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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삼]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0월 발제문)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
강승삼 (KEF 선교위원장; KWMA 사무총장)




이슬람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계속적으로 성장해오고 있다. 인간 삶의 총체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도전적인 종교이다. 2007년 10월 13일 이슬람학자들 138명이 베네딕트 16세 교황에게 보내온 서신 “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 (무슬림과 기독교가닁 공통적인 말씀),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대화를 위한 공개 서신에 기독교의 응답에 대해 생각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효과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의 도전적인 세력을 위협으로 보고 있다. 그도그럴것이 이슬람이 한국을 2020년까지 한국을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전략과 알카에다의 7단계 세계재패전략 등 무서운 기세의 도전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슬림들도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도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무슬림과 기독교 간에 대화가 가능할까?

먼저 우리의 무슬림 이웃이 우리 기독교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부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편견을 갖거나 정죄한다고 불평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적이고 편견 없이 기독교인들을 받아주었다고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러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꾸란에서의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들은 부정적이다.

 

꾸란 5:69, “오 성서의 백성들(유대인과 기독교인)아 너희가 모세오경(Torah)과 복음(Injeel)과 너희의 주님께서 너희에게 지금 내려주신 것(Qur'an)을 따라 행할 때까지 너희는 아무것도 없느니라(guidance에 관하여)”

꾸란 3:71, “오 성서의 백성들(유대인과 기독교인)아 왜 너희가 진리를 허위와 뒤섞어 의도적으로 진리를 은폐하느뇨?”

꾸란 29:46, “더 좋은 방도(알라의 구절들과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으로 그들을 초대하는 좋은 말과 태도)가 없으면 성서의 백성들(유대인과 기독교인)과 함께 논쟁하지 말며 저들 중 부정한 자들과는 전혀 논쟁하지 말라 그리고 (저들에게) 이르라: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당신들에게 계시된 것을 믿노라; 우리의 하나님과 당신들의 하나님은 한 분(알라)이시며 우리는 (무슬림으로서) 그분(알라)께 복종하였노라’고 말이다”

꾸란 5:14, “그리고 스스로‘우리는 기독교인이요’라고 하는 자들로부터도 내가 약속(their covenant)을 받았으나 그들은 그들에게 보내어진 메시지 중에서 선한 부분을 저버렸노라. 그리하면 부활의 날(저들이 알라의 책을 버리고 알라의 메신저들과 그분의 질서들에 복종하지 않고 알라의 계율을 범하였을 때)까지 그들 가운데에 증오와 대립을 내가 심었노라 그리하여 곧 알라께서는 그들 자신들이 행해온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릴 것이니라.”

꾸란 9:29-31, “성서의 백성들(유대인과 기독교인) 가운데 (1) 알라를 믿지 아니하고, (2) 최후의 날을 믿지 아니하며, (3) 알라와 알라의 사도께서 불법이라 한 것을 불법으로 지키지 아니하며, (4) 진실(이슬람)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이 세금(Jizyah)을 기꺼이 납부하고 그들 스스로 복종할 때 까지 싸우라 그리고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에스라(‘Uzair)가 알라의 아들이라 하고 기독교인들은 메시아가 알라의 아들이라 하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노라 그들은 그들 이전에 믿지 아니한 자들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니 알라의 저주가 그들에게 있으니라 얼마나 저들이 진리로부터 벗어나 미혹되어 있는가?”

이와 같은 꾸란의 생각을 갖고 있는 무슬림들이 기독교인과 접촉하게 될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다양한 이슈들이 우리의 우정에 영향을 줄 것이고 복음 전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복음 선교에는 3 가지 의사소통의 방도가 있다.

 

무슬림들은 우리의 이웃이며 알라신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무슬림이웃의 믿음에 대하여 존중하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사랑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선교사명을 감당하는 데에는 3가지의 방도가 있다. 임재선교, 선포선교, 그리고 제자화 선교이다. 대화(Dialogue)는 임재선교와 선포선교의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 이웃들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저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3:15 말씀대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말이다.

이 대화선교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단한 기도와 준비, 그리고 매일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만이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슥4:6)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다가가면 주님께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것이다(행 1:4-5; 고전 12:11). 또한 대화선교방법은 무슬림들과 친근한 관계형성이 중요하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맘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대화는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서로의 다른 종교적 유산과 다른 영적인 가치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하나님을 찾는 방법과 성경적인 영적인 부요함과 일상적인 삶의 인간사들에 대해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대화를 통하여 상호 이해가 점점 더하게 될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는 단지 지적인 나눔이나 토론이 아니다.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의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늘 복음 선포의 요소로서 대화를 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대화의 목표는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자주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의미들을 갖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인간에 대한 사랑(알라의 자비와 긍휼로 표현된)을 자주 논하지만 인간의 알라에 대한 사랑은 조심스럽게 거론한다. 무슬림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많다. 예를 들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다는 것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에 대하여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대화의 시발점이 되어는 대화에 실패를 반복하여 가져온다. 우리의 무슬림 이웃들이 이 용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는지 그 방도들을 주의깊게 귀기 울여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혜롭고 적합하게 용어들을 선택해야 하고 그들의 의미가 모호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정의를 내림으로 혼선을 피해야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 둘 다 유일신 신앙을 진술한다. 이슬람은 알라의 유일성 즉, 타우휘드(tawhid)를 말한다. 이슬람은 알라의 99가지 이름들을 갖고 있는데 이는 ‘알라의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the Most Beautiful Names belong to Allah; 7:180; 17:110; 20:8; 59:24)이라 알려져 있다. 알라의 이름들은 그의 본질을 반영한다. 하지만 알라의 자기 계시는 그의 뜻에 제한된다. 이슬람은 주장하기를 알라는 초월적이고 전적으로 그의 창조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최고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87:1).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자신을 인격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나타내시기를 선택하셨다. 인격적으로 만나는 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야훼(Yehweh), 즉 ‘스스로 있는 자’(I AM; 출 3:13-15; 6:2-3; 19:16-20)시며 늘 현존하시며 자신과의 계약관계로 사람들을 부르신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이해는 다음과 같이 비교된다.

꾸란

성경

꾸란은 알라의 계명과 그의 이름들의 계시를 강조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분 스스로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유일하신 분으로 인식한다.

 

기도에의 부름에서 낭송되는 것으로 이슬람 배후에서 움직이는 원칙은 La ilaha illa Allah (god은 없고 오직 God '알라'만 있다)이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모든 다른 종교적인 고백들을 해석하는 데에 통하게 되는 렌즈이고, 이것은 많은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가장 근본적인 공통의 화제는 그리고 대화와 서로 간 이해를 위한 최상의 기반은 하나님 혹은 알라에 대한 용어 자체보다 그 의미를 함유하는 유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유일신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은 두 믿음의 매우 근본적인 원칙들의 부분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전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신의 유일성, 신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 그리고 이웃사랑의 화제는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공통 화제이다.

 

이 공통 화제에 있어서 핵심 질문들은 다음의 세가지이다.

(1) 무슬림들은 알라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2) 무슬림들은 그들의 이웃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3) 앞으로 종교간 관계에 있어서 이 주제들에 관한 대화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꾸란은 알라의 사랑을 작품으로 여긴다. 그는 선을 행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진실로, 알라는 Al-Muhsinun(선을 행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2:195). 이 절에서 알라는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명료하게 한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우휘드(tawhid)의 비전은 인간의 사랑이 알라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면 인간의 사랑이 가능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알라의 자비(Mercy), 긍휼(Compassion), 인도(Guidance)의 개입을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가리킨다. 이 사랑은 그의 하인들을 향한 선한 주인의 선과 결부되는 것이다.

 

다음의 꾸란에 나타나듯이 알라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다.

 

2:190 알라는 계율을 범하는 자(transgressors)를 사랑하지 않는다.

2:205 알라는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mischief)를 사랑하지 않는다.

3:32 알라는 불신자(disbelievers)를 사랑하지 않는다.

3:57 알라는 다신숭배자나 잘못을 일삼는 자(Zalimun; polytheists and wrong-doers)를 사랑하지 않는다.

 

꾸란에 알라가 사랑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2:195 알라는 선을 행하는 자들(Al-Muhsinun)을 사랑한다.

9:4 알라는 의로운 자들(Al-Mattaqun; the pious)을 사랑한다.

61:4 진실로 알라는 그의 까닭으로 시멘트를 바른 것같이 속까지 견고한 구조로 전투장에서 싸우는(fight in His Cause) 자들을 사랑한다.

 

꾸란에서 알라의 99가지 이름들 중의 하나는 Al-Wadud (사랑하는 분; the Loving One)이란 이름인데 꾸란 11:90과 85:14에 나타난다.

 

11:90 너의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며 그분께 돌아가라. 나의 주님은 참으로 가장 자비로우시고 사랑스러우시다(Most Loving).

 

85:14 그분은 (이슬람의 의로운 신자를) 용서하시는 사랑이 충만한 분이다(Oft-Forgiving, full of love).

 

위의 두 경우는 ‘사랑스러운 친절의 충만’으로 이것은 질적인 면이 알라의 본질에 새겨진 것을 보여준다.

 

이슬람이 알라의 본질을 알 수 있는가? 아니면 그냥 그의 뜻만 알 수 있는가? 그들이 Insha Allah라고 말할 때 알라의 어떠한 본질을 생각하는가? 이슬람은 가르치기를 알라는 세 가지 그의 활동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창조, 심판, 그리고 응보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알라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꾸란 3:31-32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알라를 사랑하면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알라가 너를 사랑할 것이고 너의 죄들을 용서하리라. 알라는 용서하시고 자비로우시다.” 말하기를: “알라와 그 메신저에게 복종하라.” 그러나 만일 믿음에서 돌아서면 알라는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여기에서 사랑은 복종과 연결되어 있다. 복종은 인간의 알라와의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알라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꾸란의 사랑은 ‘찬동’(approval)으로 쓰여진다. 알라는 그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사랑한다. 무슬림들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과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다음에는 이슬람과 기독교간 대화의 내용을 통하여 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공통의 말씀”("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

 

2006년 9월 13일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0월 13일 ‘Id al-Fitr의 때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대학교 강연에 대해 모든 교단들과 사상의 학교들을 대표하는 세계 전역에서 온 38인의 이슬람 대가들과 학자들이 교황에게 응답하기 위해 함께 모였는데 이는 지적인 교류와 공동의 이해 차원에서 열린 모임이었다. 이슬람의 각 분파 무슬림학자들은 교황에게 공개서한에서 최근의 역사에 있어서 첫 번째로 이슬람의 참 가르침들에 대해 한 목소리를 발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이후에는 무슬림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확대하였다. “공통의 말씀”(“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는 2007년 10월 13일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포함한 전 세계의 기독교회와 교단들 지도자들에게 무슬림 학자들과 성직자들, 지식인들 138명에 의해 작성된 공개서한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 핵심으로 하는 꾸란과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장 중대한 황금률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무슬림 지도자들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움직였다.

 

(1) 그들이 믿기를 세계의 무슬림들이 잘못 인식되고 있다고 보며 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반대하며 기독교 측에서 전 세계 무슬림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그들을 보는 것에 대해 부인하고자 한 것이다.

 

(2) 무슬림들은 2006년 베네딕토 교황의 중세 기독교인 황제의 칙령에 대해 언급한 교황의 연설 내용에 대해 괴로움을 겪으며 그것을 밝히고자 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무함마드는 “악하고 무자비하며... 칼로써 그의 믿음을 퍼뜨리는 것에 대한 신념을...”에 대한 응답으로 38인 무슬림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교황의 강연 내용의 잘못들과 오해들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이“공통의 말씀” 구절은 알라가 선언하는 꾸란에 나온다: “오 성경의 사람들이여! 우리와 당신들 간에 같은 말씀을 들으러 오라”(3:64). ‘책의 사람들’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포함되는데 그들에 대한 “공통의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 (무슬림들에게는 ‘알라’)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했다: “만일 네가 알라를 사랑하면 나를 따르라 알라께서는 너를 사랑하고 너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꾸란 3:31); 그리고 또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르기를, "알라와 최후의 날을 믿는 누구든지 그의 이웃을 곤궁에 빠지게 하거나 해쳐서는 안된다."; “너희 중에 아무도 네가 너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너의 이웃을 위해 사랑할 때에야 너무 믿음이 비로소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석서에 무슬림 지도자들은 주장하기를, “이웃에 대한 감정이입과 동정은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관용과 자기희생에 의해 동반되어야 한다.”

 

“공통의 말씀”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웃에 대해 이웃의 믿음과 그들의 종교의 자유에 대해 존경한다며 꾸란 2:256,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를 인용하면서 무슬림들, 기독교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각자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는 것에 따르도록 자유가 있어야 하고 왕들과 같은 주권들 앞에 부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공통의 말씀”의 첫 응답은 예일대학에서 142명 이상의 무슬림 종교 학자들이 그들의 진술에 서명한 것 같이 수백인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공통의 말씀”에 대한 기독교인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Loving God and Neighbour Together”)를 주창한 예일 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화해 프로그램을 설치한 Yale Center for Faith and Culture의 디렉터인 Miroslav Volf는 무슬림의 진술을 칭찬하였다.

 

예일 문서는 기독교인들이 늘 그들의 동료 무슬림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과거 십자군 전쟁 때에 그리고 현재 ‘테러와의 전쟁’의 과거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이웃들에 반대하여 지은 죄책감이 있어왔다고 하며, 예일 서명자들은 부정할 수 없는 차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입장을 표하는 공통적인 기반을 약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예일 문서에 서명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이 하듯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예일 문서에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동감하지 않고 서명에 동참하지 않았다.

 

예일 대화(Yale Dialogue)에서 릭 러브(Rick Love)는 진술하기를, “예일 화해 프로그램에서 팀은 무슬림 내빈들을 접대하는데 지칠 줄 모르고 일하였다... 이러한 방도로 환대를 보여줌으로써 마음이 열리고 도전하는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제목들에 더 호소할 수 있었다.”릭 러브는 진리에 대한 길을 가능케 하였다. 러브는 대화의 중간에 복음의 진실이 의사소통되었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와 십자가에 대한 발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발표, 복음적인 믿음 등에 관한 강연이었다. 러브는 그의 의견이 명료해지도록 하는데 대화는 관점들을 나누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계속되는 우정에 대하여 나누는 것이라 보았다. 이는 깊은 나눔과 더 큰 공동의 이해를 의미한다.

 

릭 러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수피의 신비적인 강조는 수피들로 하여금 이슬람의 다른 형태들 (예를 들어,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보다 더 평화를 만들기 위해 열려있게 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더 이슬람주의(Islamism)와 폭력주의(terrorism)에 저항하도록 만든다... 이 대화는 복음적인 것들이 다른 분파들보다 수피 무슬림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 의미를 갖고 수피들과 관계형성들을 추진함으로써 더 많이 공통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피즘은 하나님의 사랑(mahabbah)을 다룬다. 알 할라지(al-Hallaj, d. 309/922)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essence)은 사랑이다. 니콜라스(Nicholson)는 진술하기를,

 

“창조 이전에 알라는 절대적인 일치(unity) 가운데 있는 그 자신을 사랑하셨고 사랑을 통하여 그 자신을 그 자신 홀로에게 계시하셨다. 그리고선 홀로의 존재 안에 있는 사랑을 보기를 바라며 외부적인 대상-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그 자신의 모든 속성들과 이름들을 부여한 한 이미지를 낳은-으로서 다름과 이원성 없는 사랑을 보기를 열망한다. 이 신성의 이미지는 알라 안에 그리고 알라에 의해 드러나게 한(신격이 인간성 안에 구체화된) 아담이다. 그러나 알 할라지는 신적인(lahut) 것으로부터 인간성(nasut)을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비록 신비적으로 결합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본질상 일체가 되는 것이 아니며 상호 교환할 수 없다. 결합 내에 개성이 남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포도주가 물과 섞일지라도 물이 포도주로 바뀌지는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카고에서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컨프런스의 최근 모임에서 닉 기어(Nick Gier)는 “공통의 말씀”에 대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응답들에 관한 순서에 참여하였다. 두 무슬림들과 두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이뤄진 토론(panel)은 양측 다 예일 문서에 서명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기어는 무슬림이 공통적인 기반을 훼손했다고 생각되는 텍스트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그 무슬림은 꾸란이 하나님의 사랑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였고 또한 무슬림들은 그들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지시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응답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구약성경에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의 많은 예들을 지적할 수 있었고 혹은 특별히 루터의 신앙고백서(catechism)의 모든 페이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타나는 것을 지적하였다. 꾸란은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에 관련된 부분이 192군데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는 17번만 거론할 뿐이다.

 

사람의 적들을 사랑하는 것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기본적인 명령이지만 여기에 무함마드가 Ta’if 사람들에 의해 공격당함 이후에 말한 것을 살펴본다:

 

“대부분의 덕행이 있는 행동은 관계형성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초기 공통적인 기반의 극적인 예들로서 이 공격 이후에 무함마드의 도움을 받게 되는 한 기독교인 노예가 있었다.

 

이 하디스(hadith)의 메시지는 무함마드와 그의 메시지를 거절하였던 Ta’if의 사람들이 나중에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의 검 아래에 이슬람으로 강제로 개종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손상이 된다.

 

기독교인 노예 아다스(‘Addas)는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를 만나러 나가지 않았으나 그의 이교도 주인들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명령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이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우정의 표시로서 그의 친절을 예를 들어 오해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은 고려하기를 아다스는 Ta’if로부터 이슬람에로의 첫 개종자였다. 그래서 그는 거의 종교 간의 조화와 협력의 예가 아니다.

 

이슬라믹 해석의 전통에서 주요 무슬림 학자들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신의 개념들에 있어서 중대한 차이들을 이해하였다. 무슬림의 경험을 내면으로 아는 예일의 학자인 라민 사네(Lamin Sanneh)는 기록하기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는 것은 차이의 답례에 있어서 분명하다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그들이 그들을 분리하는 것같이 공통적인 면에 있어서 그들이 가진 것에 의해 연합되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인간의 다른 사랑으로부터 격리될 수 없다. 일부 구절에서, 상처를 입기 쉬운 다른 사람은 실제적으로 자신(Self)과 하나님 간에 두어 진다 -다리 혹은 잠재적인 장애물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와 커뮤니티가 있는 그리고 약점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결속이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곳인 마태복음 25장의 심판장면은 또 다른 그리고 심지어 더 인상적인 예이다. 무슬림들이 자신(Self), 다른 이(the Other)와 하나님 간의 아주 밀접한 방도로의 관계를 볼 수 있을까? 다른 이(Other)가 자신(Self)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지는 정도까지 말이다. 흥미있게도 사히 무슬림(Sahih Muslim)의 ‘경건의 책’(Book of Piety)에서는 마태복음에서 심판장면에 아주 유사하게 오는 병든 자들을 방문하는 공덕에 대해 언급하는 하디스 쿠드시(Hadith Qudsi)가 있다. 하디스에 따르면, 알라는 부활의 날에 말할 것이다: “오 아담의 아들아, 나은 병들었으나 네가 나를(Me) 방문하지 않았다.” 그 고발당하는 자가 외치기를, “오 나의 주님, 당신께서 세계의 주인이시온데 내가 어찌 당신을 찾아뵐 수 있겠습니까?” 알라께서 말씀할 것이다: “나의(Mine) 그와 같은 종이 병들었으나 네가 그를 방문하지 않은 것을 너는 몰랐느냐? 너는 만일 네가 그를 방문했다면 네가 그로인해 나를(Me)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느냐?”

 

데이빗 보쉬는 “진실한 대화는 사람들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벌써 장애물들을 제하셨고 성령은 변함없이 인간 이해를 거치는 방도에서 일하신다.”

 

이슬람은 신자들이 ‘설득’과 ‘아름다운 방법들’을 사용함으로써 불신자들을 이슬람의 지역으로 초대하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다와(da‘wah)라고 한다.

 

그러면 무슬림들은 그들의 이웃들 사랑을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하는가?

 

이웃 사랑은 늘 알라의 사랑에 수반된다. 그 이유는 이웃 사랑이 없이 알라에 대한 진실된 믿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네 자신에 대해 네가 사랑하는 것을 네 이웃을 위해 네가 사랑할 때까지 너희 중에 아무도 믿음이 없다.” 이것은 신약성경과 비슷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꾸란은 분명히 이웃에게 선을 행함과 더불어 하나님 예배를 함께 가져오는데 이는 기독교의 사랑의 황금계명과 근접한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분과 아무것도 결부시키지 마라. 네 부모, 친척, 고아, 가난한 자, 가까이와 멀리 있는 이웃에게, 여행객들의 필요에, 그리고 네 노예들에게 선량하여라”(꾸란 4:36). 이웃 사랑의 필요성에 관하여 예언자 무함마드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네 자신을 위해 네가 사랑하는 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기 까지 믿음이 없는 것이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모세와 예수의 추종자들을 초대하도록 명령하는데 그것은 공통의 기반들을 확인하고 선을 행하고 해를 방지하기 위한 협동을 증진시키도록 돕고자 함에 있다. 꾸란은 명령하기를, “말하라, 오 책의 사람들(모세와 예수의 추종자들)이여! 당신과 우리 사이에 공통의 용어들(기반; 단어)로 오라. 우리가 오로지 알라만 예배할 것이라고 말하라. 우리는 그분과 협동자들을 연합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알라 외에 다른 보호자들을 세우지 않는다고 말하라.”(3:64)

 

꾸란과 성경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슬람보다는 단지 종교적인 다양성의 신적인 제정을 명확히 선포하는, 대화에 참여하도록 조언하는, 그리고 거룩성의 현존과 종교들에 있어서의 의에 관한 절들만 함유하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또한 논쟁의 구절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꾸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꾸란 5:51, “오 너희 믿는 자들아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Auliya'(친구들, 보호자들, 조력자들)로 취하지 말라 그들은 저희들끼리 서로의 벗들일 뿐이니 너희 중 누구든 그들을 벗삼는 자는 분명 그들 중 하나와 같으니라 정녕 알라께서는 Zalimun(다신숭배자와 잘못을 행하고 불의한 자들)을 인도하지 아니하시노라”

 

꾸란 9:30, “그리고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Uzair(에스라)는 알라의 아들이라 하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기를 메시아는 알라의 아들이라 한다. 저것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이전에 불신자들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다 알라의 저주가 저들에게 있으리라 저들이 어떻게 진리에서 벗어나 미혹케 되었느뇨”

이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예배와 믿음의 실천에 있어서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배타적인 해석이다. 이슬람 신자들에게 기독인들이 ‘친구들이나 보호자들’이 될 만큼 신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슬림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알라 자신이 ‘그들과 싸우는’ 것으로 그 이유는 신실한 자들의 적들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나그네가 이웃이다. 나그네를 돌보라고 g나다. “그러나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에게 어떤 것으로도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들에게 꾸어주라. 그러면 너의 보상이 크질 것이고,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이는 그가 감사할 줄 모르거나 사악한 자들에게 친절한 이유이다. 너의 아버지(Father)가 자비로운 것처럼 자비로워라(눅 6:35-36).

 

 

“공통의 말씀” 배후에 신학적인 동기들

 

“공통의 말씀”의 배후에 깔린 의도는 한 종교의 신학을 속이거나 개종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계명들에 기초한 인위적인 연합으로 우리의 종교들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말씀”에서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본질적인 공통 기반, 즉 토라(Torah)의 “너는 너의 마음과 혼과 정신을 다하여 너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자신과 같이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에 근거한 복음의 두 가장 큰 계명에 서술된 대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

 

예일대학에 의해 500인 이상의 기독교인 지도자들의 응답이 이 공통기반은 참이고 우리 두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기초라고 재차 시인하였다. 무슬림들은 그들이 현재 봉사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공통의 말씀”이 발기되어 이 원칙들을 조장하기를 바랐다. 이 “공통의 말씀”은 무슬림 커뮤니티 내에서 목소리들을 조절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그들의 기독교인 이웃들에게 미치도록 하는 도구들을 제공한 것이다. 이것은 무슬림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가들과 종교간 대화 전문가들이 이것을 발기하여 토론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슬림들은 공통 접근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스크뿐만 아니라 각 나라 교회들에 미치려고 노력하였다.

 

예일 응답(Yale Response)에 의해 주어진 인상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슬람과 나눈 공통 기반이긴 하지만 “공통의 말씀”에서 제안된 신학적인 입장은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았다. 하나님 자신은 성경에서 스스로‘사랑의 존재’라고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무한정한 선을 반영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의 견해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사랑한다.”(요일 4:19). 대조적으로 이슬람의 견해가 제시된 “공통의 말씀”에서는 무슬림들이 알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알라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공통의 말씀”과 대조적으로 예일 응답은 사랑받아야 할 ‘이웃’은 우리의 적들도 포함한다. 예일 응답은 원수를 사랑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받는다고 설명한다. 대조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고 하는 아이디어는 이슬람에서는 거부된다. 그리고 이는 “공통의 말씀”의 반복된 요청들 즉 알라와 여하한 것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지 않도록 요청한 것과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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