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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상]신인문학이 오늘의 한국신학에 주는 의미와 문화적 실천신학의 제기<1>

신인문학(the New Humanities)이 오늘의 한국신학에 주는 의미와 문화적 실천신학(Cultural Practical Theology)의 제기(2009.10.16-17 '한국기독교학회' 제 38차 정기학술대회 주제발표)


-노 영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 목  차 >


Ⅰ. 인문학의 정의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분석

  1. 인문학의 정의
  2. 인문학의 위기 분석
    1) 인문학 위기에 대한 두 가지 분석 
    2) 과학주의의 실용성에 따라 야기된 위기
    3) 인문학의 목적 구현이 불가함에 따라 야기된 위기
    4) 항시 위기의 학문이었던 인문학


Ⅱ. 대안적 신인문학(the new humanities)의 모색

  1. 응용인문학(applied humanities)
  2. 표현인문학(expressive humanities)
  3. 문화인문학(cultural humanities)


Ⅲ. 신인문학의 견지에서 오늘의 신학적 방향성 진단

  1. 응용인문학의 견지에서 바라본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으로의 지향
  2. 표현인문학이 오늘의 신학함과 신학교육에 주는 의의
  3. 문화인문학에 대한 성찰을 통한 오늘의 신학함과 신학교육에 대한 반성


Ⅳ. 문화적 실천신학(cultural practical theology)의 제기

 

Ⅰ. 인문학의 정의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분석

 1. 인문학의 정의

  인문학(humanities)은 보통 문사철로 대변된다. 문사철은 인문학을 대표하는 영역인 문학과 사학과 철학을 통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영역은 문사철에만 제한되어 있지는 않다. 고대와 근대의 언어,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음악과 시각예술 및 공연예술들이 인문학에 속하기도 한다. 인류학, 지역연구(area study), 커뮤니케이션 연구, 문화연구 등은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종종 인문학에 포함될 때도 있다.
  인문학은 주로 경험적 접근을 하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나 사회과학(social science)과는 달리, 분석적, 비판적, 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조건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세상과 자연현상이라는 객체로서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과 구별된다. 이에 인문학을 '인문과학'(human science)으로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문학은 주체로서의 인간존재와 그들의 문화 및 자기표현을 다루는바, 인문학적 텍스트는 과학적 텍스트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의 인문학 체제는 근대 이전의 인문학 체제와 같지는 않지만 연계성을 찾을 수는 있다. 서구에 있어 인문학의 역사는 주전 5세기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문학은 시민을 위한 광범위한 교육(education)으로서의 '파이데이아'(paideia)였다. '파이데이아'엔 육체적 훈련, 음악, 시, 춤 및 정치적 사회적 역사 등이 포함되었다. 로마 시대의 인문학은 그리스 시대보다 실용적이었다. 주전 1세기 키케로(Cicero)는 웅변학교를 세우고 사회적 영향력을 주는 공적 견해나 정책을 말하는 웅변가 양성과정으로, 고전연구를 중심으로 한 교육으로서의 '후마니타스'(humanitas, 인문성)를 주창하였는데, 그 이름이 인문학을 말하는 'humanities'의 기원이 되었다. 고대 로마시대의 9개 자유학문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 의학, 건축학이었다. 중세시대에는 교양과목으로 7개의 과목이 제시되었는바, 2개 과목들이 축소되었다. 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과 함께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중세는 합리적 체계성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실천적 헌신성을 인문학을 주된 과제로 생각했다. 이 시대에는 신학이 '학문의 여왕'(the queen of the sciences)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변화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났다. 르네상스의 인문학 연구는 신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중세시대의 학문과 차별하여, 인문연구(studies of humanity), 곧 'studia humanitatis'에 중심성을 두었다. 19세기 들어 자연과학의 발달은 인문학에 큰 도전이 되었다. 이에 인문학은 새로 발달된 자연과학과 구별되어 재정의 되었다. 
  오늘에 있어 인문학하면 대학의 교양과목(liberal arts)을 연상하게 된다. 교양과목이란 전공에 들어가기 전 학생들이 알아야 할 일반적 지식을 언급하는 바, 이성적 사고 및 비판을 개발하기 위한 교육과정들을 말한다. 교양과목 중엔 예술, 문학, 언어, 철학, 정치학, 역사학, 수학, 과학 등이 포함된다. 이에 있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 곧 신학의 일면이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인문학과 교양과목은 서로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차이가 있다. 교양과목 중엔 과학 분야 및 사회과학 분야 중의 하나인 정치학 등이 들어가지만, 인문학은 그런 영역의 학문을 포함하지 않는다.
  물론 인문학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탐구하는 학문으로, 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인 '신학'(studia divinitatis)을 인문학의 범주에 넣는 것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거의 인문학이 인간주의(humanism)와 연결되어 신본주의와 대립되었다면, 중세시대와 같이 오늘날에 와서는 인문경험과 종교경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가 인문학의 관심이 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인간주의(humanism)를 인문학의 근간으로 삼는 경향이 지양되어 왔다. 프랑스의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주장한 바와 같이, 오늘에 있어 보편적 인간성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만큼, 인간의 본성과 인간성의 성취를 인문학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오늘의 시대는 탈인간주의(post-humanism)의 시대로 지칭되는 바, 인문학을 인간주의의 한계에서 정의하려는 것은 무리한 일이 된다.
  고려대학교의 ‘인문학선언’은 인문학을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정체성이란 "모든 학문과 인생사에 필요한 기본 중의 기본" 소양에 관련되며,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도록 하는 일과, 그런 주체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원동력으로서의 고양된 정신과 실천력을 기르게 하는 데에 있다.
  이 같은 인문학에 대한 전통적 정의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하여 잘 정돈한 것으로, 이상엽의 인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박사는 인문학을 인간다움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위한 학문, 곧 보편적 인간성을 탐구하고 이로부터 규범적 정향성을 도출하여 교육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이상과 같은 인문학의 정의들에는 몇 가지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다움으로서의 보편적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명으로서의 인간이해, 그로부터 규범적 정향성을 도출하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을 교육하는 방법, 그러한 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는 일 등의 요소들이다. 이와 같이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며 동시 인간에 의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이전의 인문학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과의 연관성이 많았으나, 근대에 들어 인문학이 자연과학과의 차별되면서 분리되어 발전하였음을 파악하게 되었다. 인문학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과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러한 학문 분야들의 연구결과를 무시하곤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을 연구의 주 대상으로 삼은 인문학의 견지에서, 초월적이며 종교적이며 신학적인 견지들을 배제한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위축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고전적 인문학엔 비언어적이며 정서적인 분야로서의 음악 및 몸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체육과 춤 등이 포괄되었으나, 작금의 인문학에선 이런 분야들이 배제되는 상황이다. 일면으론 고전적 인문학이 더 바람직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오늘의 인문학 연구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학문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학제적 노력이다. 인문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경계를 폐쇄한 체, 다른 학문과의 폭넓은 소통을 약화시키는 것은 인문학의 풍성함을 저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 대학들은 학문을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인문과학은 인간(human being)을, 사회과학은 사회(society)를, 자연과학은 자연(nature)을 그 탐구의 주대상으로 한다. 학문의 영역들이 이 같이 분리되기는 하지만, 실상은 이들 학문 간의 연관이 차단된 것은 아니다. 사회를 잘 알기 위해선 인간을 잘 알아야 하고, 자연도 잘 알아야 한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이 인간중심의 연구라고 하여, 사회와 자연의 이해를 배제한다면 그 목적을 제대로 성취하기 어렵다. 인간을 잘 알기 위해서는 사회와 자연과 더 나아가서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서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자연과 신과의 다각적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한 폭 넓고 깊은 조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 연구엔 타 분야 학문과의 교류협력과 학제적 탐구가 긴요하다고 할 수 있다.


 2. 인문학의 위기 분석

  1) 인문학 위기에 대한 두 가지 분석 

  서구 인문학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의 원인에 의해 야기되었다. 먼저는 인문학 외부의 상황 변화에 따른 위기이다. 과학주의와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따라 돈벌이 되는 실용적 학문이 중시되면서, 이념적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점점 경시되었다는 분석이다. 본래 인문학은 바람직한 시민이 되는 것을 돕는 실제적인 학문이었는데, 현대에 와서 인문학자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을 함으로써, 인문학은 삶과 유리된 지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활세계에서 등장하는 문제들을 개념화하지 않고 현학적으로 치우쳤으며, 자기들만이 아는 암호를 가지고 학문을 함으로 일반 대중은 소외되었다. 하지만 인문학의 위기의 더 본질적인 원인은 인문학 자체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야기되었다는 두 번째의 분석이 있다. 인문학은 그간 인간의 보편적 정신을 전제하고, 올바른 삶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며 교육하는 학문으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변화하지 않는 인간 정신세계를 상정하고 그 위에 인문학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황은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바, 인간의 보편성과 가치의 통일성을 추구하려 했던 세계관의 몰락과 함께 인문학이 위기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2) 과학주의의 실용성에 따라 야기된 위기

  먼저는 인문학의 실용성과 실천성이 문제되었다. 삶과 유리된 이론적 작업 중심의 연구풍토가 문제였다. 현학적이며 소통이 되지 않는 학문연구가 세상과의 거리를 더 두게 하였다. IMF 이후 주창된 지식정보사회에 기능적으로 대응하는 '신지식인 운동'의 대두는 인문학의 위기를 증폭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다른 학문과의 교류나 소통 없이 고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면서 폭넓은 학제적 연구들이 후퇴하였다. 또한 인문학의 연구 목적이 인간다운 삶과 아름다운 사회를 위한 탐구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보수적인 이론에 치우쳐 실천성에서 미흡한 결과를 내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인문학의 위기 분석은 피상적인 면이 적지 않다. 19세기 이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이념적 학문의 퇴조라는 분석 및 신자유주의에 의거하여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인문학이 경시되는 추세라는 분석 등은 얄팍한 측면이 많다. 과학주의와 실증주의가 만연될수록 오히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이 더할 것이며, 신자유주의적인 사상이 확산될수록 경제와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소중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물결은 세계 경제에 있어 정의의 문제, 가치의 문제 등을 더욱 중시하게 하였다. 또한 인문학은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 사고방식, 집단적인 모습,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과 설득방법에 형태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인문학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 것이다. 현대사회가 과학에 의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으로서의 인문학의 필요성은 더 증가하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비실천적 방향으로의 진전은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3) 인문학의 목적 구현이 불가함에 따라 야기된 위기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상적 인간상이 정해지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교육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학문적 논의들은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간추려내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해석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이해에 있어 주관성의 개입이 불가피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순전하며 보편적인 객관적 실재에 이르는 것이 가능치 않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들은 모든 진리인식을 주관적으로 상대화시켰는 바, 그 결과 보편적 인간성과 보편적 윤리적 규범을 산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문학의 근본 목적인 인간본질의 보편성을 추려내는 것이 어려워짐으로써, 인문학의 연구 자체에 큰 걸림돌이 놓이게 된 것이다. 보편적 관점에 서서 인간을 보편적으로 이것이라 정의할 수 없으므로, 인문학은 내부적인 큰 위기에 싸이게 되었다.
  특히 인문학 자체적 연구경향이 이와 같은 인간성 탐구에 더욱 어려움을 야기하였다. 무엇보다 인문학이 전문화 논리를 통해 세분되게 됨으로써 인간의 한 단면을 그릴 수는 있으나, 인간의 전체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전문화 논리를 통해 연구범위가 더욱 세분화되고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될수록, 인간주체에 대한 즉자적 연구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지게 된 것이다. 동시 많은 거대담론들이 와해되면서 보편성의 개념이 희미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인간성을 찾고 그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인문학의 노력들이 퇴색되게 되었던 것이다.

  4) 항시 위기의 학문이었던 인문학

  인문학은 언제나 위기에 봉착하곤 했었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18세기 초,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 반복하여 인문학은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근본적인 위기는 외부에서부터 오는 위기라기보다는, 그 자체에서 야기된 위기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삶과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다. 그러한 인간주의적 인문학의 경향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의 인문정신을 통해 더욱 고양된 바 있다. 신의 초월적인 면을 배제하고 인간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인간 스스로의 삶을 개선하려는, 이러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론은 그간 심각한 한계상황을 드러낸 바 있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인문학의 인간 연구는 항상 위기의 상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인문학이란 일종의 인간의 위기상황을 깨닫게 해주는 학문으로, 그러한 위기에 대한 인식은 인문학이 처음 나타난 그리스 시대부터 이미 노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위기에 대한 깨달음이 인문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위기 하에 있으며, 이에 인문학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기성을 드러내면서 인간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 대한 대답은 대안적인 가치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질문하며 신학은 그에 대해 답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우리는 항상 문화의 본질(substance)에 종교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질문과 대답의 관계가 신학자 폴 틸리히의 상관관계(correlation)의 방법을 통해 설명되기도 했다. 인간의 사회성과 자연연관성 및 초월성을 배제하고 인간의 내재적 인간상만을 기준으로 하여, 오늘의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들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본질, 인간의 자유, 인간의 자기책임 등 인간의 근본문제들은 신학적이며 사회적인 가치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해결되기 어렵다. 철학자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1775-1854)은 이 같은 인문학과 철학의 문제들을 인식하면서, 그 근본에 초월적 신을 상정하여 인간의 위기문제에 대처하려 하였다. 초월적이며 사회적인 상상력이 오늘의 인문학에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Ⅱ. 대안적 신인문학(the new humanities)의 모색

 1. 응용인문학(applied humanities)

  이상과 같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키 위한 노력들이 인문학 자체 내에서 나타났다. 필자는 그런 노력들 가운데, 특히 세 가지의 신인문학(the new humanities)적 경향들을 소개하려 한다. 응용인문학(applied humanities)과 표현인문학(expressive humanities)과 문화인문학(cultural humanities)이다. 
  '오늘,' '이곳'에 사는 우리들의 문제를 다루는 실천성이 오늘의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이러한 실천성을 위해 응용인문학의 개념이 등장하였는데, 응용인문학이란 사변보다는 실천과 응용을 중시하며, '학제적 방법론'의 사용을 강조하고, 주제와 문제 구성에 있어 유연함을 견지하는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응용인문학은 기호학, 담화 이론, 문화인류학적 관찰법, 서사 이론, 텍스트 분석 방법론 등을 조합하여, 기업의 이미지 전략 수립, 브랜드 가치 설정, 마케팅 및 소비자 조사에 대하여 매우 창의적인 아이디어 생성을 추구함으로써, 경영학 등의 사회과학에 나름의 공헌을 하고 있다. 아울러 응용인문학의 범주 속엔 테크노인문학(techno-humanities)과 문화공학(culturonics) 등의 분야들이 거론된다. 앞에서의 응용인문학은 인문학과 마케팅의 만남이라면, 문화콘텐츠기술 등의 테크노인문학은 주로 인문학과 미디어 과학과의 만남에서 발생한 것이다. 문화콘텐츠기술(cultural technology, CT)을 통한 디지털문화콘텐츠의 확장을 위해서는 과학기술과 인문학 및 예술의 융합이 요청된다. 이 분야의 활성화를 위해 테크놀로지, 인문학적 기획력, 예술적 감수성 및 마케팅에 대한 안목 등을 고루 갖춘 전문가들의 양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존의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이란 이분법을 과감히 뛰어넘는 복합 계열군들, 예를 들면 문화정보학부나 문화정보대학 등의 새로운 계열군의 설치가 요청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산업적이며 상업적 확장에는 조심스러움이 따르게 된다. 인문학은 무엇보다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물질만능주의의 부조리를 정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학문인데, 이마저 배금논리에 흔들리게 된다면 인문학의 뿌리는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이윤추구만을 최대목표로 삼는 실용주의와 이기주의가 정작 중요한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하도록 강요한다. 이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려는 인간의 얕은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문화연구나 실용화의 방향 또는 상업주의에 편승한 연구로 끌고 가려는 생각만으로는 인문학의 근본적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문학의 상업화와 대중문화화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있다. 문화의 대중화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인문학의 근본정신을 중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품화 이전에 따뜻한 인간애와 예술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등 근본에 충실해야 말단도 확장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 먼저 순수한 입장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존중할 때, 그 실용화의 결실도 풍성해질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인문학의 실용화는 현실 문제를 깊이 다루는 쪽으로 움직여야지, 일방적인 상업화된 문화연구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인문학의 실천적 효용성을 다른 측면에서 잘 구현한 응용인문학의 또 다른 예로, 우리는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시작한 희망의 인문학 코스인 '클레멘트 코스'(the Clemete Course)를 들 수 있다. 그는 1995년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20대 초반의 여죄수를 인터뷰하였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그 여죄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인문학의 부재가 원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말에 큰 깨달음을 얻은 쇼리스는 뉴욕에 있는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수료자 17명 중 2명은 의사, 1명은 간호사가 되었다.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거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 상담실장이 된 졸업생도 있다. 현재는 이 클레멘트 인문학 강좌는 북미, 호주 및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로 퍼져 50여개 코스로 운영되고 있다. 이 같은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는 실천적 인문학의 대안적인 전형이 되기도 한다.
 2. 표현인문학(expressive humanities)

  표현인문학은 정대현 교수와 박이문 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주장된 이론으로 일컬어진다. 표현인문학은 이해인문학의 한계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표현 능력을 개발하여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소극성에서 적극성으로, 문화 소비자에서 문화 생산자로, 해석(interpretation)에서 상호작용(interaction)으로, 소극적 이해에서 적극적 표현과 행동으로, 실증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을 통해 자유와 진리가 확증되는 것임을 표현인문학은 강조한다. 소극적으로 문화를 수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표현(expression)을 통해 문화 생산자와 참여자가 됨으로 인간의 진정된 자유와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표현인문학의 네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말한다. 1) 인문학은 사람다움의 표현에 주력해야 한다. 2) 인문학은 표현의 주관적인 개인성과 표현의 공동체적 통합성을 목표로 한다. 3) 인문학은 정보 내용의 생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인문학이 정보사회의 콘텐츠웨어를 담당해야 한다면 그 한 가지의 경우가 인문영상학의 분야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인문학은 일차적으로 문자 그리고 이차적으로 비문자를 포함한 문화 활동을 통해 사람다움의 표현을 추구하려 한다. 표현인문학은 표현을 문자적 표현만으로 국한치 않는다. 이성과 감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논리를 지양한다. 감성적 체험이나 가치적 경험 모두가 언어적이므로 표현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표현은 인간의 모든 경험에 적용이 가능하다. 특히 표현인문학은 인문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인간의 자유가 행동과 실천을 통해 적극적으로 구현됨을 언급한다. 표현을 통해 소통되지 않는 인문학은 살아있는 인문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3. 문화인문학(cultural humanities)

  문화인문학의 내용을 알기 위해 예일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린드벡(George A. Lindbeck)의 책 『교리의 본성』(The Nature of Doctrine)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입장을 ‘탈자유주의’(postliberalism)로 명명했다. 린드벡은 교리의 상대적인 변화를 무시하여 명제적(propositionalism) 진리를 강조한 전근대적(premodern) 신학의 경향이나, 경험을 신학의 근거로 삼은 근대 자유주의적 신학의 경험-표현주의적(experiential-expressivist) 입장을 극복하는, 문화-언어적(cultural-linguistic) 교리이해를 주창했다. 문화나 언어를 가지고 우리는 종교적인 경험을 해석하며, 그 문화나 언어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일종의 계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그는 말한다. 어떠한 언어 및 문화공동체 속에서 사느냐가 이미 우리의 경험과 해석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와 문화가 우리의 경험을 진단하는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해석하는 방향으로서의 전망(perspective)이나 성향(disposition)은 이미 우리를 휩싸고 있는 언어와 문화의 집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은 그 자신이 만든 문화에 의해 삶이 규정되는 문화적 존재이다. 문화는 인간의 자기이해방식의 틀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문화주의적 전환은 불가피하다. 전근대적 입장은 객관적 실재를 추종하며, 근대적 입장은 개인의 주관과 경험을 중시하는 반면, 문화-언어적 입장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의 교호를 강조한다. 이에 있어 언어란 그 학문영역들이 나름대로 갖는 기호적, 매체적, 상징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문화인문학은 위 세 가지 중 문화-언어적(cultural-linguistic) 입장을 취한다. 문화인문학은 문화라는 전체적 지평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자 한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 자기를 이해하며 인간과 다른 제반 존재들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동시 인간은 그 문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문화를 만들지만, 그 문화는 또한 인간의 본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같은 문화적 차이가 사고의 다양성과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야기한다.
  문화인문학은 문화를 연구하는 문화학(Kulturwissenschaft)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문화학은 현실인식 및 그에 대한 지식을 위해 그 연구 대상을 인간행위와 그 산물의 전체영역, 곧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문화'(culture)란 인간 활동의 총체(complex whole)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화는 삶의 한 부분영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문화학은 인문과학과 함께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등을 포함하는 인간 생활과 노동 형식의 총괄 개념인 것이다. 문화학은 이런 확장을 통해 폭넓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를 위한 지식을 제공한다. 문화란 정치학이나 사회학, 철학 등의 한 시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총괄된 전체적 시야를 언급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한 대상을 조망할 때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보다 명확해진다. 문화란 그와 같이 학문영역들의 총체적인 융합을 통해 그 시야를 만들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문화인문학은 인문학의 텍스트를 정전(canon)보다는 문화 전반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한 텍스트에 고정되기보다는 문화 전반에 착목한다. 또한 문화인문학은 텍스트의 이해에 있어서도 문화적 전제가 있음을 강조한다. 문화인문학은 기존의 정전의 선택에도 주관적 이데올로기가 게재되어 있음을 말한다. 문화연구는 자연과학과 문화 및 예술의 개념이나 의미 자체도 문화적이며 사회적적인 환경에서 설정된다고 보는 등, 전통적 인문학과 그 견해를 달리한다. 문화학의 입장에 서있는 문화인문학은 과거 정전의 내용을 고착된 기억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을 오늘의 문화적인 시야에서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과거의 기억을 오늘에 연관하는 비판적 성찰을 플라톤은 회상(anamnesis)이란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회상의 현상은 기억을 통해 자명하게 받아들인 것을 문제시하고, 그 과거의 기억들을 오늘의 시야에서 비판적으로 반성하여 재현시킨다.
  문화인문학은 학문함을 일종의 문화적 실천으로 간주한다. 학문적 사실은 사회적 과정의 산물로서, 전문가 공동체 집단의 과학적 담론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이란 학문의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엔 자연 자체를 인식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자체를 근원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식형식을 통해서만 그것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유되고 의식된 것으로서의 자연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학도 일종의 문화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문화인문학에 있어서는 자연과학 및 기술 또는 미디어의 변화가 우리의 생각 및 사상에 역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인문학은 형이상학을 우위에 놓고 형이하학의 세계가 그에 추종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과학기술과 미디어 기술의 변화는 동시 인간의 정신체계와 사회의 체계를 역순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문화연구는 기술이나 매체 자체에 대한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그 매체가 다양한 환경에서 실천될 때 일어나는 모든 문화적인 의미들에 관해 반성한다. 미디어의 정치적 의미, 사회적 의미, 영적인 의미, 교육적 의미 등 매체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고찰이 행해질 때, 그 새로운 매체의 쓰임새와 문화적 의미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이러한 문화인문학은 인문학을 학문사적으로 문화학 및 문화철학의 전통에 연결하려는, 최근의 독일학자들의 작업에 의해 진전되었다. 프뤼발트(Wolfgang Frühwald) 등이 저술한, 『정신과학의 현주소』(Geisteswissenschaften heute)는 인문학의 문화학적 전환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책은 방법론에 있어 취약성을 드러낸 바, 이후 뵈메(Harmut Böhme) 등이 저술한, 『문화학』(Kulturwissenschaft)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문화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문화학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장치들(Einrichtungen), 말하자면 인간들 사이의 행위형식 및 갈등형식, 특히 매체적으로 매개된 행위형식 및 갈등형식과 이러한 형식들이 갖는 가치와 규범의 지평들을 연구한다. 문화는 그 문화를 창출한 시대와 지역의 인간이 갖는 자기이해와 세계이해의 방식들을, 이해 가능하게 하는 형식과 관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일종의 세계관(world view)이나 패러다임(paradigm)으로도 언급될 수 있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이해 없는 인간 이해는 불가능하다.
  문화인문학의 과제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문화세계의 기호양식들과 가치양식들의 생성연관 및 작용연관을 역사적, 체계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다양한 자기이해 방식들과 세계관계 방식들을 모델화하여 지식으로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인문학의 다양한 인간의 삶에 대한 유형적 지식들은, 현재의 관점에 매몰된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개인들의 자기계몽을 도울 것이며, 개인들이 자신의 자아주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그 비판적 가치설정의 토대를 제공하고, 선택과 결단에 있어 실천적 지혜를 마련해줄 것이다. 문화인문학은 각각의 학문분과가 자신의 특수한 대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학제간의 협동을 통하여 인문학의 문화학적 확장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주의와 전통적 인문학이 인간의 본성을 전제하고 거기서 인간의 기원과 목적이 있다고 본다면, 문화연구는 인간을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존재를 보며, 인간의 본성을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연구는 이론적으로 탈인간주의를 채택한다." 문화인문학은 전통적 인문학처럼 실천적 인간학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인간주의 곧 인본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파악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주관에 따라 상대적인 입장에서 전개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도 문화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한다. 문화인문학적 입장에서의 역사적 인간학은 문화적 담론들이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탐구한다. 인간의 본성은 불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한 문화 내에서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변화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문화인문학은 인간이 대상을 이해할 때 문화라는 전망을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Ⅲ. 신인문학의 견지에서 오늘의 신학적 방향성 진단

 1. 응용인문학의 견지에서 바라본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으로의 지향

  작금의 인문학의 위기는 신학의 위기와 유비된다. 오늘의 신학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문제들이 노정되어 있다. 첫 번째의 문제는 신학의 실천성과 실용성의 문제이다. 신학이 오늘의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현학적이며 사변적인 작업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이다. 우리의 상황을 숙고하지 않고 외국의 신학들을 여과 없이 소개하는 데만 그친 작업들은 우리의 현실인식을 더욱 어둡게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에 대한 논의가 196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되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에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하이팅크(Gerben Heitink) 교수는, “1960년 대 말부터 실천신학이 급속하게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신학의 독립적인 한 영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응용신학(theologia applicata)에 속하여 응용신학의 보조적인 역할로 만족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제 그 스스로를 사회과학과 밀접히 연관된 방법론을 가진 행동(action)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메테(N. Mette)도 현대 실천신학이 1960년대에 시작하였음을 언급하였다. 그는 실천신학을 정의하면서, “실천신학은 행동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말하는 신학 내의 한 분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천지향적 과학으로 이해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브라우닝(Don S. Browning)에 의해서 저작된 『근본적 실천신학』(A Fundamental Practical Theology)은 실천신학의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브라우닝은 작금의 실천신학이 이전의 실천신학과 다름을 설명한다. 전통적 실천신학은 신학의 한 분야였다. 그러나 현대의 실천신학은 신학의 한 분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신학이 프락시스를 지향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이전의 실천신학으로부터 오늘의 실천신학을 구분하기 위해 ‘근본적’(fundamental)이란 단어를 실천신학이란 말 앞에 덧붙였다. 그는 모든 신학이 근본적으로 실천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는 이런 근본적 실천신학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근본적 실천신학의 첫 단계는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 오늘의 콘텍스트를 설명하고 기술(description)하는 단계이다.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교육철학, 행정학, 의사소통이론, 드라마, 문학, 시각 예술 등이 이를 위해 유용할 것이다. 두 번째의 단계는 성경의 텍스트와 교회의 전승을 빛 아래서 그와 같이 분석된 콘텍스트에 대해 반성(reflection)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선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기독교윤리 등이 사용된다. 세 번째의 단계는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실천(practice)과 행동을 하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브라우닝은 전략적 실천신학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 전략적 실천신학에는 행정, 선포와 재현, 영혼의 돌봄과 치유, 인간 형성과 변혁, 사회구조의 갱신 등에 대한 연구들이 포함된다. 브라우닝은 성서신학과 역사신학과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으로 구분한 개신교의 사분법(the Protestant quardrivium)과는 다른 신학구성을 제시한다. 근본적 실천신학은 신학을 사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하나로 생각하면서, 그 가운데 기술적 신학(descriptive theology), 역사신학, 조직신학, 전략적 실천신학(strategic practical theology)을 포괄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실천신학과 오늘의 실천신학을 구별함이 필요하다. 과거엔 예배학, 기독교교육, 선교학 등의 분야를 실천신학으로 명명하였으나, 요즈음엔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질 않는다. 오늘의 실천신학은 신학이 전체적으로 실천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최근의 실천신학자들은 과거의 실천신학을 '응용신학'(applied theology)으로 구별하여 부를 것을 제안한다. 특히 브라우닝은 실천신학을 전개하며 몇 가지의 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전 신학분야가 실천에 초점을 맞춰 연결될 것과, 사회과학적 분석방법이 이런 신학적 반성 앞에 위치할 것을 그는 강조하였다. 최근의 실천신학은 이와 같이 전 학문분야를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로서, 문화인문학의 방안과 공명한다. 다음으로 근본적 실천신학은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다루는 목회학의 입장에서만 실천의 문제를 한정하지 않는바, 사회를 변혁하는 교회 밖의 일들도 실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 실천신학은 일종의 공공신학(public theology)적 성격을 탑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학교육을 개선하며 실천신학 분야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목회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신학교육이 되기 위해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는 중이다. 실제에 있어 한국의 많은 신학교들이 실천신학의 교수 수를 상대적으로 늘리고 있는데, 그러한 노력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신학교육의 실천지향성은 실천신학 교수의 수만을 늘린다고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핀 근본적 실천신학의 방법론에서와 같이, 전 신학분야가 실천성을 지향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응용신학의 실천을 위해, 이론신학 파트 교수들의 이론적 지지가 요청된다. 신학의 실천성은 전 신학 분야가 긴밀한 유대를 갖고, 실천을 향해 상호간의 연관성을 강화함으로 더욱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2. 표현인문학이 오늘의 신학함과 신학교육에 주는 의의

  표현인문학자들은 이해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을 억압시대의 소극적 인문학으로 말한다. 진리가 더욱 검증되고 인간의 자유가 확장되긴 위해선 실제적 표현과 행동, 그리고 삶 속에서의 표현과 활동을 통한 인문학적 추구가 요청된다고 그들은 언급한다. 표현인문학은 인간의 표현과 생산을 위한 현대의 여러 조건들을 강조한다. 먼저 인간은 표현을 위해 일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일만이 인간의 표현의 수단은 아니며, 동시 일을 중지하고 하는 여가의 활동도 표현의 장으로 중요하다. 여가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표현들을 할 수 있는 바, 그러한 여가 시의 활동들이 오히려 인간됨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할 수도 있다. 여가 시에 하는 달리기 수영 등의 운동, 다양한 취미활동들과 예술 활동, 그리고 세계 곳곳의 여행 등은 이런 여가의 표현성을 잘 매개해준다. 다음으로 지식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은 확장된 표현 수단을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인터넷, 이동통신 등의 정보화 기기들은 우리의 삶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표현의 가능성을 넓힌 바 있다. 우리는 이전의 인류보다 다양한 문화공학적 수단들을 보유하게 된 바, 이런 기기들을 사용하여 디지털 시대에 다양한 콘텐츠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 오늘의 인간에게 표현의 수단으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신체성이다. 21세기의 인류는 이전의 인류보다 몸을 통한 표현의 의미를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의 몸, 우리가 입는 의상, 우리의 얼굴 등 인간은 그가 가지고 있는 몸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많은 내용들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에 있어 이 같은 몸과 신체성의 강조는 자연과 자연환경의 강조로도 이어진다. 인간의 정신만이 인간의 조건을 정제하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자연과 물질 또한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이 같은 자연과 물질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는 인간의 몸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인문학의 전개는 오늘의 신학함과 신학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의 신학교육은 너무 수동적인 강의 위주의 교육이었다. 일방적으로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교수의 말하는 것을 필기하기에 바쁘다. 이런 수동적 교육은 지양되어야 하며, 능동적이며 참여적이고 생산적인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필자는 특히 워크숍(workshop)이 강조되는 교육의 효용성을 제기하려 한다. 학생들이 교회에서 사용되는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보고, 오늘의 교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교육 자료들을 만들며, 중요한 신학적 논점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하는 등 다각도의 연구와 출판하는 작업들을 함을 통해 보다 진취적 교육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실제 교회와 사회에 유용한 여러 책들과 자료들을 만들어 봄으로써, 그들이 학습하는 내용을 더욱 확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화생산자로서의 적극성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인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교실 내에서 일어나는 정규적인 수업과 함께, 서클 활동, 선교여행, 그리고 신학생활 중의 여가를 위한 활동들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이에 신학교는 교육의 과정으로 정규 신학수업 시간표들만 관리할 것이 아니라, 학교 및 학교 밖에서 학생들이 하는 모든 활동의 교육성에 착목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필자는 표현인문학의 취지에서 각 학교에 멀티미디어실을 만들 것을 제안하려 한다. 다양한 미디어들의 개발을 통해 인간은 다중의 표현수단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에 그 같은 매체를 활용하여 학내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매체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요청된다. 학교는 이러한 일을 위해 멀티미디어실이나 방송을 위한 스튜디오 등을 만들어, 표현방식의 다양화를 유도할 있다. 아울러 몸으로 표현하는 워쉽댄스(worship dance), 드라마, 뮤지컬 등을 연습할 수 있는 거울이 달린 연습실을 신학대학교에 만드는 것도 표현인문학을 향한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문화인문학에 대한 성찰을 통한 오늘의 신학함과 신학교육에 대한 반성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전문화로 말미암아 각개의 학문영역에서 제각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서 야기되었다. 그리하여 높은 교육을 받을수록 학제 간의 나눔의 지식의 부족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문화인문학은 인문학을 문화라는 전망에서 바라본다. 앞에서도 문화의 개념에 대해 약간 언급한 바 있지만, 문화인문학에 대해 알려면 문화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미국의 인류학자들인 크로우버(Alfred Kroeber)와 클럭호운(Clyde Kluckhohn)이 문화의 개념에 대해 연구한 유명한 책, 『문화』(Culture: A Critical Review of Concepts and Definitions)에서 문화에 대한 164개의 다른 정의들을 제시한 바 있다. 그들은 여러 정의들을 나열한 뒤, 문화에 대한 정의를 되는 6개의 그룹으로 간추린 바 있다. 기술적(descriptive) 정의, 역사적 정의, 규범적(normative) 정의, 심리학적 정의, 구조적 정의, 유전학적 정의 등이다. 그들은 문화라는 개념이 포괄적인 것임을 언급하였다.
  샤퍼(D. Paul Schafer)는 문화를 하나의 커다란 나무에 비유한다. 신화, 종교, 윤리, 철학, 우주론과 미학은 그것의 뿌리를 형성한다. 경제, 군사체계, 과학기술, 정치 이데올로기, 사회 구조, 환경 정책과 소비자 행태 등은 그것의 줄기와 가지를 구성한다. 교육 체계, 문학, 예술, 영적 신념, 도덕적 실천 등은 그것의 잎과 꽃과 열매들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문화에 대한 접근을 위해서는 제반 학문의 융합이 요청된다. 우주론과 철학과 신학에서는, 세계관, 통전성,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 등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인류학으로부터, 문화의 패턴과 주제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문화의 형성에 관한 통찰을 얻게 된다. 사회학에서는, 가치, 가치체계, 상징, 신념 정체성, 인종, 계급, 종족 및 성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생태학으로부터, 인간의 종과 다른 종들 사이, 인간과 자연의 다른 영역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통찰을 갖게 된다. 그리고 생물학에서는, 다른 종들의 문화에서의 진화적 성격과 유기체적 과정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로부터, 서로 다른 문명과 문화의 성쇠 및 문화의 조직과 진화에 대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예술로부터, 진리와 미의 창조성, 탁월함, 그에 대한 추구 및 숭고함을 추구함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우리는 제반의 학문에서 문화적 통찰들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학은 제반 학문들을 아우르는 통전적(holistic) 학문이라 할 수 있겠다. "문화는 더 이상 삶의 영역 중의 한 부분 영역, 즉 정치, 법률, 경제, 종교, 기술 등과 같이 구분된 영역의 부분체계로 파악되지 않고 이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파악된다."
  문화인문학은 우리에게 이런 통합적인 학제적 연구를 중시한다. 이에 신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보다 적확한 전망을 얻기 위해, 신학 이외의 제반 학문 분야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브라우닝이 제시한 사회과학적인 분석 이외에 인문과학, 자연과학 등 학문 전반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신학적으로 재구성하여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신학교는 학생들에게 인문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기본적 교양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분야를 다 섭렵하지는 못하더라도, 철학 및 종교철학, 종교학, 종교사회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경제학 등에 대한 주요 논점들을 교육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각적 학문들을 통한 교육은 이후 목회자가 되어 설교문을 만들거나, 기독교교육, 상담, 교회봉사 등의 목회를 하는 데에 있어 상당한 상상력을 줄 것임에 확실하다. 또한 학제 간의 대화로 구성된 다양한 팀티칭 과목들의 개설은 학생들의 문화와 인간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문화인문학적 논의는 인간이 사물을 이해할 때, 그가 속한 문화와 언어의 범주 내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인간이 창조한 문화에 의해 역으로 인간이 규정되고 있으며, 또한 그 문화는 세상과 자기에 대한 이해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인문학적 입장은 인간이해에 있어 주관성과 상대성을 야기한다. 이에 우리는 인간의 이 같은 구획(compartment)화된 전망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보편적인 지식의 구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한계성의 극복의 길을 공간전망(space perspective)과 시간전망(time perspective)의 확장을 통해 제시하려 한다. 오늘과 같이 각 문화와 전통의 상대성이 인정되는 시대에서, 자신 및 공동체의 주관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대성에 흔들리지 않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된다.
  먼저 다양한 주장들을 대화를 통해 공동의 합의(Konsensus)로 수렴하려는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방법을 설명하려 한다. 서로간의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행위(communikatives Handeln)에 따른 합의의 도출을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강조하였는데, 우리는 그러한 담화(Diskurs)의 원칙과 기술들을 이용하여 나름의 일치된 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방법은 일종의 공시적(synchronic) 대화의 방법으로 공간전망의 확장을 통한 것이라면, 또 다른 시간전망의 확장을 통한 통시적(diachronic) 방법으로 매킨타이어(Alasdair Chalmers MacIntyre)의 덕윤리(virtue ethics)의 방법을 들 수 있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개념을 한 공동체의 전통과 삶의 경험에서 도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덕에 대한 논의의 전 역사를 조망함으로써, 오늘의 덕의 문제를 논구하려 하였다.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 거스탑슨(James Moody Gustafson)은 이런 공간전망과 시간전망으로서의 확장된 전망을 '신중심적 전망'(theocentric perspective)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대화(dialogue)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 전통과 문화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합의 문제에서 결론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에 일단 합의된 것들의 목록을 열거한 다음, 그와 함께 합의되지 못한 목록들을 열거하여 이후의 논의로 확실하게 남겨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러한 합의되지 못한 내용들이 합의된 내용에 미치는 영향과 전체적인 논의에 미치는 영향들이 분석된 후, 그런 대화의 유용성 문제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서로 대화와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그것의 이유를 밝혀 나중의 대화의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합의가 되었다면 합의가 된 대로, 합의가 되지 않았다면 합의가 되지 않은 대로 대화한다는 것은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 양 그룹은 서로 합의되지 못한 내용을 보고, 서로의 약점과 문제점들을 인식할 수도 있다. 하워스(Stanley Hauerwas)가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세상과의 윤리적 견해의 차이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나름의 윤리적 공헌을 할 수 있음을 말한 바와 같이, 서로 합의할 수 없음이 나름의 큰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간에 대화의 합의점이 예상되지 않는다고 하여, 대화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대화의 결과 서로의 상이점이 발견되어 다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야기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피차에 손해가 되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유익된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Ⅳ. 문화적 실천신학(cultural practical theology)의 제기
  
  오늘의 인문학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세 가지의 신인문학적 노력과 그것들이 오늘의 신학함에 주는 의의에 대해 고찰하였다. 응용인문학, 표현인문학, 문화인문학적 노력이 우리의 신학함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음을 검토한 것이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을 타진할 수 있게 된다. 곧 문화적 실천신학의 방법이다.
  문화적 실천신학의 방법론은 신학함에 있어서의 응용성 곧 실천성 및 문화적인 성찰을 강조한다. 표현인문학에서 제기된 '표현'의 문제는 실천이란 명제 속에 포괄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표현한다는 것은 실천의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수동적인 입장에서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입장에서 의사소통의 수단을 통해 우리의 인식한 바를 표현함으로, 우리는 실천함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표현이란 말은 별도로 다시 삽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문화적 실천신학은 신학함에 있어 실천성과 문화성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 같은 문화적 실천신학의 방법론과 과제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내용으로 간추려 보았다.
  첫째로, 문화적 실천신학은 신학함에 있어 실천성을 강조한다. 이론신학도 실천성을 지향하도록 정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오늘의 교회와 목회 및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반성하고, 그로부터 신학함의 진지함을 끌어내는 것이 문화적 실천신학의 첫 번째 과제인 것이다.
  둘째로, 문화적 실천신학은 신학교육에 있어 수동적 학습자의 입장을 탈피하여,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학습자의 모습을 장려한다. 강의실에서 일방으로 강의를 듣는 피교육자에서, 워크숍을 통해 교회와 목회를 위한 신학적 자료들을 생산하는 등, 능동적으로 문화생산에 참여하는 학습자로서의 입장을 강화한다.
  셋째로, 문화적 실천신학의 신학적 방법론은 문화적 총체성에 주목한다. 학문의 한 분야만으론 인간에 대한 편린적 이해만을 할 수 있는 것인 바, 문화적 실천신학은 전 학문적 구조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조망한다. 현재와 같이 분류되어 있는 자의적인 학문의 구분에 의해서는 현상에 대한 바른 지식을 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총체적 학문을 통한 신학함의 문제는 당연히 학제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서, 역사, 조직, 실천신학 등 신학 전반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 검토를 통해 오늘의 인간의 삶과 체험의 내용을 간추려내고, 그로부터 신학적 질문을 추출해내는 것이 문화적 실천신학의 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한국신학은 한국의 종교문화에 대한 연구와 신학의 사회경제적 접근을 통해 신학적 폭을 넓혀 왔었다. 그러나 그런 일부의 검토만으로 우리의 신학적 확장이 마무리되어서는 안 되며, 학문 영역 전반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문화적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문화적 실천신학은 통전적이며 통합적인 학문성을 추구한다. 문화적 실천신학은 한국문화를 통전적 학문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파악하게 된다. 문화를 종교나 예술이라는 좁은 의미에서 이해하지 않으며, 전 학문의 영역을 통한 총체적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문화적 실천신학은 말하는 것이다.
  '21세기의 한국문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말하려는 문화의 범주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하는 개념이다. 시간적으론 21세기요, 공간적으론 한국에서의 문화라는 것이다. 지금과 이곳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신학의 실천성을 앙양하는 데에 유용하다. 하지만 그 같은 지금과 이곳의 문화라는 지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선, 이전의 한국문화 및 한국문화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한국문화보다 큰 동아시아 사상과 오리엔탈리즘 및 세계적인 문화의 시야로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21세기의 한국문화에 우리의 신학을 접목하기 위해, 21세기라는 시점과 한국이라는 지점에만 머물러 있으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로, 문화적 실천신학은 우리의 신학함이 자신의 주관적인 문화적 시야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임을 인정한다. 누구나 자신의 문화적 환경과 학문영역 및 언어적 테두리에서 사물과 사건들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러한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화적 실천신학은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나름대로 제시하기도 한다. 보편적 실재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방법과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한 합의에의 접근을 통해 이러한 가능성이 찾아질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적 실천신학은 타문화와의 대화를 요긴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 문화의 시야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문화적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함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넓힘과 동시 보정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주관주의 및 상대주의를 극복할 확실한 지지기반을 주는 것으로, 이 같은 노력들을 향한 신학적 함의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문화적 실천신학은 문자에 의한 텍스트의 읽기 및 생산과 동시 비문자적 텍스트의 이해와 생산을 동시에 강조한다. 음악, 미술 등의 비문자적이며 감성적이고 미학적인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의 방법을 문화적 실천신학은 중시한다. 이에 우리는 신학의 콘텐츠를 문자적인 것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되며, 비문자적인 미술, 음악 및 기타 정서적이며 미학적인 영역까지 확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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