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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일]성서로 본 문화, 성경의 눈으로 읽는 문화- 구약을 중심으로

성서로 본 문화, 성경의 눈으로 읽는 문화- 구약을 중심으로(2009.10.16-17 한국기독교학회 제 38차 정기학술대회 주제발표)


왕대일 (감신대 구약학 교수, 한국구약학회 회장)


Ⅰ. 물음의 재구성

  기독교신앙은 전통적으로 문화와 중층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세상을, 그리고 세상 속에 펼쳐지는 문화 현상이나 문화적 실재를 소통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고, 대적하거나 극복해야 할 상대로 여기기도 하며, 초월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변혁의 대상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묻고 답하는 노력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생존하는 방식을 묻고 답하는 노력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에는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요 15:19), 아니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속을 헤쳐 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이 깔려 있다.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살면서도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니버(H. 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가 출간 50 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참여 방식을 살필 때 지금도 여전히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서는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가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문화는 겹으로 형성된 지층처럼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문화현상은 다양하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를 보는 시각에 따라, 문화를 관찰하는 자리에 따라, 문화를 이해하는 문법 등에 따라 다양하다. 예컨대 문화를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보기도 하고, 의식주와 연관되어 살아가는 방식으로 보기도 하며, 사람들이 특정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 지켜야 할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으로 보기도 하고, 예술적 기호로 표현되는 미학적 행동양식으로 보기도 한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소통(커뮤니케이션)의 전 영역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통문화처럼 삶의 특정 영역을 문화로 보기도 하지만, 문화는 신분과 계층, 지역과 시대에 따라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와는 다른 형식의 문화도 존재한다. 산업화시대 이후 우리 삶이 노동과 여가로 구분되면서 여가시간을 조직해 주는 산업으로서의 문화가 등장한 것이다.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른바 상품화된 문화가 삶 속에 뿌리 내리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삶이고, 이데올로기이며, 실천이고, 산업이다.
  문화는 삶의 방식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를 산업으로 간주하더라도,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사고유형이나 행동양식은 그 본질에서 한 사회의 문화적 문법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문화 수용자(소비자)가 주어진 문화를 소비하고 해독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실천 자체가 삶에 대한 가치판단과 개인의 정체성 파악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문화를 묻는 물음 자체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를 특정 영역으로 간주하기보다는 문화를 삶의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문화 현상을 묻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실재를 묻는 것이다.
  성서 속에도 문화가 있다. 성서는 문화의 옷을 입은 텍스트(inculturated texts)이다. 구약의 사상을 헤브라이즘으로 정리하면서 이스라엘 신앙의 "문화적 문법“을 찾는 노력은 성서 속에 수용된 문화를 추구하는 한 예에 해당된다. 성서본문이, 성서본문의 저자나 독자가 특정 사회를 살았던 구성원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에 깊숙이 내장된 지속적 믿음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문화의 옷을 입은 텍스트라면 성서해석학은 문화비평이 된다. 이 때 기억할 것은 성서본문의 의미가 다의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각 본문이 삶의 자리로 삼는 정황이 문화의 구현(embodiment)일 수도 있고 문화에 대한 비평(critique)일 수도 있으며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component)이거나 문화를 이루는 원천(source)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성서 이야기 속에 수용되거나 배격되거나 극복되거나 변혁되어야 하는 문화가 깔려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질문이 제기된다. 성서적 신앙이 성서적 문화의 한 실체라면, 성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던 ”마음의 습관“은 어떤 것인가? 성서적 문화가 성서적 신앙의 한 형태라면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문화를 삶으로 대할 때, 즉 문화의 실재를 삶의 방식으로 대할 때 성서적 신앙이 지향(志向)하려는 삶은 어떤 것이고 성경적 믿음이 지양(止揚)하려는 삶은 어떤 것인가?
 

Ⅱ. 문화는 경작의 대상이다. 

  사람은 문화를 가꾸는 존재로 부름 받았다. 구약의 들머리인 창조신앙이 이것을 증언한다. 구약의 창조신앙은 세상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대한다. 창세기 1장에서 코스모스를 대하는 히브리인들의 시각은 헬레니즘의 그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 창조신앙의 한 가운데에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는 존재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경작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 1:28 사역).

  창세기 1:28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모든 생물을 다스려라”로 읽히는 구절이다.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조신앙의 위임에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군사적 정복의 의미가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지구 환경의 폐해를 낳은 산업과 상업과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명령에 대한 해석학적 반성은 땅을 ‘정복하라’로 읽히는 히브리어 구문(버킵슈하 השׁבכו)에 대한 재해석으로 모아진다. 정복하다(카바쉬 שׂבכ)는 동사가 문자적으로는 땅에 대한 착취와 정복을 합법화시키는 성서적 전거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문을 정복과 지배의 의미가 아닌 다스림이나 청지기직으로 이해하게 된다.
  창세기 1:28의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구문은“땅에 충만하여 땅을 경작하라”(우밀레우 엣-하아레츠 버키브슈하 השׁבכו ץראה־תא ואלמו)로 고쳐 읽어야 한다. 히브리어 카바쉬(שׁבכ)에 ‘정복하다’나 ‘복종시키다’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이 용어에 백성을 통치하는 왕의 역할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삼하 8:11; 렘 34:11). 하나님이 빛을 창조한 후(창 1:3) 빛을 내는 해와 달을 하늘 창공에 두어 낮과 밤을 다스리게(러멤쉘렛 תלשׁממל) 하셨듯이(창 1:16-18)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를 땅에 두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을 다스리게(라다 הדר) 하셨다(창 1:28). 다스리다는 말에 왕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 동사 카바쉬는 이 다스림의 맥락에서 번역해야 한다. 다스리는 자(왕)는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군이 아니라 공의를 펼치고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메시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왕이란 세상을 힘으로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평화를 세상에 펼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비판적 인식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하나님, 왕에게 주님의 판단력을 주시고 왕의 아들에게 주님의 의를 내려 주셔서  왕이 주님의 백성을 정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왕이 의를 이루면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 주 며, 언덕들이 백성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왕이 불쌍한 백성을 공정하게  판결하도록 해주시며, 가난한 백성을 구하게 해주시며 억압하는 자들을 꺾게 해주 십시오(시 72:1-4).

  이스라엘의 왕도에 대한 이 같은 증언은 권세 있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과도 그 맥이 닿는다(막 10:42-44). 그러기에 창세기 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은 ‘땅을 경작하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땅을 경작하는 청지기로 사람을 세상에 두셨다는 소리다. 창세기 1:28의 속내를 이렇게 읽을 경우, 창조신앙에서 문화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경작하거나 재배하는 산물이 된다. 문화(culture)란 단어가 땅을 경작하다는 라틴어(colere)에서 파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은 문화를 일구고 가꾸는 존재로 부름 받은 것이다.
  세상은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문화는 세상을 드러내는 무대다. 사람은 문화로 자기를 표현하고, 문화는 사람에 의해서 배양된다. 문화는 세상에서 경작되거나 재배된 인간생존의 산물이다. 사람은 땅을 경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이란 문화적 존재라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구약의 이스라엘 신앙이 본래 문화를 대적하거나, 초월하려고 하거나, 변혁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창조된 인간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이 문화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의 창조전승이 창세기 1장과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세상 문화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드러내라고 꾸짖기도 하며, 세상에서 진행되는 삶과 이스라엘이 살아야 할 삶 사이에 충돌이 인다고 탄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비판적 인식들이 무조건 살아가야 할 삶(신앙)과 살아가고 있는 현실(문화)을 갈등구조로 보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신앙문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의 문화를 수용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즉, 이 세상을 재배와 경작의 대상으로 읽으려는 정신에서는 구약의 창조전승이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듯이 우리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기대로 경작하는 문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 같은 기대는 이 세상을 향한 전향적 포용의 자세와 맞물려 있다.
  문화는 배양되는 것이다. 라틴어에서 경작(cultura)은 원래 자연적 성장을 돌보는 일이다. 땅을 경작하라는 말에는 문화를 가꾸고, 재배하고, 즐기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나서 즐기셨듯이(!) 우리도 경작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 여기에는 성과 속을 가르는 이원론이 없다. 문화를 예찬하지도 않지만, 문화를 정죄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역사가 진행되면서 문화는 차츰 자연 그대로의 불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치닫는다. 자연 상태의 어떤 것에 인위적으로 첨삭이 가해진 실체를 문화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 적응하거나 대응하여 생존하려는 인간의 활동이 문화로 간주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참 문화에 대한 성서적 기준이 제시된다. 참 문화는 문화를 가꾸고 수용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문화다. 문화의 실천이 각자의 삶을 풍요롭고 복되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쾌락이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땅을 경작하라는, 즉 문화적 존재로 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고에는, 세상에서 실천되는 문화가 세상을 혼돈(chaos)으로부터 바꾸어 보기에 좋았던 코스모스로 만드셨던 하나님의 일과 아날로지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가르침뿐만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은유가 된다. 사람은 문화적인 삶을 통해 소수자와 다수자가 공존하고, 섹스와 젠더를 넘어 양성평등의 사회가 구현되며, 사람과 환경이 어우러지고, 계층과 계층이 소통을 이루는 사회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손발로 구현되어야 한다. 이런 문화실천의 범주에는 종교문화만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언어나 음식, 풍속이나 예술, 정치나 경제, 법과 제도, 문화와 예술, 도덕과 윤리 등이 다 포함되어야 한다.


Ⅲ. 문화는 소통의 수단이다.

  성서는 글로 기록되어 있다. 성서는 문학의 성격을 지닌다. 성서(Bible)라는 용어는 책이란 뜻의 헬라어(비블리아 βιβλια)에서 왔다. 유대 전통에서 타낙(Tanakh)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은 성서시대 이후 유대 신앙공동체에서는 미크라(ארקימ), 곧 읽혀진 것(that which is read)으로 불린다.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고대 히브리어 시문인 드보라의 노래(삿 5)로부터 주전 2세기 산문체 내러티브인 다니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말로 독자들과 소통한다. 성서는 글로 기록된 문화의 열매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 구전→ 자료→ 텍스트→ 경전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성서본문의 특징은 단연 그 문학성에 있다. 여러 종류, 여러 형식, 여러 내용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하나로 묶는 수단이 바로 글이다. 성서의 말씀이 신학적이고, 법적이고, 역사적이고, 도덕적이고, 영적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성서는 문학적이다. 알터(R. Alter)의 지적대로 성서의 기반은 순수하게 미학적 활동으로 여겨지는 문학적 창작 문화(culture for literary invention)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신앙공동체는 그 콘텍스트가 구전→사본→활자→전자매체 순으로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문화적 충격, 문화의 수용, 문화적 적용을 거쳐야만 하였다. 신앙교육의 매체가 변화함에 따라 신앙공동체의 구조와 성격도 변화하였다. 미디어가 달라지면 문화도 달라진다. 문화가 달라지면 종교 현상도 변화를 이루게 된다. 예컨대 사도바울이 많은 편지를 써서 먼 곳에 있는 교회들을 가르치던 문화는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신속한 확산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의 성장과 확산 이면에는 초대 교회가 편승하였던 그레코-로마 사회의 문화적 토양에 대한 효과적인 적응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미디어와 문화는 공생적인 관계(symbiotic relationship)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월터 옹(Walter Ong)이 지적했듯이 글쓰기만큼 인간의 의식을 변혁시킨 것은 없다. 글로 기록하는 문화가 없었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계몽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입말로 이루어지는 소통이 사람들의 정보를 나르는데 그치고 말 때, 읽고 쓰는 글에 바탕을 둔 소통은 사람들의 사고(思考)를 스스로 자극하고 형성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쌍방적으로 소통하는 문화를 구축하게 되었다. 성서를 미디어로 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글로 전달되고 있다는 형식만 우리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성서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소통하신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소통을 글감으로 다룬다. 독자들에게 세상의 기원, 유일신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구원과 심판, 창조와 종말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와 전승은 모두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가령, 창조신앙이 고발하는 혼돈이란 소통이 없는 상태다. 소통이 단절된 상태다. 반면 창조된 시간과 공간의 질서는 소통하는 상태다. 성서적 문화의 바탕에는 소통이 있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있다. 문화는 특정 집단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다. 문화와 소통은 함께 간다. 모든 문화적인 행동은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사건이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문화적인 사건이다. 어떤 사회가 그 구성원들과 어떻게 소통하느냐는 것은 문화를 이루는 요소가 무엇인지와 그 사회의 구조와 사고방식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구약성서에서 문학적 소통은 단순히 특정 주장 등을 일방적으로“나르는” 수단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말씀은 그것을 읽는/듣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읽는 것/듣는 것을 자기들의 처지에서 대담하게 심화시키도록 돕는다. 성서해석학의 지평이 이른바 저자 중심의 해석이나 본문 중심의 해석에 머물지 않고 독자 중심의 해석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도 성서본문의 문학적 특성에 크게 기대고 있다. 성서적 문화가 오늘날 미디어 비평에 기여하는 길이 여기에 열린다.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소통)에 대한 분석은 소통의 수단인 매체(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등)에 집중되었다. 우리가 흔히 미디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체로 지시적이거나 일방적인 의사 전달에 치중하는 수단들이다. 문화 소비자들은 문화 생산자의 의견이나 지시를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제 미디어는 문화적인 상호교제를 커뮤니케이션의 주된 과제로 삼는 쪽으로 리모델링 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지시하거나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는 형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전달자(media)의 역할에서 중재자(mediations)의 역할로 재개념화되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전달의 수단이기보다는 상호간의 의사를 조정하는 과정으로 시 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하는 과정에는 문화에 대한 물음이 동반된다. 즉 커뮤니 케이션이 문제 삼았던 것은 무엇을 인식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인식했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재인식의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커뮤니케이션을 전혀 다른 관점에 서,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수용의 측면에서 깨닫게 하는 새로운 방법론 의 핵심이 되었다. 이것은 미디어의 내용이 사람들이 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 라서 거부되기도 하고 다양하게 활성화된다는 것을 드러내보였다.

  커뮤니케이션은 본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호간의 의사를 조정하는 과정이었다. 오늘날의 미디어가 그 역할을 포기한지 오래 되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미디어는 대중에게 무엇을 인식(recognition)하게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인식(re-cognition)하게 하느냐를 전달의 과제로 삼아야 된다. 여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수행하는 문화의 역동적인 모습이 펼쳐진다. 미디어는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미디어는 결코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미디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도이자 문화를 엮는 거미줄(web)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자기들의 시각, 가치관, 의미 등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우리 삶의 환경(matrix)이 되었으며, 그렇기에, 사람들은 미디어라는 지도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상업적인 미디어가 전달해 주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자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미디어라는 거미줄 환경 속에 뛰어 들어가 적극적으로 자기의 의미를 창출해 가고 있다.
  미디어 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교회에 던지는 경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교회의 언어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가? 오늘날 신학의 글쓰기가 세상과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고 있는가? 신학이 오늘날 상업주의에 기초한 미디어 문화에 대한 처방이 되려면, 신학이 세상과 소통 가능한 언어가 되려면 신학의 문법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신학의 지평에서 수행되는 성서해석학은 말씀의 외면에 천착하던 지금까지의 관행에서 벗어나 말씀의 내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씨름을 해야 한다. 여기에 성서해석학이 결단해야 할 메타노니아가 있다.
  말은 소리고 글말은 텍스트다. 텍스트는 소리의 문자화다. 말씀이 육신을 입음이다. 성서의 역사비판이나 형태 비판은 텍스트의 글말의 신비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성서의 과학적 탐구다. 성서의 과학적 탐구는 성서이해의 지평을 넓혀주는 넓이의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이해의 깊이는 성서의 과학적 탐구로 다 드러나지 않는다. 성서언어나 성서적 글말의 다의성은 텍스트의 사실성이나 역사성을 캐묻는 노력에서 다 파악되지 않는다. 역사비평이 성서해석학의 대부로 자리 잡기 이전 신앙공동체에서 소통되었던 중층 해석학을 이 시대의 유산으로 창조적으로 재활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에 역사비평이 소개되기 이전 경전의 말씀을 읽고, 먹고, 연주하던 동양적 경학(經學)의 전통을 이 시대에 새롭게 갈무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매몰된 비평적 문법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적 글말의 다의성과 다성적 증언을 붙들게 될 때 성서의 말씀은 상징이 되고, 비유가 되고, 메타포로 상승하게 된다. 그럴 때 성서의 말씀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용어대로 닫혀 진 책이 아니라 열려진 책이 된다. 거기에서 성서해석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가 된다.


Ⅳ. 문화는 구원받아야 한다.

  구약의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기대가 하나님의 실망으로 바뀌는 과정을 여과 없이 전한다. 벌거벗었으나, 즉 자연 그대로였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리게 되는 자취를 아픈 마음으로 보도한다(창 2:25; 3:7). 기대가 우려와 절망으로 돌변한 것이다. 하모니가 불협화음으로 바뀐 것이다. 창세기 3-11장이 전하는 사람의 역사는 문화가 자연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 문학평론가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슬픔을 배우는 일이다고 실토했듯이 인간 역사의 원형을 증언하는 창세기 이야기(3-11장)에서 우리는 슬픔을 배우게 된다. 성서학자의 글 읽기와 삶 익기가 오늘의 삶을 향한 연민과 무관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화의 실천은 땅을 재배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곧 사람은 땅에 살면서도 땅과  분리되는 방향으로 살아가기의 방향을 튼다. 문화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문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서 이루어진 특정 수단이나 상태를 가리키게 된다. 보기에 좋았던 하나님의 작품이 사람의 손에서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습 그대로를 좋게 보지 않고 인위적으로 변형시켜 놓은 상태를 가리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여기에 사람의 손으로 가꿔지는 문화가 사람의 욕망과 쾌락과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문화는 문명과 동의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와 문명을 상호보완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문화가 인간생존의 내적 상태와 연관된다면, 문명은 그 외적 표현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 영혼의 배양이 문화라면,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외적 조건들의 개발은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명은 문화의 외적 표현이고 문화는 문명의 내적 상태이다. 역사적으로 살필 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문화는 야만스러움과 구별되는 공동체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점에서는 문명도 마찬가지다. 라틴어 civis(시민)와 civilis(시민에 속하는)는 civilitas(공동체), 즉 질서정연한 사회발전과 그 과정의 산물로 여겨지면서 야만과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된다는 것은 도시(city) 속에 사는 사람, 즉 시민(citizen)이 되는 것이었다. 도시는, 도시를 얼개로 표출되는 문화는, 문화적 인간을 위한 주거공간이었다. 문화는 도시의 발달과 함께 왔다. 이 땅에 이루어진 최초의 문화는 주전 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메리안(Sumerian) 문명이다. 글자(writing system)와 도시건설은 문화의 척도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다. 쐐기글자 토판에 기록된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회자되는 수메리안 문명은 도시의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가 거론하는 마르둑(Marduk)의 코스모스 창조가 바벨론이라는 도시의 건설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이런 깨달음을 분명히 한다.

 아눈난키(Anunnaki)들이 입을 열어
 그들의 주 마르둑에게 말하였다.
 “주여, 이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가 무엇으로 주께 경의를 표하오리까?
 우리로 성소를 지어 그 이름이 울려 퍼지게 하소서.
 우리들의 저녁 쉼터가 여기에 있다. 그 안에서 쉼을 얻자.
 우리 다같이 성소를 짓자. 주께서 거하실 방을 짓자.
 우리가 (신년축제를 위해) 당도한 날, 우리는 그 곳에서 쉼을 얻으리.”
 마르둑이 이 소리를 듣자
 그 모습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바벨론을 건축하라, 너희들이 요청한 건물을 지어라.
 벽돌공사로 정성껏 다듬어라. 너희가 그 이름을 ‘성전’이라 하리라.”(Enuma  Elish, Tablet VI, line47-58).

  바벨론은 마르둑이 거주하는 성소이다. 바벨론은 마르둑이 다스리는 거대한 도시국가다.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창조신화에 도시가 코스모스의 창조와 함께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도시는, 그리고 도시문명과 함께 거론되는 문화는 창조처럼 인류역사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구약의 창조 이야기와 큰 대조를 이룬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도성이나 도시에 대해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은 여러 동물과 식물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비쳐진다. 창세기 2-3장이 전하는 창조기사는 에덴이라고 불리는 한 동산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구약성서의 서두에 수록된 두 개의 창조 이야기에는 도시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땅에 문명을 세우는 삶은 땅을 경작하는 삶과 갈등을 겪게 된다. 아벨과 가인의 충돌이 그렇고(창 4:1-15), 도시의 건설과 문화적 생존이 가인의 후손이 이룬 업적으로 소개되는 창세기의 고발이 그러하며(창 4:16-24),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도시문명에 대한 창조신앙의 비판적 인식이 그러하다(창 11:1-9). 이 같은 사실은 인간의 삶에 대한 성서의 구속사적 증언이 반(反)도시적, 반(反)문명적, 반(反)문화적이라는 암시를 드러낸다. 왜 구약의 구속사 신앙은 도시적 삶을 원초적으로 거부하는가?
  성경 이야기에서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가인이었다. 그 도시를 가인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이 에녹은 365년간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사라갔던 에녹과 동명이인이다). 살인자 가인의 후손을 위한 도성이 인류가 개척한 문화의 들머리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인이 세운 도시문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거리와 비례한다. 가인이 야웨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창 4:16)는 지적은 예사롭지 않다. 도시문명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에덴에 심은 동산(간 ןג)이지만(창 2:8a), 가인이 세운 것은 도성(이르 ריע)이다(창 4:17). 하나님은 “심으셨지만”(나타 עטנ), 가인은 “세웠다”(바나 הנב)! 하나님이 에덴에 만든 동산은 땅에 심어놓은 뜰이었다. 그렇지만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가서 가인이 구축한 주거지는 하늘로 돌을 쌓아 이루는 성(城)이었다. 하나님을 떠나 이룬 가인의 삶의 자리가 도시였다고 하는 것은 도시에 대한, 아니 도시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문화에 대한 성서적 반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문화는 문명과 함께 간다. 가인의 족보(창 4:17-24)에 산업과 예술과 문명을 이루는 시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가인의 족보로 소개되는 본문은 살인자로 시작해서 살인자로 마감하는 구조를 띤다. 살인자 가인이 시조가 되고, 살인자 라멕이 그 후손이 되는 형식이다. 이 두 살인자 사이에 장막을 치고 집짐승을 치는 사람(야발),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사람(유발), 구리와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두발가인)의 조상이 나열되고 있다. 가인의 후손이 이룬 문명의 자취는 그 후손 라멕이 세상에 대고 외치는 폭력으로 끝난다. 가인계가 이룬 도시문명과 그 문화적 업적은 이처럼 섬뜩하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 다. 가인을 헤친 벌이 일곱 갑절이라면, 라멕을 헤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  4:23-24).

  문화와 문명의 진보에 새겨진 목소리가 죽음을 부르는 소리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여기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전파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발이 제기된다. 도덕과 윤리가 실종된 문화는 죽음의 문화다. 정의와 공평이 사라진 산업과 기술은 약탈의 현장이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나 이룬 학문과 예술은 폭력의 실천이다. 문명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억압과 소외와 착취의 드라마는 솔로몬이 지었다고 하는 성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야곱의 후손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밭에 물을 대는 삶을 살아야 되었지만(신 11:11), 그들은 현실적으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땅 위에 성을 쌓고 반(反) 이스라엘적인 삶을 거침없이 개척하는 제국의 길을 걸었다.
  이스라엘의 정신사에 도시에 대한 긍정적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도성이라거나, 다윗의 도성을 온 땅이 찬양한다거나, 하나님이 시온이라는 도성을 세우셨다는 고백은 시편의 시온신학에서 즐겨 듣는 증언이다(시 48:1-2; 78:68-69; 132:14). 하나님이 시온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전승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더라도, 그 문화의 슬로건이 부정(不淨, 不貞, 不正)과 허물을 치장한 것이라면, 그래서 탐욕과 교만과 이기심을 드러내고자 조직된 문명이라면, 바벨론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예루살렘과 바벨론을 같은 지평에서 고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수립한 삶의 양식이 풍요와 억압의 고리로 엮었던 애굽에서의 삶과 연속선상에 있다면, 도시는 혼란의 자리요, 그 도시가 내세운 문화와 문명은 돌로 쌓은 탑이자, 육(肉)으로 지은 성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 니느웨, 바벨론, 고린도, 로마 등과 함께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도시에 든다. 예레미야가 바라보면서 탄식한 곳이 예루살렘이고(렘 7), 예수가 눈물을 흘리며 쳐다본 곳이 예루살렘이다(눅 19:41). 성전 안에 도시가 자리 잡아야 하는데, 도시 안에 성전이 버티는 모양새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초기 묵시사상으로 거론되는 이사야의 비전(사 24-27)이 도성의 파멸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첫 걸음으로 조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 창조의 비전에 하나님이 세우는 도성(새 예루살렘)이 포함되는 것은 도시문명이 단순히 파멸이나 포기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 받아야 되는 대상임을 시사한다. 이스라엘 신앙의 종말론적 비전에는 도시적 삶을 극복하려는 문화 비판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Ⅴ. 문화는 변혁되어야 한다.

  성서적 신앙에서 문화는 변혁의 대상이다. 성경의 눈으로 문화를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종교문화다. 성서시대 히브리인들의 모듬살이에서 제의(ritual)는 이스라엘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로 자리매김 하는 터전이었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한 편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신앙의 자리이자 다른 한 편에서는 사람과 세계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해의 자리다. 이 두 차원이 교차하는 곳에서 종교문화라고 일컬어지는 표상이 구체적인 옷을 입는다. 제의는, 경우에 따라서는, 가령 이스라엘의 포로기 시대 때는, 생존을 위한 장치(mechanism for survival) 역할도 감당하였다. 제의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제의에 동참하는 자들과 이루는 연대성을 통해 절대다수의 이교도 문화 속에서 소수민족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성서시대 이스라엘에 대한 사회사적 평가는 여러 가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제도와 경제적 구조라는 맥락에서 규정되는 삶의 총체가 제의로 모아진다는 지적에서는 이의가 없다. 문화는 제의다. 제의는 하나님의 현실과 사람의 현실이 만나 빚어지는 현상이다. 문화를 성례로 간주할 때 문화는 상징으로 구현된다. 그 상징이 왕국시대의 경우 정경적 문화(canonical culture)와 그와 구별되는 통속문화(folk culture) 사이의 대결과 긴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종교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문화가 종교를 담는 그릇이라면, 종교는 문화를 구성하는 얼개다. 문화, 곧 culture의 바탕에는 제의, 곧 cult의 체험이 도사리고 있다. 제의(cult)를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형식으로 이해할 때, 종교와 문화는 서로 촘촘히 얽혀지게 된다. 종교는 고대 서아시아의 문화에서 으뜸가는 요소였다. 삶에 첨가된 어떤 요소가 아니라 삶 자체가 종교였다. 우리 귀에 익숙한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한 형태가 된다. 성서적 신앙은 성서적 문화의 실체이고, 헤브라이즘이나 그레코로만 시대의 성서적 문화는 유일신 신앙이나 삼위일체 같은 성서적 신앙을 산출하는 한 통로가 된다.
 종교는 제의로 구현된다. 교의(dogma)에 앞서 의례(ritual)로 표현된다. 종교의례와 의식은 삶의 현실 속에서 표출된다. 우리가 이 원초적 제의를 간과한 채 구원의 언어만을 추적하다보면 신학은 형이상학에 머물게 된다. 신학이 삶의 모습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종교제의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의는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종교제의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의 구별이다. 사람도 구별하고 사물도 구별한다. 이것은 야웨신앙을 실천하는 이스라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시간으로부터 거룩한 시간을 구별하고, 일상적인 장소로부터 거룩한 공간을 구별한다. 예컨대 구약의 안식일이 시간의 구별이라면, 성전/성소는 공간의 구별이다. 시간과 공간의 리듬에 맞춰 진행되는 제의와 예배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로 이해하는 일종의 은유가 된다. 시간의 구별은 안식일로 그치지 않는다. 안식일은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같은 절기로 구체화된다. 이 절기에 실천하는 성전순례는 사람들의 일상을 일정한 시간마다 거룩한 신비와 반복적으로 접촉하게 하는 삶의 행진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하는 이런 식의 긴장을 통하여 종교는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를 추구하게 한다.
 성서적 가르침의 시각에서 문화를 관찰할 때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종교와 제의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말 그대로 우리 사회의 문화(culture)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cult)와 서로 얽혀 있는가? 제의가, 종교가, 종교문화가 사람이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다듬는 실재로 작용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다. 그러나 세속사회의 대중문화 속에서도 제의는 인간의 삶의 현실에서 경험되는 실재인가?
  종교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면 오늘날 우리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의 구별은 반드시 종교적 제스처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오락 행사도 예배 달력에 걸맞은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예컨대 야구 시즌에 야구경기가 진행되는 일람표에 맞춰 운동장에 모여 열광하는 시민들의 몸짓을 보라.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제의요 의식이다. 따지고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경기는 종교적 축제의 일부였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달리고 타고 뛰었다. 운동은 곧 제의(ritual)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운동은 더 이상 제의가 아니다. 오늘날은 기록(record)을 위해서 달리고 타고 뛴다.
  비단 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몸짓만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운동장의 언어나 규칙 등이 일상생활에 깊숙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국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야구경기 시즌은 일종의 예배력(liturgical season)이다. 스포츠 행사라는 제의를 미디어가 일상의 시간과 장소로 중계할 때 그것은 단순한 중계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구별된 시간과 장소에서 전개되는 행사를 세상 모두에게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게다가 그 중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스포츠 행사의 재방송은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나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 모두에게 두 종류의 시간과 장소를 사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는 살아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현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재현되는 시간과 공간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임의로 조종할 수 있다.
  옛 시대의 제의와 오늘날의 문화 행사 사이에 이런 아날로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행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옛 시대의 제의에서 거룩한 공간(예를 들어 성전)에서 얻는 체험은 일상적인 언어나 표현으로는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성전은 온 세상의 배꼽이요,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이었다. 그것은 나아가 땅과 음부를 잇는 축이 되기도 했다. 이 거룩한 곳은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시간은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순환적인 것이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것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의식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초일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는 성속(聖俗)의 구분에서 속(俗)에 속한다.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용어를 빌어 표현한다면, 거룩해진 우주에서의 삶(life in a sacralized cosmos)이 아니라, 거룩한 옷을 벗긴 우주에서의 삶(life in a desacralized cosmos)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가 고발하는 인간의 역사는 두 종류의 삶, 두 종류의 문화 이야기가 된다. 하나는 생명의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반(反) 생명의 문화, 즉 죽음의 문화다. 성서적 문화비평이 오늘의 문화(대중문화)에 기여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 성서적 진리는 오늘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대중문화를 반생명적인 문화로 보게 한다. 신학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見)에 기초한 진단에 그치지 않고 존재해야 할 당위를 향해 선언(觀)해야 한다. 존재하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할 당위를 향해 고백해야 한다. 견과 관은 다르다. 해석은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작업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이지만,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은 죽음의 문화다. 신학적 해석학은 사물을 수동적으로 견(見)하지 말과 적극적으로 관(觀)해야 한다. 견(見)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관(觀)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성서신학적 문화비평은 우리가 으레 일상적이라고 여기던 것을 다시 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문화는 새 창조의 요소이다. 죽음의 문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은 어디에서 불까? 에스겔의 환상은 이런 궁금증에 대한 처방이다. 에스겔이 본 뼈는 바벨론 포로기의 삶을 살아야 했던 유다백성의 정황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데리고 갔던 골짜기에 가득히 널려 있던 마른 뼈들은 하나님 없이 조성되고 건설된 이스라엘 문화의 무생명적인 현실을 드러낸다. 이런 뼈들을 향하여 주께서 에스겔에게 묻는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 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겔 37:5, 9).

  사람은 하나님의 날숨을 들숨으로 마셔야 산다. 생기(루아흐 חור)는 하나님의 바람이다. 하나님의 숨결이다. 이 바람이 불어 흙(몸)이 생명체(네페쉬 하야 היח שׁפנ)가 되고, 이 바람이 불어 아드마(המדא 흙)가 아담(םדא 사람)이 된다. 이 바람이 불어 반생명의 문화 속에서 동물적으로 생존하던 존재들이 인간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대 역전의 변화가 일어난다. 성서적 진리는, 기독교 신앙은, 이 하나님의 바람이 일으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웅변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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