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十자가 붙어 있는 높은 지붕은 교회당과 병원의 지붕이다. 이 두 가지 지붕의 十자는 같은 글자 형(形)이지만 병원 지붕의 十자는 병원의 소재를 알리는 표시 또는 병원의 상표(mark)인 반면, 교회당 지붕의 十자는 단순한 十자 글자가 아니며 또 단순히 교회의 소재를 알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을 알리며 그 죽음을 상징하는 十자가 형틀이다. 병원이나 적십자사의 十자는 한낱 마크여서 병원이나 적십자사의 사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사인(sign)이지만 성당과 교회당 지붕의 十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용서, 화해의 상징(symbol)이다.
그러므로 성당과 교회당 지붕이나 성당과 교회당 안에 걸린 十자가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의 핵심을 설명하는 실증적(實證的)인 거룩한 성구(聖具)이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한 대상이며, 그 앞에서 경건과 충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 성전에 대대로 보존되어온 법궤와도 같은 것이다. 이 법궤는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고 그 안에 십계명을 새긴 돌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다.
이렇듯 유대인의 법궤나 기독교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여 감사하며 예배하는 성소에서 쓰이는 것인데 다른 목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한때 이스라엘인들이 블레셋인들과의 전쟁 때 그 법궤를 마치 군대의 군기(軍器) 또는 군기(軍旗)처럼 생각하고 싸움터에 들고 나갔다가 패전하고 적군에게 빼앗겨버린 일이 있었다. 그 법궤가 이스라엘인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일이었다.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고 있던 모슬렘 정권의 군대와 싸워서 성지 회복을 위하여 십자군을 만들어서 출전했을 때 十자를 새긴 十자가 군기를 만들어 그것을 들고 싸웠으나 무려 열 번의 십자군 원장이 결국 실패하고 성지는 그 후 수백 년 동안 모슬렘이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십자군의 군기(軍旗)는 十자기(十字旗)였지 十字架일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十자가는 타 종교나 세상 정권과 전쟁하기 위하여 교회에 비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찬송가에 십자가 군병이란 말이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영적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 국가들의 정치는 좌익과 우익, 또는 진보와 보수의 정치세력 간에 충돌과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이 되어 있는데 종교인들과 신도들도 시민으로서 자연히 그런 정쟁에 가담하게 되고 따라서 종교인들 사이에, 또는 신도들 사이에도 정치적 분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편이든 교회의 생명을 걸고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 나라와 정권의 흥망성쇠의 운명과 교회의 생명은 서로 다르다. 한국의 정치마당은 점점 난마(亂麻) 상태이고 좌우나 진보 보수 간의 싸움이 치열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되어간다. 지난 번 용산철거민 사건이 아직 끝장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때 많은 시민단체들이 야당과 합세하여 결국은 대정부투쟁으로 확대되어 갔는데 이 때 시위 군중과 행렬 중에 한국의 한 장로교 총회장이 十자가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기독교를 대표하거나 교회의 상표로 생각하고 교회의, 또는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들고 나온 상 싶다. 그는 분명히 현재 한국의 정쟁(政爭) 판에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반정부적 야당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주지되고 있는데 분노와 원망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그 현장에 십자가를 들고 가서 그것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내기를 바랐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며 망상이었다.
대체로 개신교 목사들과 신도들은 가톨릭교회 신부와 신도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신심이 빈약하다.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곧 미사의식인데 이 미사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배의 마지막 절정으로 생각하고 신부가 축사하는 그 떡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신도들이 생각하고 믿을 정도로 미사(성찬식)를 집행한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제단 중앙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상한 몸이 붙어 있는 十자가 형틀이 높이 달려 있다. 그러나 개신교 교회당 중에는 교회당 안에 십자가가 아예 없는 데도 많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상한 몸의 형상이 없는 빈 십자가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한 몸이 붙어 있는 십자가를 주야로 바라보고 예배 드리는 가톨릭교회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교회권위에 대한 순종의 훈련이 되어 있어서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며, 순교와 박해를 감수하는 경건이 있다. 그러나 개신교에는 가톨릭교회에 있는 이런 값진 것이 결여되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도 약해지고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값진 세 가지 원리 ‘은혜만으로’, ‘성서만으로’, 그리고 ‘믿음만으로’가 개신교의 신학논쟁과 교회분열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느 교회보다 한국 장로교회가 대표적인 그 실례이다.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숭상하는 교회이어서 성직자나 신도들이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며 인내로써 견디고 싸워낸다. 그래서 순교자가 나오매 성자가 생기고 성자 추대가 이뤄진다. 또한 독재정권 아래서도 교회의 생명을 걸고 대항하지 않으며, 반면에 박해와 고난을 피하여 교회를 두고 떠나지도 않는다. 이러한 예는 히틀러 정권이나 공산정권 아래서 볼 수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 성직자들은 대항해서 싸우다가 교회와 교인들을 두고 떠나거나 도피해버린 예가 많다. 중공혁명 당시 또는 북한 공산정권 초기에 신구교의 성직자들의 처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 기독교계에는 진보와 보수 세력이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즉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다. 이 두 단체가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양 사사건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서로 욕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는 것이 못 된다. 예수님 말씀에 사탄이 사탄끼리 싸우면 사탄의 세계(집단)가 멸망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우리 교계에 주는 교훈이 될 수도 있다.
한때 신학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로 갈려 싸우다가 비참하게 교회가 분열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십자가는 복음의 진수를 상징하는 것이지 교회의 사인이나 상표가 아니다.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