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하나님의 것, 사람의 것

박종화 목사 ㅣ 2008년 10월 19일

성경본문

아모스서 5:14, 21-24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멘.

빌립보서 3:20-4:1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22:15-22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황제의 것입니다.”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아멘.  
   
 
설교문

지난주에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은혜를 많이 받고 사신 줄 믿습니다.
오늘도 많은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언론 보도를 통해서 이런 거 접하셨습니까? 종교면을 자세히 읽어보면 최근에 로마 교황청에서 전 세계에 있는 가톨릭 신도들한테 주문한 것이 있습니다. 주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공식예배나 예전 때 부르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라고 부르지 마십시다. 이상하시지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가나안 땅에 가기 위해서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호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모세를 통해서 전하셨습니다. 가시떨기가 불길에 휩싸이고 하나님 말씀이,
“나하고 얘기하러 들어 온 모세야! 이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 좀 벗어라.” 이렇게 해서 십계명 받은 이야기 아시죠? 그 때 하나님께서 십계명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모세한테 걱정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당신이신데 제가 산에 내려가서 우리 백성들한테 십계명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면 우리 백성들이 분명히 물을 것입니다. 출애굽시킨 하나님,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뭔지 백성들에게 이름 석자는 알려줘야 할 게 아닙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의 대답이 뭔 줄 아시지요?
“나는 이름 없다. 내 이름 부르지 마라. 나는 누구냐 하면 나는 나다.”

이름은 태어난 자에게 붙인 것이 이름입니다. 우리가 붙여주는 것이 이름이지, 본래부터 나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나는 나다”, 우리 성경에 그렇게 번역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다’라는 말이 영어로는 “I am that I am." 또 어떤 성경에는 "I am who I am." 제가 히브리 말로 해볼까요? 나는 나다. ”여호와“ 그렇습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딴 뜻이 아니라 ‘나는 나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에 사막 생활도 해야 하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입을 오래 벌려서 대화를 못했습니다. 한 마디씩 딱 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언어가 히브리언데 히브리어에 모음자 없이 자음자만 나열했습니다. 모음자가 본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다, 여호와라고 했습니다만 여호와는 성경에서 붙인 발음이고 본래 히브리 사람들의 발음은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이 말합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은 ‘나는 나’라고 하는 그 말을 ‘여호와’라고 썼지만 표기는 자음자만 표기했습니다. 자음자 알파벳으로 넉자입니다. 로마식 알파벳으로 보면 Y, H, W, H, 이 네 글자입니다. 물론 쓰는 순서는 거꾸로 가니까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씁니다. 이 말을 자음자만 써 놓고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라고 합니다. 그건 마찬가지죠. 우리 자손들이 선조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릅니까? 함자를 이야기하기도 존경스러운 분이신데 함부로 얘기를 안 합니다. 이 넉자는 우리가 대통령들의 이름을 MB니, DJ니, YS니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니셜의 모음이 아니고 본래 ‘나는 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축약해 놓은 것인데, YHWH 라고 해 놓고 후대 사람들이 뭐라고 발음했을까, 하다 보니까 ‘야훼’로 발음했을 것이다. 아니, ‘여호와’로 발음했을 것이다. ‘야웨’라고 발음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마다 언어 표현양식이 달라서 그런 것일 뿐 여튼 자음자 넉자만 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넉자를 써 놓고 ‘야훼’라고 읽지 않고, 히브리말로 “아도나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도나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문자는 따로 써 놓고, 읽기를 ‘아도나이’라는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너무 거룩하시고 훌륭하신 분이고 전지전능하셔서 감히 함자 이름을 못하고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아도나이’의 ‘아오아이’라는 모음자를 가져다가 ‘야훼’에 붙여버리니까 ‘야호와이’ 이렇게 부르다가 ‘야훼’로 부르다가 ‘여호와’로 부르다가 이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훼라는 이름’,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나는 나”라고 하는 것의 히브리식 자음자 표기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늘 그렇게 써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여호와라고 번역해서 쓰긴 씁니다만, 사실은 ‘주 우리 하나님’ 하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함자를 함께 부르면서 여호와라고 얘기하면서 제가 필요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갖다 대고, 내가 사업할 때 하나님 붙이자고 해서 여호와 갖다 대고, 욕심 부릴 때 여호와 갖다 대고, 하나님의 함자를 이렇게 악용, 오용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우리도 주님이라고만 하자. 주 우리 하나님, 그러면 될 것 아닌가? 왜 여호와라는 말 붙이느냐? 주로 생각 없이 여호와라고 하는데, 너무 오용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지키자, 그래서 ‘여호와’는 예전에서는 빼라.

저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니까 여러분이 꼭 지켜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꼭 첨가하십시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면 거룩한 사람의 이름을 맘대로 불러도 되는 겁니까? 불러서 밟아도 되는 겁니까? 그 분의 이름을 빙자하여 나쁜 짓을 해도 되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굽니까? 그 분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 창조주 그런 분이시고 함부로 이름조차 거명할 수 없는 분, 이렇게 믿고 수천 년을 살아 온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유대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이 분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세금 바쳐도 됩니까?”
갑자기 세금 문제를 질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대답이, “동전 좀 보자.” 당시 세금이라는 게 현금 바쳐야 하니까요.
“동전에 누구 얼굴이 그려져 있느냐?”
“황제 얼굴이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뒤에 글자는 뭐라고 쓰여 있느냐?”
“그것도 황제의 이름이 박혀 있습니다.”

참고로 로마 제국시대에는 황제 이름을 따로 부르지 않고, 모든 황제의 이름이 아우구스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황제의 이름이 가이사로 다 바뀝니다. 가이사란 말이 카이사란 뜻입니다. 황제란 뜻인데 왕에서 황제로 바뀌면서 카이사로 바뀌었고, 우리말 번역에는 가이사,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이 아우구스도는 본래 이름이고 카이사는 붙인 이름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전부 ‘바로’입니다. 파라오, 바로 왕이 가라사대, 모든 임금의 이름이 바로입니다. 로마의 모든 임금의 이름은 아우구스도 겸 가이사.

“뭐라고 쓰여 있느냐?”
“‘가이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우구스도’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돈은 황제 것이네.”
“이 돈을 황제한테 세금으로 바치는 게 옳습니까? 안 바치는 게 옳습니까?”
예수의 대답입니다. “황제 것은 황제한테 바치고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아무리 동전을 들여다봐도 ‘하나님’이라는 글자는 없습니다. ‘여호와’도 없습니다. 황제의 얼굴과 황제라는 글자만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덧붙였을 겁니다. “쓸데 없는 생각 가지고 세금 포탈하지 마라. 세금은 내라. 황제 것이니까. 그리고 생존해라. 단 그 속에 하나님 것이 보이느냐?”
물론 유대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황제의 것이니까 보이지 않죠.”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안 보이신 분이죠.”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의 손길은 제가 느끼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만질 수가 없잖습니까? 본래 하나님은 안 보이시는 분, 그 분이 그래도 존재하시고 저의 창조주가 되십니다.”

사실 로마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나님 외에 누구한테도 절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도 안 된다. 십계명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을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은 로마 황제가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그 분의 이름, 거기까지만이 아니고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여라. 황제숭배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때와 똑같은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지고 와서 “세금 바칠까요, 말까요?” 하는 표적의 얘기 중에 속칭, “황제 숭배하라고 하는데 할까요, 말까요?” 그 얘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고, “세금 바쳐도 좋습니까, 안 바쳐도 좋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속을 다 아시고 “안 보이는 하나님을 황제와 혼돈하지 말라. 황제가 만든 동전은 동전대로 처리하고, 보이진 않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오용하지 말고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쳐라.” 예수님의 말씀에 유대교 백성 지도자들은 놀래서 물러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우리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혹시 하나님을, 얼굴을, 글자를, 이름을, 제가 필요한 것을 새겨놓고 제가 만든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곡해한 적은 없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맘대로 불러놓고 그 분 욕되게 한 적은 없습니까?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야기, 예수께서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러 오면서 아모스 시대입니다. 예수님 훨씬 전이죠? 바치러 오면서 늘 규정대로 일상대로 아름다운 노래를 준비하고 살찐 송아지 잡아서 아름다운 행사 속에 가져와서 바치면서 하는 말, 야훼라는 말은 안 썼겠지만 ‘아도나이, 우리 주님 받으옵소서.’ 그 때 하나님이 아모스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정성도 없고 지성도 없는 시끄러운 노랫소리 듣기 싫다. 진실이 아닌 가장 속에서 진실이 아닌 마음의 뜻도 없으면서 나한테 짐승이나 잡아가지고 바치는 피, 보기도 싫다. 때만 되면 행사하는 절기 행사들이 나는 싫다.”
그러면서 마지막 아모스서가 하는 얘기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건 노랫가락 속에, 살찐 짐승 속에, 절기 행사 속에 하나님의 뜻인 공의가 철철 흘렀으면 좋겠다. 그런 제사를 받고 싶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가슴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모든 것은 받기 싫고, 강물처럼 철철 나게 흐르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 제사는 받고 싶다. 그런 노래는 받고 싶다. 그러지 않은 것은 싫다, 듣기도 싫고 받기도 싫다. 역겹다.” 굉장히 준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지신 축복, 돈, 재산, 경력, 지식,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께 헌금으로, 헌물로 바치라고 하면 어떤 기준으로,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 것, 내 것을 분류할 수 있습니까? 저의 어느 부분이 하나님 것이고 어느 부분이 세상 것이고 내 겁니까? 십일조를 바치고 십이조를 바치는 것을 얘기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 거고 십의 구조는 내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중심으로 가장 좋다고, 가장 진실할 거라고 내 놓은 우리의 율법적 계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 내 것으로 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이는 것이 하나님 거고,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저보고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한대에 보이는 것을 바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실이 그 속에 없으면, 그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진실이 없으면 나는 보이는 액수는, 보이는 분량은 싫다. 작아도 좋으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성을, 정성을 담아주렴. 그것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얘기가 하나님의 것, 세상의 것은 우리가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의 중심에, 가장 중심에, 안 보이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예배를 드려야 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개념화할 수 없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금융위기가 나오면서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 중에 저같이 문외한입니다만, 저한테 딱 보이는 글자가 있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을 텐데 한국 모든 금융 시스템에 펀더멘털이 안전한가? 제가 딱 보고 느끼는 말이 “사이클 때문에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겠죠. 인간의 삶도 그러니까.” 어떻게 변하고 위기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금융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든든하다.
하나님의 것이 뭔지 아십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인간 삶의 펀더멘털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 가장 밑에 있는 것, 가장 심연에 있는 것,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저 삶에 저 사고방식에 가장 기초적이고, 깊이 속에 있는 것, 흔들림이 없는 것, 그것은 심적인 것이다. 제가 그것을 타고 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감사할 수 있느냐. 그 진실된 고백을 감사에 담을 수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이 물으신 것이지 저보고 액수를 적어서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 속에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 하나님의 진실을 담아 오너라. 그것이 진정으로 예배요, 헌금이요, 헌물이니라. 그리고 헌신이니라. 하나님은 펀드메탈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장 기본은, 가장 기초적인 것은 어떻게 하면 제가 얻을 수 있습니까?

인도에 선교사로 간 목사님들이요, 우리보고 욕한 게 있습니다. 인도는 땅은 넓은데 물이 없어서 물 좀 얻어야 되겠는데 그래서 수도 파이프를 묻어야 합니다. 파이프를 묻었죠. 파이프 한 개당 얼마라고 헌금도 했습니다. 이 분들이 하는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여러분, 수도 파이프에서 펌프질해서 물을 얻고 싶으세요? 얼마나요? 많이 얻으세요. 수천 리터를 넘는 물도 있습니다. 물을 먹고 얻으려면 많이 얻으세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수도 파이프 속에 물 한두 방울만 부어주세요. 그리고 펌프질 하세요. 얻고 싶으세요? 수도 펌프에서도 물 한두 방울 붓지 않고는 펌프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한테 축복 받고 싶다고 기도하시죠? 요구하는 게 많으시죠? 달라고 하시죠? 왜 물 함박도 안 주시면서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십니까?

이 역사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펌프질 할테니 제발 좀 나오시오. 아무리 두드려도, 아무리 구해도 응답이 없다. 물 한두 박을 안 주셔서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감동받을 수 있는 한 마디 기도만 닿아도 정성만 닿아도 그러면 내가 통째로 물을 다 길어서 그대들을 맛있게 목마르지 않게 먹여줄 수 있다.

수도펌프의 단순한 진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한테 원하면 드려라. 감사하다고 드려라. 그리고 뽑아내라. 하나님의 것, 세상의 것, 살아가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정치적인 것에, 경제나 역사 모든 것에, 가장 중심의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속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빌립보서 말씀에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민권은,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것을 아름답게 감사하게 간직하시고 간구하십시오.” 이 사실을 우리는 다 압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 알고, 책을 읽으면 알고, 열심히 공부하면, 열심히 배우면 우리 이 모든 것이 진심이고 사실임을 압니다. 이걸 가리켜서 철학적 용어로 인식이라고 이름합니다. 인식이 무엇이냐? 배우고, 알고, 깨달아서 소화하고. 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 고급 언어는 인식의 언어들입니다. 인식하는 언어, 하나님은 주님이심도 압니다. 우릴 위해 죽으심도 압니다. 알면 뭐합니까? 이것도 신앙의 출발입니다.

언어는 아는 걸 안다고 고백하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알았으면 제가 입으로 시인하고 팔로 만지고 발로 뛰고 가슴으로 끌어안는 제 생을 던지는 고백적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하고 지성적 대화하자. 상식의 언어 가지고 대화하자. 그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되, 하나님은 저 근본 속에 계셔서 저로부터 감사합니다. 당신이 주인이십니다. 입으로 고백하고 내가 삶으로 실천하겠습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과 저와 교통이 열립니다. 신앙의 열매는 인식의 언어와 함께 고백적 언어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고백적 행동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하나님은 이 고백언어의 삶 속에서 샘솟는 복의 근원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공의가, 고백하고 행동하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근본이 철철 강처럼 넘치게 하여라. 기회를 줬지 않습니까? 기회를 선용하세요. 압시다. 깨달읍시다. 축적합시다. 막 쌓아놓읍시다. 그리고 고백으로 차지합시다. 이거 없이 하나님은 우리한테 너무 멉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이천년 전 아니 인류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시작해서 오늘 순간까지 한번도 변치 않고 보이지 않는 근본으로 우리한테 계십니다. 내일도 그 분은 우리한테 솟는 샘물의 근원이 되실 것입니다. 찾으세요. 알면 찾으세요. 고백하고 행동합시다. 하나님을 받아들입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 그 분은 영원무궁하시고 한 분이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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