:18-27을 앞뒤를 둘러싼 inclusio형식의 문맥)은 과연 어떻게 되어 있었나?
이 문맥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문제의 본문, 즉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다루는 공관복음서 세 본문(마 16:13-28; 막 8:27-9:1a; 눅 9:18-27)의 내용구성은 모두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즉 ①“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과 수제자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응답하는 대화 부분이 먼저 나오고 - ②이에 뒤이어 예수께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시인하면서 <기다리던 메시아[그리스도]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는 “메시아 비밀”에 관한 엄중한 경고부탁 부분이 곧이어 나오고 - ③끝으로는 자신의 <메시아[그리스도]적 사명>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苦難)을 받고 인류대속의 죽음을 죽은 다음 삼 일 만에 죽음의 세력을 격파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부분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류구원의 사역을 담당하여야 한다.”라는 그리스도의 당부와 명령을 남김으로 전체 내용을 마감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관해서 가르치는 이 본문(마 16:13-28; 막 8:27-9:1a; 눅 9:18-27)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 고난과 죽음만이 유일하게! 부활의 영광을 창조할 수 있고, 또 이것만이! 인류구원의 능력과 권세 즉 음부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메시아의 삶 속에 담긴 <메시아 비밀>이며 그것이 바로 <메시아/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지니고 있는 “권세”의 비밀>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또한, 공관복음의 문제의 이 세 본문은 동시에 모두가 다 분명하게 두 그룹(A와 B)의 본문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inclusio). 즉 (A)떡 7(마가와 마태, 그러나 누가는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4000명(마가와 마태) 또는 5000명(누가)을 먹이신 그리스도(메시아)의 신적(神的)/초월적 권능에 관한 기사와 그리고 (B)“변화 산”에서의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예수의 부활 후에 가질 메시아적 모습으로의 변모사건)에 관한 기사 사이에 들어 있어서(“A section -교회론-B section”의 inclusio 구조) 이 세 본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적인 고난을 통하여서야만(눅 17:25; 24:27 참조!!) 부활을 창조해내는 메시아이심”과 동시에 “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메시아 왕국(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확증해주는 목적을 가진 문맥 안에 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 점이 ①“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역설적(逆說的) 신비(=메시아/그리스도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는 그 비밀의 신비)와 그리고 ②교회의 기초돌[礎石]로 명명(命名)받은 베드로가 왜 “메시아의 수난”에 관한 비밀이 알려지자 곧 그 일을 만류하게 되었고 왜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만류한 교회의 기초 돌인 베드로에게마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혹독한 책망(마 16:23; 막 8:33, 그러나 누가에는 그 기록이 없음)을 하셨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수난이 지닌 권능,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라는 그 고난만이 죽음의 절대적 세력인 독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권능과 권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 그 하나님의 그 구원 섭리의 권능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여야만!!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여닫는 열쇠를 가진 교회(에클레시아=부름 받은 자들)가 된다는 것이 바로 마태의 교회론(마 16:18-19)이 갖고 있는 본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머리가 되셔서 그의 지체로서의 “교회”를 설립하신 뜻(목적)이 라는 것이다! 즉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러한 대속적인 구원의 삶을 따라 세상을 구원하는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구현(具現)하는 교회(“카할” [qahal]과 “에클레시아”[ekklesia])만(!!)이 “하데스”(지옥)의 세력들과 “우라노스”(천국)의 권세(열쇠)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 마태의 고유하고 특유한 교회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마태복음 16:18-19에 나타난 마태의 교회설립에 관한 본문은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마태 고유의 유일한 <교회론>으로서 참 교회(“카할”/“에클레시아”)의 본질적 과제를 제시한 본문이라고 하겠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성육(成肉; incarnation)의 모방과 확대에 대한 요구를 가리켜 현대신학은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봉사)와 그리고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선교)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말한다. 이러한 말의 정당성은, 에베소서 1:23; 4:1-16에서도 그 참 교회의 모습이 잘 정리되었듯이, <교회는 “섬기는 일”(διακονία)을 통하여 그 “머리”(κεφαλή)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σϖμα)의 통일관계(organic unity)를 올바르게 세워야(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 엡 4:12,13-15) 그 전체가 “완전한 하나(ἑνότης)가 되고” 유기적 통일체(organic unity)로서 이 세상에 “충만”(成熟; πλήρωμα)해지게 된다.>라는 그 증언을 통해서도 잘 발견할 수 있다.(imitatio Christi). 그러려면 우선 ①“디아코니아”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②“디아스포라”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이 “디아코니아”(봉사)의 기능은 에베소 4:1-3에서 적시한 대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겸손, 온유, 인내, 용서/화해, 평화>의 실천이며, 에베소 4:17-32에서 적시한 대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라가는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성령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새 옷을 가라 입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0:38-42가 예시한 그 마리아의 좋은 몫(τὴν ἀγαθὴν μερίδα)과 상응하는(!) 마르다의 몫(μερίς=διακονία)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의 “디아코니아”는 그것만으로 머물러서 있어서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교회가 도달해야 할 그 성숙의 경지는 “디아스포라”의 기능을 다하는 데까지 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를 부르실 때부터 말씀하신 것이고(막 9:50; 마 5:13-16; 눅 14:34-35)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불러내실 때(창 12:3c)와 그리고 이집트로부터와(출 19:4-6)바벨론으로부터(사 49:6) 이스라엘을 불러내실 때부터 이미 말씀해 오신 것이다. 즉 교회는(야훼 공동체/예수 공동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소금과 빛의 기능은 모두 공통되게(!) 자기를 해체하고 흩어서(디아스포라) 전체를 살리는 기능이다. 자기를 흩어내지 않고 자기를 움켜지고만 있는 것은 그 지체(肢體)가 “완전한 평화”인 “샬롬”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교회는 <카할/에클레시아>임과 동시에! <디아스포라/오이쿠메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화해의 대로>가 새삼스레 문제의 중심으로서 강조되느냐? 왜 우리의 <총회주제>는 오늘 교회를 향하여 <일어나라! 그리고 화해의 대로를 열어라!>라고 문제를 좁혀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가?
3. 왜 <화해의 대로>이냐?(시 84:5[6]; 마 5:9; 엡 4:5)
<화해의 대로>에 대한 전거(典據)로서는 시 84:5-6; 마 5:9; 엡 4:5-6이 제시되었다. “화해”라는 주제는 마 5:9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또는 “화평하게 하는 자”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peacemakers)과 엡 4:5-6의 “한 분이신 주님”(εἶς κύριος)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고, “대로”(mesilloth:大路)라는 주제는 시 84:5(6)의 “마음의 대로”(같은 시(詩) 7(8)절의 “시온[‘교회’에 대한 詩的 隱喩로 사용할 수 있음]으로 가는 길과 平行)”라는 은유(隱喩)와 관련된다. 말하자면, 위에서 이미 “머리”와 “몸”[肢體]의 유기체적 통일체(organic unity)라고 하는 “참 교회”의 정체성(identity)이 정의(定義) 되었고 또 바로잡아야 할 오늘 교회가 가진 “자기 소외”(自己疏外)의 양상(樣相)이란 무엇인지도 지적되었다면, 이제는, 한 분이신 주님을 머리로 하여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할 사람들의 공동체를 향하여 우리의 총회주제가 특별히 요구하는바, “화해의 대로”라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심적인 문제가 되는지를 제시된 본문들을 근거하여 규명하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과제가 될 것이다.
“대로”(大路; 메실롯 mesilloth)라는 말은, “길”(way)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히브리말, “떼렉” (drk), “오라하”(’rh) 등과는 구별되게(“대로”라는 말은 시편 84:5[6]에서와 구약 여러 곳에서 모두 27회 사용;민 20:19; 삿 5;20; 20:31,32,45; 21:19; 삼상 6:12; 삼하 20:12[2회],13; 왕하 18:17; 7:3; 36:2; 59:7; 사11:16; 19:23; 33:8; 40:3; 49:11; 62:10; 렘 31:21; 욜 2:8; 대상 26:16,18; 잠 16:17), 그 가던 길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고 새롭게 환하게 열어놓은 그 “새길”을 가리켜서 특별히 사용하였던 용어였다. 예컨대,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라는 한 지파가 완전히 몰락해버릴 위기에 처하였을 즈음, 그 모든 위기를 네 번(삿 20:31,32,45; 21:19)이나 극복하게 하고 극적인 평화회복의 새 길을 마련해주었던 그 길을 가리켜 신명기적 역사가(dtr)가 “대로(메실롯, mesilloth)라고 명명(命名)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여기 우리의 시편 본문 시 84:5[6]에서도 또한 이 시인은 인생순례자들이 그 인생길에서 비록 험하고 고달픈 절망의 “눈물 골짜기”를 만나더라도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만 열려 있으면” 야훼 하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샘과 메마른 농지를 촉촉이 적셔줄 “가을비/이른 비”(“모레”moreh)를 내려주셔서 “구원의 새길”로 바꾸어주신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구원의 새 길을 “대로”(메실롯,highway)라고 명명(命名)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즉 시 84:5[6]의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민족주의적 개념을 가진 이 “시온으로 가는 대로”라는 말 대신에, 놀랍게도, “시온”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시온의”라는 말을, 많은 번역본이[한국어 포함] 이 본문을 번역할 때, 아래의 7[8]절과 평행시켜 “시온”이라는 말을 삽입시켰음) 그냥 “대로”(大路)라고만 쓰고 오히려 그 “대로”에 의미를 붙여 “마음의[마음 안에 있는] 대로”(mesilloth bilebabam)라고 신학화(神學化)하였다는 그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온으로 가는 길” 즉 “하나님을 만나러가는 그 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물리적, 공간적 장소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이 그 마음속(“빌러바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시온으로 가는 그 길은 “마음의 대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의 대로”만이 “눈물 골짜기”(“바카[눈물]의 골짜기” 시 84:6[7])를 건너가게(‘overe) 할 수 있는 길(즉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석가들은 이러한 이 “마음의 대로”가 바로 호세아 2:15[17]이 말하였던 그 “희망으로 통하는 길”(所望의 門)과 평행된다는 것이며, 시편 23:4가 말하는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두려움 없이 건너가게 하는, 이른바, “주께서 함께하시는 길”과도 평행 된다고 주석한다. 우리의 총회주제도 이 시인이 말하는 그 “마음의 대로”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길을 열어주는 화해의 대로”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과연 “가능한 해석”인가? 아니면, 이러한 해석은 하나의 “해석의 비약”에 불과한 것인가?
이러한 정황에서는, 우리는, 그 해석의 타당성을 찾으려면 시편 84:5-6[6-7]의 문맥에 대한 바른 이해로부터 그 해석의 출발점을 삼을 수밖에 없다. 우가릿 시(Ugaritic Psalms; 고대 북 가나안의 종교시) 전문가로 잘 알려진 다후드(M. Dahood)는 그의 시편주석(Psalms I: 51-100, N Y; Doubleday & Co. 1974, Pp. 280-281)에서 이 “메실롯”의 어원(語源)을 후기 히브리어 “실렐”(sillel)에서 찾고 그 뜻을 “높이 찬양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이 “메실롯 빌러바밤”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로 크게 높여 찬양하다.”라고 해석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게 보인다. 그 타당성은 후기 히브리어 “살랄”(salal)에 대한 본격적인 어원연구를 집대성한 훼버리(H.-J.. Fabry, TDOT, vol. X, Pp. 266-270)라는 학자의 연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훼브리(Fabry)에 의하면, 이 “메실롯”은 고대 중동의 아카드어, 우가릿어, 티그레(Tigre)어 그리고 후기 히브리어 사이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다음 몇 가지의 의미들을 “해석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였다. 즉 “높이 찬양하다.”(시 68:4[5]; 84:5[6]) “얼싸안고 포옹[포용]하다.” (잠 4:8, embrace) “튼튼한 방벽을 쌓다.” (삼하 20:15) “포로민들이 풀려날 때 고국으로 돌아갈 넓고 곧은길을 닦다.” (사 40:3) “포로민들이 귀향할 때 창고 문들을 열어젖히다.” (렘 50:26) 등등의 의미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언어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을 면면히 관찰해볼 때, 우리는 감히 우리의 본문 시 84:5[6]의 “마음의 문”으로부터 “마음을 활짝 여는 화해(embrace)의 몸짓”을 가리키는 한 은유(metaphor)를 채택할 수 있다는 확실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우리의 총회주제가 “화해의 대로를 열어라!”라는 슬로건(catchword)을 교회개혁의 슬로건(slogan)으로 내걸 수 있는 한 가능성도 또한 본다.
실로, <교회>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길” 및 교회의 “자기 소외”라는 저 악명 높은 쇠사슬을 “끊어내는 길”은 전적으로 우리네 교회의 내장 깊숙이 뿌리내린 저 인격 간의 대화와 인간 교통(성도의 교통)을 막는 “장벽”을 먼저 허무는, 이른바, <화해의 대로/마음의 대로>를 먼저 구축하는 데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네 교회가 이 마음의 대로(“메실롯 빌러바밤”)를 먼저 뚫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기능”에로 다가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구축(構築)하여야 할 “대로”(mesilloth)>를 우리의 본문, 마태 5:9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에이레노포이오이” εἰρηνοποιοί)이라는 말로 표상하였고, 엡 4:5-6은 “하나 됨”(“헤이스” εἱς)이라는 말로 표상하였다. 우리의 총회주제가 말하려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네 교회에는 <“메시아 비밀”을 안고 거짓 종교들과 고군분투하셨던 그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작 없다(!)>는 것이 문제이고 “자기를 버려 하나 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특히, 평화가 “없다.”라는 점보다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없다.”라는 점을 여기서는 특별히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평화”는, 우리의 성서본문(마 5:9; 엡 2:15b)에 의하면, 이념 만으로나 그 이념의 구호와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평화를 “말하는 자들”(λέγω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들”(ποιοί)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 교회에는 “평화,” “평화,” “평화,”라고 하면서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실제로 평화를 “실천하며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샬롬”(shalom)이라는 이 말은, 그 히브리어 언어와 고대 중동언어의 어원들이 가진 의미들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의 참-거짓 평화논쟁(렘 28:9, cf. 렘 6:14; 8:11; 12:12; 14:13; 16:5; 30:5 ; 겔13:10,16 etc.)이 이미 적확하게 예시(豫示)해 주었고 또 시 85:10[11]; 사 48:18; 레 26:6이 그 본질적 성격을 이미 어느 정도 근본적인 개념정리를 해 주고 있듯이, 이 “샬롬”이라는 말은 그 어떤 전쟁의 일시 종식 때에 찾아온 그 “평화”가 곧 “거짓으로 드러나는”(!) 그런 역사적 전쟁경험을 통하여 자주 인지되었었던바, 그 어떤 <일시적이고 부분적(部分的)인 안녕(安寧)>을 결코 가리키지는 않고 <“사랑”, “진실”, “정의”, 그리고 평화가 모두 다(!) 서로 입을 맞추듯 긴밀하게 상호 조화되어(시 85:10[11]) 그 어느 한 부분에도 흠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가 화해,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완전한 평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해되었다(cf. C. Westermann, Forschung am AT, passim,; F. J. Stendebach, TDOT, vol. XV, Pp. 13-49; M. J. Dahood, Ras Shamra Parallels: The Texts from Ugarit and Hebrew Bible, I, Pp. 352-3). 마침내는, 우주적이고도 종말론적이며(믹 5:5[4]; 슥 9:10; 말 2:5) 재창조적인(re-creative; 사 55:12; 57:18c;) “하나님의 최후구원”의 의미까지도 포괄하는 넓은 의미를 가진다고 정의(定義)되었다. 한 마디로, 거짓 평화가 아닌 “완전한 평화”를 만드는 일을 우리네 교회가 감당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에베소 2:14a는 이러한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Αὐτὸς ἐστιν ἡ εἰρήνη ἡμϖν.)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즉 “평화”는 어떤 이념이나 이론이나 철학이 아니고 “인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평화를 만드는 인격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평화수립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의 본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그 가능한 길을 열어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자기(自己) 의(義)를 포기(抛棄)하는 대속(代贖)의 고난(苦難)”을 통하여 우리들 죄인들과 화해(和解)를 하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것으로 보여 주셨다는 것이 우리의 성서 본문 모두의 증언이다.
도출(導出): “머리”와 “몸” 사이의 장벽을 허는 “화해의 대로”를 열자!
우리는 지금, 비록 겉으로는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실속을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담”((φραγμός; 엡 2:14)의 장벽들을 우리들 사이사이에 쌓아놓고 갈가리 찢겨 나누어진 채 대화가 끊어져 있는 상태라고 하겠다. 그 “담”들(φραγμοί)은 주로 “이념(理念)” “지역주의(地域主義)” “파벌간극(派閥間隙)” “세대차이(世代差異)” 등등의 “보이지 않는 장벽들”에 의하여 “대화”와 “소통”을 막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화해하여 하나 되는 것”을 전혀 비본질적인 것으로 제외해 버리고 반대로 “자기(自己) 의(義)”를 결사고수(決死固守)하는 개체주의를 제일(第一)의 가치로 보는 잘못된 사상의 흐름을 마치 대세(大勢)인 것처럼 믿는 풍조(風潮; οἱ αἰϖνες, 롬 12:2)에 편승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이다.
<화해의 대로>를 막는 그 장벽의 갈등 중에서도 특히 <“이념”의 갈등>은 지역주의와 파벌주의라는 마성(魔性)과 함께 맞물리면서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심각한 경지에까지 다가와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머리”와 “몸”의 유기적 통일을 본질로 하는 “교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최대의 “걸림돌”(스칸달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이념의 갈등은 본질상 “화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 갈등은 끝도 없이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보수와 진보라는 두 이념 사이에는 타협이나 화해란 없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평화수립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어지고 따라서 <본질적인 교회수립>은 전혀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성격의 장벽을 허물려면, 오직 하나,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자기 의(自己 義)를 희생”하셔서 저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한 진정한 “화목 제물”(和睦祭物)이 되셨듯이 우리네 지체(肢體)들도 <자기(自己) 의(義)의 희생(犧牲)> 이외에는 우리네 교회가 참 교회가 되는 길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하겠다. “화해의 대로”(“메실로트”)를 만들어내려면 장애물 제거작업이 선행(先行)되어야 하는데, 제거하여야 할 그 최대의 장애물은 “자기 의(自己 義)의 희생 없는 주장 고수(固守),” 그것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먼저 “자기 의”를 희생할 수 있어야만(Sollen) 한다. 거리를 나가보라. 그 어느 모퉁이엔들 “자기 의”를 양보하거나 희생하는 자가 있는가?
그러나 거기에는 단지 한 분, 즉 절대 무죄하여 절대 선하시고 절대 의로우면서도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기 의”를 희생하시고 죄인인 우리와 화해하고 하나 되신 분이 한 분 계신다. 그는 “수난의 메시아 비밀”을 고군분투 간직하시고 오직 대속의 고난 길(via dolorosa)을 걸어가신 우리의 오직 하나의 “주”(主)이시며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